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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18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이토록 아름다운 피난처가 있던가!
본문 : 누가복음 15장 28절(11~32절)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새번역>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큰아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은 크게 두 가지가 섭섭했던 것입니다.
첫째, 자기는 밭에 나가 일을 하는 동안, 돌아온 동생을 위한 잔치가 펼쳐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철저히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잔치가 펼쳐진다면 자신에게도 빨리 알려야, 아니 실질적인 가장이니 가장 빨리 알리거나 상의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는 충분히 화가 날만한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자신을 왜 종처럼 생각하느냐고 화를 낸 것입니다.
둘째, 자신보다 동생을 아끼는 것에 대한 질투였습니다. 놀랍게도 형은 동생이 이미 전 재산을 다 날려 버렸다는 소식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누군가를 통하여 전해 들었던 것입니다. 아마 동생의 그런 소식이 형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은 아버지를 실망 시키지 않아야겠다는 책임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친구들과 염소 새끼 한 마리라도 잡아 즐기지 않고 부지런히 밭에 나가 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신보다 동생을 더 사랑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아버지에게 화가 난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 다행인 것은 아버지는 그런 큰 아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작은 아들이 살아 돌아와 기쁜 자신의 마음을 큰 아들이 망친다고 오히려 화를 냈다면 정말 이 이야기는 또 다른 탕자를 만들어 내는 결과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솔직히 이런 아들의 태도에 아버지도 화가 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큰 아들의 태도에 실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큰 아들의 마음과 그 동안의 열심을 알고 있었고, 동일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아들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해 주게 됩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누가복음 15장 31절, 새번역>
아버지는 떠난 작은 아들을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늘 함께 있는 큰 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큰 아들도 떠나면 어쩌나 조바심이 났을 수 있지만 다행히 큰 아들은 작은 아들의 자리까지 메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아들에게 준 몫을 빼고, 남은 모든 것은 이제 큰 아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충분히 속 상할만한 큰 아들에게 이 말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의 감정도 큰 아들에게 숨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누가복음 15장 32절, 새번역>
아버지는 아우에 대한 소식을 전혀 몰랐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했고,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도 사랑하는 아들 둘 중 한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른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마음이었겠습니까? 이미 소식을 알고 있었던 형은 최소한 그 소식을 아버지에게 알려 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죽었다고, 잃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작은 아들이 살아 돌아왔는데, 아버지로서 어떻게 즐기며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말에 큰 아들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헤아려 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동생 역시 아버지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미워한다고 해서 아버지도 미워할 거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매일 동산에 서서 기다리는 아버지를 보았다면, 차라리 소식을 듣자마자 동생을 데리고 왔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 아버지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비유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고 끝이 나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상상하고 싶습니다. 동생은 형에게 용서를 빌었을 것입니다. 형은 동생을 안아 주었을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난 장면과 비슷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런 두 아들을 보면서 더욱 기뻐했을 것입니다. 잔치가 마무리 되고, 시간이 흘러 동생은 종과 같이 열심히 일하며 자신의 과거를 반성했을 것이며, 큰 아들은 어엿한 이 집의 가장이 되어 아버지와 동생을 잘 보살피는 존재가 되어져 갔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다시 둘째 아들의 시간으로 시선을 한 번 옮겨 봤으면 좋겠습니다. 낡아 빠진 창고 같은 곳에서 겨우 몇 알 남은 쥐엄 열매를 보면서 깊은 한숨을 쉬며 스스로 절망하고 있는 둘째 아들입니다. 가뭄이 너무 심해져서 이제는 정말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쯤 되면 스스로에 대한 비판이 너무도 커져서 나쁜 결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을 모두 탕진한 후였기에 마음의 허기는 더욱 심각했을 것입니다. 매일 스스로를 향해 언어의 칼로 비수를 꽂았을 것입니다. 차라리 죽자! 살아서 무슨 소용이 있나! 생각은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였습니다.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유산을 달라고 했던 그 황당한 일 속에서도 기꺼이 재산을 내어주셨던 아버지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욱 더, 이렇게 죽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가장 큰 불효였고, 소위 폐륜적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만약 아버지가 화라도 냈더라면, 이 작은 아들은 더 크게 빗나갔을 것입니다. 비뚤어진 채로, 자신의 재산을 훔쳐 달아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런 작은 아들에게 아무 말 하지 않고 재산을 내어 주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참 힘들고 괴롭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이해해 주어야 했고, 용납해 주어야 했고, 들어 주어야 했고, 언제나 져 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니 작은 아들은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라도 찾아뵙고 “아버지, 죄송합니다.” 이 말은 반드시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아들이 아니라 종처럼 생각해 달라고 해야겠다는 그럴 듯한 말까지 미리 생각하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나서게 됩니다. 이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누가복음 15장 17~20절A, 새번역>
얼마나 무거운 발걸음이었을지 상상이 가십니까?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길을 나섰지만,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가장 큰 걱정은 ‘아버지가 받아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돌아가면 형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너무도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갈까 몇 번을 고민할 찰라 이제 저 언덕을 넘어서면 아버지 집인 장소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솔직히 현실적으로 배도 고팠고, 힘들었기에, 더 이상 방법도 없었습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언덕을 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저 멀리서 아버지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언젠가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이, 나를 향해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기쁨과 눈물이 범벅이 된 채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대인 아버지들은 굳이 비유하자면 우리나라 경상도 아버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무뚝뚝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저히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상남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 당연한! 그것도 아버지는 엄하고 단호하고 단단한 모습이어야 했습니다. 다정함과 따뜻함을 일부러라도 표현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지금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목을 껴안았습니다. 그냥 포옹이 아닙니다. 격한 포옹입니다. 완전히 안은 것입니다. 이 행동에 아버지의 모든 마음이 이미 담겨 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환영의 인사였고, 평안의 인사였고, 자녀를 향한 사랑이 담긴 인사였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이런 얼떨떨한 상황에도 죄송한 마음이 앞섰기에 떨리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준비해 온 대사를 읊기 시작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1절, 새번역>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 곁을 지키고 있던 종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누가복음 15장 22~24절A, 새번역>
알고 계십니까? 이 명령으로 인하여 그 어느 종도 작은 아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차하면 자신을 아들이라 부르지 말고 종들처럼 대해달라는 그 말에 종들이 작은 아들을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일부러라도 더욱 더 명확하게 종들에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결코 종이 될 수 없습니다. 아들은 아들입니다. 잘못을 했어도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존중합니다. 아들의 마음을 알았기에, 용서하고, 다시 아들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힙니다. 늘 작은 아들이 입던 옷이었습니다. 초라한 모습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손에 반지를 끼웠습니다. 작은 아들이 이 집에서 어떤 존재인지, 아버지의 상속자로서의 아들임을 다시 모두에게 알려줍니다.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종의 신분이 아닙니다. 아들입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습니다. 마치 모든 과거를 살진 송아지에게 위임하라는 아버지의 생각이 보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만이 아닌 집안 전체 우리의 축제로 선포합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아들의 살아남과 되찾음을 함께 기뻐해야 한다는 명령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기에서 한 가지 실수 아닌 실수를 한 것입니다. 큰 아들도 자신의 마음과 같을 것이라고 큰 아들을 너무 믿었던 것입니다. 분명 큰 아들도 작은 아들이 돌아오면 자신과 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자신의 큰 아들을 너무도 믿었던 것이 실수입니다. 그래서 실수한 만큼 사과도 컸던 것입니다. 큰 아들이 들어오려고 하지 않자 종을 보내 설득한 것이 아니라 직접 나갔다는 것만으로도, 달래며 자신의 마음 전부를 전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아들의 마음은 충분히 수그러들었을 것입니다.
음악 소리는 온 마을에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작은 아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더 빠르게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작은 아들을 욕했던 사람들도 아버지가 베푸는 용서의 잔치를 보면서 그 욕을 멈추고 그래도 살아 돌아 왔음에 감사하며 그 잔치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함께 춤추며 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실로 작은 아들이 먼 타국으로 떠나간 후로 처음 있었던 잔치였을 것입니다. 이윽고 화가 났던 큰 아들도 함께 들어와 동생을 한 대 툭 치고는 안아 주고 함께 춤추며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동역자 여러분! 예배자 여러분! 이토록 아름다운 피난처가 우리가정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문제가 없는 가정은 없습니다. 화가 없는 가정도 없습니다. 부모 마음을 몰라주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자녀들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모의 실수도 존재합니다. 참으로 다양한 전쟁 같은 삶이 가정에서는 펼쳐집니다. 그런데 그런 가정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가정이기를 소망합니다.
큰 아들도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고, 작은 아들도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고, 수많은 일들 속에서 서로가 함께 있음에, 서로을 잃어버리지 않았음에 감사하는 아름다운 피난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쫓기다 도착한 피난처, 가정!
업무에 쫓기다 도착한 피난처, 가정!
사람에 쫓기다 도착한 피난처, 가정!
걱정과 염려에 쫓기다 도착한 피난처, 가정!
부모가 자녀를 기다리는 가정!
자녀가 그런 부모로 감사해 하는 가정!
현실 남매, 현실 형제가 서로 생각해 줄 수 있는 가정!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서로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줄 수 있는 가정!
내 편이 되어 달라고 외치지 않아도, 이미 같은 편인 가정!
오늘 이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와 유대인이라는 큰 아들, 헬라인이라는 작은 아들, 부르심을 받은 종들의 이야기, 현대적으로 비유하자면 하나님 아버지와 현재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큰 아들, 아직 하나님을 믿지 못 하는 작은 아들, 그리스도인 종들의 이야기인, 소위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아버지 되시는 가정의 이야기이도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그토록 아름다운 피난처인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또 하나 이처럼 아름다운 피난처인 가정의 회복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이신 부모님들에게 오늘 이 아버지의 마음, 사랑과 용서와 긍휼이 전해지시길 소망합니다.
큰 아들이라 느껴지시는 분들에게 오늘 큰 아들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기를 소망합니다.
작은 아들이라 느껴지시는 분들에게 감사와 감격과 회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속한 모든 가정이 이 험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난처요, 최고이자 최후의 피난처가 되어, 사랑으로 충전되고, 용서로 회복되며, 기쁨으로 살아갈 맛나게 하는 가정이 되길 마음 다해 축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한 가지를 부탁드립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도, 큰 아들에게도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표현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에게도 이 솔직한 마음의 표현이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정중한 대화를 통한 표현이 필요합니다.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말할 용기가 필요하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무시할 것이 아니라 질문할 따뜻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피난처요, 최고이자 최후의 피난처인 가정이 ‘말’로 아파하는 곳이 아닌 사랑의 언어로 회복되어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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