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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7일 이사하고 이제 첫 주일을 맞았습니다.
그동안 제구가 어디 있는지 못 찾아서 냉담 아닌 냉담을 했습니다.
이 집에서 첫 번째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이사 잘하셨는지, 잠은 새집에서 잘 주무시는지 궁금하실 텐데요, 며칠 안 지났지만, 신고식은 톡톡히 했습니다.
이삿짐 센터분이 세탁기의 냉온수 연결부위를 너무 세게 조이셨는지, 둘째 날에는 냉수가 터지고,
어제는 온수가 터져 아침에 일어나니 물바다가 되어 수중전을 치렀습니다.
누가 이사하고 물난리 겪으면 부자 된다고 하던데,
저는 부자 될 일은 없고 이렇게 기분 좋게 미사 드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면 사제 하나를 온전히 하느님의 도구로 쓰기 위해서
그 사제 주변의 봉사자들을 이렇게 선별하셔서 그 사제를 돕게 합니다.
그것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똑같죠.
저도 역시 은퇴하기 전에, 은퇴하고 난 후에 지금까지도 저 혼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많은 봉사자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사자들 가운데는 얼굴이 알려진 봉사자들이 있는가 하면 전혀 얼굴이 안 알려진 봉사자들이 있죠.
그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이십 년 동안 동영상을 찍는 파트라슈라는 닉네임의 스테파노입니다.
진천부터 감곡, 배티, 서운동, 또 아파트 생활 8개월까지, 저는 늘 고마움을 느끼죠.
사실 이번 감곡으로 오면서 제가 먼저 와서 찍어줄 수 있느냐 묻지 못했습니다.
너무 미안했고 감사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신부님 이사 가시고 바로 돌아오는 주일부터 촬영하실 거죠?’ 하며 시원하게 먼저 묻길래
‘그럼, 해야지.’ 했어요.
제가 나중에 세상 떠날 때 나를 도와줬던 많은 천사가 있을 겁니다.
그중에 제일 기억에 많이 남고 대천사급에 속하는 이가 아마 스테파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미사 드리는 이 자리는 식당, 부엌입니다.
원래는 새집으로 오면서 장만하려 했던 것 중 하나가 식탁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테파노가 ‘신부님, 저희 식탁을 바꾸려는데 혹시 필요하세요?’ 하길래,
누구라도 주려도 달라고 했지요.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스테파노에게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는 것은 스테파노 다섯 식구가 오랫동안 먹었던
식탁을 쓰는 것이겠다. 또 여기서 미사도 드릴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오늘 이 식탁에다가 제대를 차리니,
정말 성서에 나오는 대로 버려졌던 모퉁이 돌이 성전을 떠받치는 큰 돌이 된 것처럼,
식탁이 아름다운 제대가 됐습니다.
앞으로는 미사는 2층 다락방에서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제를 돕기 위해서 수많은 천사를 보내주시어,
온전히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하느님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또 하느님이 만드신 이 세상 만물에 대해서 알고 계신 지식이 얼마나 되십니까?
우리는 안다는 표현을 합니다.
창조한다는 표현은 인간에게 해당이 되지 않죠.
물론 부부의 몸을 빌려서 자식이 세상에 나오지만, 자식을 창조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세상에 대해서 안다고 표현하지, 세상을 창조했다는 건방진 얘기를 우리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입만 열면 무엇을 잘 알아, 내 자식 잘 알아 하는데, 얼마나 알까요?
여러분들 태양이 얼마나 큰 줄 아십니까?
태양은요, 지구가 백만 개가 있어야 태양 크기가 만들어져요.
그런데 이렇게 지구보다 백만 배 큰 태양이 5억 개 이상 들어갈 수 있는 별이 수억 개가 있대요.
그러니 그 지구에서도 보이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겠느냐.
또, 은하수라고 부르는 성운에는 우주에 천억 개가 있대요.
그리고 천억 개가 있는 그 성운들이 단체로 모여 있는 게 1천억 개인데 그런 성운이 또 1억 개 이상이 있대요.
우리 머리로는 짐작도 잘 안 가죠. 그만큼 우주가 큰 겁니다.
또 태양은 수소가 타고 있는데 1초에 6억 톤, 한 시간에 이조 톤이 탄대요.
그런데 태양이 생기고 45억 년 동안 탔는데, 아직 3분의 1도 안 탔대요.
여러분들, 태양을 바라보면 가만히 있는 것 같죠.
태양을 중심으로 우리가 돌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태양계를 이끌고 이 우주 속 어디론가 가고 있대요.
1초에 17km를 운행한대요.
또 지구는 어떻습니까?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있고, 그래서 사계절이 생기는 것이죠.
바다가 지구 표면의 70% 이상을 차지해서 물이 순환이 이루어져 생물이 존재합니다.
만일에 땅이 바다보다 넓었다면은 죽음의 땅으로 변했다고 그래요
이렇게 우리는 자연과 우주에 대하여 아는 게 사실 별로 없어요.
그러면 우리 자신인 인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까요?
우리 장기들과 뇌의 기능을 보면 컴퓨터보다 수천수만 배 정밀하고 치밀합니다.
음식을 먹으면 각 장기에서 양분을 흡수하고 저장하고 배설해서 순환시키는 모습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하느님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십니까?
우주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것이 없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것이 없고,
마지막으로 하느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사제로 살다 보면 정말 많은 분이 면담을 청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면담 내용 가운데 제일 많은 주제가 무엇일까요?
첫째가 자식에 대한 문제, 두 번째로 신앙에 대한 문제, 세 번째로 건강에 대한 문제예요.
건강은 육신의 건강만이 아니라, 영이 병든 것까지 합쳐서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가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문제예요.
부부간의 갈등을 많이 가지고 올 것 같은데, 그것은 참다 참다 제일 마지막에 가져와요.
‘신부님, 우리 자식이 아파요.’ ‘우리 자식이 빗나갔어요.’
엄밀히 따지면 신앙 문제가 1번이어야 하는데 당 서열 2위로 밀려나 있어요.
저는 교우들의 자식 문제를 들을 때마다 혼자 속으로 내 팔자가 제일 좋다고 생각해요.
저도 부모들의 고통에 도움을 주는 것은 한계가 있죠.
속 썩이는 자식들이 부모 마음 알면 그렇게 속 썩이겠는가.
아이들은 어른의 세계를 모릅니다.
부모의 고통을 모릅니다.
부모가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고 또 세상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몰라요.
부모는 단순히 자기들을 키워주는 사람이고 필요할 때 돈 주는 사람이죠.
부모가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죠.
분명히 좋은 부모도 있고 나쁜 부모도 있어요.
마찬가지로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모르듯이 하느님의 마음을 제일 몰라주는 피조물이 누구일 것 같습니까?
인간이에요.
제일 기대를 하고 만들었고 당신의 모상대로 만들었고, 숨까지 불어넣어 줬는데도
제일 엇나가고 빗나가는 것은 개나 고양이나 비둘기가 아니라 인간이에요.
산천초목은 하느님의 뜻대로 순응하면서 삽니다.
인간만이 창조의 질서를 거스릅니다.
죽이고 잡아먹고 이렇게 인간은 하느님의 마음을 모릅니다.
하느님이 마음을 안다면 그렇게 아프게 해드리질 않겠죠.
두뇌를 동원해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속성을 파헤쳐보고
하느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려고는 하지만,
인간은 성경에 등장하는 몇 가지 안 되는 말씀들을 통해서만 어렴풋이 짐작하고 추측할 뿐이라는 얘깁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사람에게는 인격이 있죠.
그러면 하느님한테는 뭐가 있다고 부릅니까?
‘위격’
성부 성자 성령은 인격이 아니라 위격이 있다고 불러요.
그런데 이 하느님의 위격이 몇 개가 있다고 그러는 겁니까?
성서에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이 있어요.
하느님은 한 분인데 위격이 세 가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하느님이 세 분이시냐? 그건 아니에요.
성서에서는 그 세 위격이 오직 한 분이라고 분명히 얘기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세 분이라고 하는 거는 틀린 교리예요.
하느님은 한 분이지만 위격이 셋입니다.
우리 인간에는 인격이 하나밖에 없어요.
물론 정신병적으로 다중 격도 있지만, 원래 제대로 된 인간의 인격은 하나예요.
신학자들은 성서에서 얘기하는 이 위격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을 시도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설명은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죽어서 하느님을 직접 뵙기 전에는 절대로 하느님을 완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성서 말씀이기에 믿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계시(啓示)종교라고 부릅니다.
불교는 자연종교예요. 불교에서는 우리처럼 하느님이라고 하는 개념이 없어요.
석가모니 첫 번째 깨달은 자예요.
불자들은 선배인 석가모니를 따라서 깨닫는 것이 목적이죠.
각자(覺者)가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우리들이 깨달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죠.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죠, 그래서 계시종교예요.
성서에 나오는 모든 얘기도 전부 다 하느님 쪽에서 하신 얘기예요.
하느님 자신이 알려준 것 외에는 우리는 알 수가 없기에 그분이 알려준 것을 우리는 믿을 뿐입니다.
왜 위격이 세 위격인데, 왜 한 분이시냐?
사실 우리 인간들은 논의할 대상이 아닙니다.
성서의 말씀을 믿고 있는 이상 그냥 계속 믿으면 됩니다.
왜 세 위격이냐고 아무리 저명한 신학자한테 물어봐도 답이 안 나옵니다.
오늘 우리들이 묵상해야 하는 포인트는 왜 세 위격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세 위격인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의 관계성을 묵상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세 명이 하나 되기 쉬워요? 어렵죠.
옛날에는 자식 열 낳으며 대가족인데 하나 되는 가족도 있지만,
지금은 애 하나둘밖에 없는데도 다 뿔뿔이 따로 놀아요.
셋이 하나 되기는 쉽지 않아요.
아 말하면 뭐 합니까? 자기 자신과도 하나가 되지 못할 때 많죠.
내가 나도 모를 때가 많은데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아요.
그래서 부부가 몸이 하나가 됐다고 해서 마음이 하나냐 아니죠.
저는 함께 서품받은 동창이 네 명인데 모두 개성이 강해 서로 바빠서 보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어쩌다가 네 명이 다 모이면, 정규적이라도 일 년에 몇 번 보자고 하지만, 한 번도 성사된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서너 명이 모인다는 것이 쉽지 않아요.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그 세 위격의 관계에 대해서 성서에서 전하는 이야기만 믿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에 ‘아들은 아무것도 자진해서 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1절에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자, 이제 세 위격의 관계성에 제일 중요한 주제가 나왔어요.
하나예요.
세상에는 하나처럼 보이지만 하나가 아닌 관계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계원, 돈으로 뭉쳐진 관계죠.
정치적인 견해로 뭉쳐진 관계를 당원이, 혈연 지연으로 뭉쳐진 관계를 우리는 혈족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이런 당원, 혈족의 관계는 결코 영원한 평화를 간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유리처럼 깨질 수 있습니다.
계주가 돈 떼먹고 도망가면 언니가 순식간에 그냥 웬수가 되는 거예요.
당원들도 동지였다가 저쪽 당으로 가면 순식간에 비난하고 비판합니다.
핏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딸이 시집가고 아들이 장가가고 얼마나 많이 핏줄 관계가 깨집니까?
상처와 미움을 서로 주고받아요.
이렇게 세상에는 하나인 것처럼은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가 아닌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겁니다.
그러나 삼위는 분명히 하나입니다.
삼위는 사랑과 평화라고 하는 접착제로서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삼위일체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하느님의 자식들이죠.
이해타산으로 모인 세속 공동체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돈, 정치적인 견해, 지방색, 학력이 달라도 우리 중심에는 누가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접착제가 있기에,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세상 공동체보다는 하나가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얘기입니다.
삼위 일체적인 성당이 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공동체죠
저는 사목을 하면서 삼위 일체적인 본당 공동체가 되도록 나름대로는 무척 노력하고 살았습니다.
삼위 일체적인 성당은 교우들 입에서
‘성당에 오면 참 편해.’ ‘성당에 있는 시간이 제일 행복해.’ ‘성당에만 오면 치유가 돼’ 합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증거하는 성당이죠.
사제와 교우들이 아름다운 성당을 만들어가는 겁니다.
피정 다닐 때 보니까 본당 이름이 삼위일체인 성당들이 전국에 꽤 여러 개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서 보면 삼위일체가 아닌 성당들도 많아요.
내용이 그래서 이름만 삼위일체 성당이 아니라 정말 삼위일체 성당이 돼야죠.
삼위일체적인 성지가 있어요.
삼위일체적인 성지가 되려면, 첫 번째 들을 거리 영성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볼거리, 쉼거리, 마지막으로 먹거리가 있어야 해요.
저는 한국의 큰 성지를 사목하면서 이 네 가지를 이으려고 애를 썼어요.
찾아오는 교우들에게 이 성지의 영성을 이유식으로 잘 씹어서,
그냥 관광 왔다 가는 그런 마음이 되지 않게끔
올 때는 관광하는 마음으로 왔다 하더라도 사제의 들을 거리 영성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신앙을 재점검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지 구석 구석마다 앉아서 힐링이 되는 아름다운 장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또 이렇게 들을 거리 볼거리 쉼거리는 잘 되어 있는데 먹거리가 엉성하면,
집에 갈 때는 강론 때 들은 은혜는 생각도 안 나고 ‘오늘 7천 원 내고 2천 원짜리 먹고 간다.’ 하면서
다시는 안 온다고 합니다.
이 네 가지가 갖춰져 있지 않으면 영성은 좋아도 성지 안 찾아갑니다.
삼위일체적인 가정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사랑과 지혜가 가득 찬 권위를 가지고 있고,
어머니는 편향되지 않고 이기적이지 않은 모성애를 갖고 있고,
아이들은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면서 건전한 인생관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가정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가정을 하나 되게 이어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삼위일체적인 미사성제가 있지요.
엄숙하면서도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미사가 그겁니다.
사제는 정성을 다하여 설교하고 하느님을 증거하고, 설교를 통해 은총이 내려오게 하고,
생애 마지막 미사를 드리듯이 경문 한 자 한 자 움직임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는 미사,
감격과 기쁨으로 성체를 영할 수 있는 미사가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는 미사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머리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우리 삶을 통해서 알려주시죠.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천당과 지옥, 연옥 이 세 가지를 다 체험하고 살아갑니다.
이 미사 중에 힘을 얻어서 삼위일체적인 일치와 기쁨과 평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해 사랑합니다.
♣2022년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6/12)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