+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원래 부활 제3주일 복음은 요한복음 21장 1절에서 19절인데 오늘 저는 15절에서 19절까지만 봉독했습니다.
이유는 길기도 길지만은 앞부분 해설은 제가 평일 강론 때 얘기를 드린 바가 있습니다.
153마리의 의미도 말씀드렸었고 부활의 실제성에 대한 것도 여러 번 얘기를 드렸기에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반복적으로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21장 15절에서 19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의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 더 상세하게 베드로의 심리를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15절에서 19절까지의 복음에서 키워드는 바로 이겁니다.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을 세 번씩이나 다짐을 받으십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런 이 세 번의 다짐 있기 전의 일이 아시죠?
마태오복음 26장 33절에서 34절에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께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 내 말 잘 들어라.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십니다.
사실 어떻게 됐습니까?
예수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그렇게도 호언장담하던 예수님에 대한 충성과 사랑을 사람들 앞에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잘못을 저지른 후에 슬피 울었던 과거를 갖고 있던 전과자였습니다.
배신이라고 하는 죄를 지었던 그러한 전과자였던 겁니다.
강론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배반했던 전과가 없으십니까?
영성체할 때마다 고백소에서 죄 사함을 받고 나올 때마다 또 피정을 들을 때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얘기했었다가 예수님 배반하신 적 없으십니까?
예수님 배반에 대한 전과는 거창한 것이 아니죠.
한마디로 예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지 못하는 겁니다.
돈이 예수님보다 윗자리에 있고, 쾌락이 예수님보다 윗자리에, 자식이 예수님보다 윗자리에 있고,
교만이 예수님보다 윗자리에 있는 삶을 살아갈 때, 이게 바로 예수님을 배신하는 죄요,
그럴 때마다 우리의 전과는 전과 2범, 3범, 5범, 10범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 삶 가운데 예수님을 첫째 자리로부터 밀어내신 기억이 몇 번이나 되시냐 이겁니다.
기억이 나든 안 나든 우리는 분명히 베드로 사도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색깔은 달라도 우리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예수님을 모릅니다’라는 행동, 생각 속에 산 적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이 강론을 하는 저도 역시 전과가 많습니다.
예수님 24시간 동안 첫째 자리에 못 모시고 산 적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보다 내 취미 생활 먼저 선택한 적도 많았고요.
예수님보다 저의 교만이 예수님을 짓누른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배반 세 번으로 끝났습니다.
그 후에는 오늘 신앙 고백처럼 정말 양들을 치기 위해 애쓰다가 십자가형에 돌아가십니다.
베드로 사도의 세 번의 배반은 우리에게 큰 상징성을 가져옵니다.
오늘 감곡에 살 집 리모델링을 위해 조경하시는 분을 뵈었습니다.
제가 디자인할 수도 있지만, 전문가의 의견도 듣고 싶었고,
또 아는 분보다 일면식이 없는 분과 이야기하는 것이 더 객관적일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나중에 교우들이 와도 치유받을 수 있는, 편안하게 앉아서 묵상할 수 있는 정원이 제가 그리고 있는 정원의 모습입니다.
유튜브에서 유연히 찾은 정원회사인데, 그 회사 이름이 ‘온유’입니다.
열심한 개신교 교우처럼 보였는데, 자기는 늘 온리 유(Only You) 예수님이 첫 번째다.
그래서 회사 이름을 온리 유를 줄여 ‘온유’라 했다는 거죠.
그리고 조경 사업하면 찾아오는 고객 10번째까지는 이윤을 남기지 않고 봉헌하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했대요.
대단한 신앙이지요.
신뢰도 갔고 자기의 솔직한 이야기를 잠깐이라도 들으니 이분이면 신실한 정원이 나오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부인하는 죄라는 것은, 예수님을 ‘Only You’가 아니라 그 밑으로 내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의 전과 내용이었고, 우리도 역시 기억은 안 나더라도 무수히 많은 이 죄를 짓고 살았을 겁니다.
또 앞으로도 또 모릅니다.
세상 떠날 때까지 주님 사랑한다고 했던 그 입술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주님 모른 척하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을지,
예수님을 첫째 자리가 아니라 세상 것보다 밑으로 끌어내리지는 않을지 사제인 저도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이런 전과가 있는 베드로였기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고기 잡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앞에 나타나서 음식을 준비하시어
베드로를 먹이고 난 다음 제자들을 먹이고, 고개도 쳐들지 못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직격탄을 날립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다시 물으십니다.
‘예 사랑합니다.’
이로써 다시 세 번이나 사랑을 긍정할 기회를 주십니다.
세 번의 배반은 예수님의 사랑을 부정하는 거였지만, 부활한 후에 베드로에게 세 번 똑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함으로써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기회를 주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어떻게 그때 나한테 모른다고 할 수 있느냐고 따지시거나 책임을 묻지 않으셨지요.
잘못을 범한 그를 인정해 주시고 오히려 사랑을 요구하시는 모습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보게 됩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모습이 나에게 잘못한 자를 우리가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하는지,
나에게 잘못했기 때문에 주눅이 들어 있고 죄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 삶의 역사 속의 여러 사람,
우리들이 어떻게 그들을 대해야 하는지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솔하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잘못을 범한 자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를 오늘 복음에서 찾아봐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기 전의 베드로의 대답과
부인한 후에 예수님이 하신 물음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 사이에는 굉장히 크나큰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부인하기 전의 베드로 어투는 자신만만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배반하더라도 저는 절대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자신만만하고 교만해 찾던 베드로의 어투는 오늘 뭐로 바뀝니까?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라는 겸손으로 바뀌어 나타납니다.
사실 전에 베드로가 죽을 각오까지 하면서 따르겠다고 장담했던 그 사랑은 따지고 보면
베드로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자 하는 자기 지배적인 사랑이었던 겁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지배적인 사랑, 우리도 이 함정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이기적이고 자기 지배적인 사랑을 하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를
하느님이신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을 하도록
사랑의 차원을 바꿔 놓으십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또 그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을 하도록
우리에게 간접 명령을 하고 계신 겁니다.
너희들도 나처럼 하라는 얘깁니다.
이기적인 사랑 지배적인 사랑에서 자유로워지라는 얘기입니다.
‘내가 그리하지 않았느냐? 베드로에게 나는 보복하지 않았다.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한 그놈을 부활한 다음에 귀싸대기 때린 적도 없고,
째려본 적도 없고, 잘못한 죄를 다시 상기시켜서 더욱 죄의식에 빠지게 한 적이 없다.’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바로 차원을 높여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때 흔히 상대편을 자기 편한 대로 차지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경향을 띠는 경우가 대부분일 때가 많습니다.
또 반대의 경우에는 자신이 상대방에게 의존하려고 하는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원칙이 나옵니다.
누군가를 지배하려고 하는 사랑에서는 상대편의 자유가 없어져 버립니다.
지배당하는 사람은 자유를 못 느낍니다.
반대로 누구에겐가 의존적인 사랑, 그 안에서는 본인 자신의 자유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사랑은 자유로움 가운데서 만들어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를 지배하거나 그 지배하기 때문에 상대편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랑이 아니라,
더 반대로 의존하기 때문에 본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런 것을 초월한 사랑을 하라고 알려주십니다.
여러분은 이제껏 지배적인 사랑을 많이 하셨습니까, 아니면 의존적인 사랑을 많이 하셨습니까?
또 앞으로는 어떤 사랑을 하려고 다짐하고 계신 가요?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내일은 제가 운영하는 카페의 운영자들 모임을 1박 2일로 갑니다.
그래서 목자적인 마음으로 주일 강론을 미리 녹음해서 올립니다.
사제를 중심으로 20년 동안 느티나무의 그늘에 모여 있는 느티나무 카페가 더 영적인 카페로 발전할 수 있도록,
또 거기 있는 운영자들이 초심으로 돌아가 진실한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화살기도 한 번씩 좀 쏴주시면
느티나무 카페는 날로 풍성해질 겁니다.
또 여러분들도 다음(Daum) 카페 ‘주님의 느티나무에서’를 찾아서 가입하시고 등업하시면,
정회원이 되어 제가 살아온 사진이나 글 등 다양한 영적인 정보를 접하실 수 있습니다.
사제가 카페지기로 있는 어떻게 보면 한국의 가장 역사가 길고 오래된 카페입니다.
우리 운영자들은 최선을 다해 카페 발전을 위해 열심히 애쓰고 있습니다.
각 지역방도 활성화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영원에 영원을 더해서 사랑합니다.
♣2022년 부활 제3주일(5/8)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아멘~감사합니다.
아멘!고맙습니다 ~❤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