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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히 한국인이다.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에 살고 있고, 한국인들과 어울린다. 법적으로도 국적이 한국이다. 내가 만약 호주로 이민을 간다면, 뿌리는 한국인이지만 호주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을 쓴 홍대선 선생도 한국인이다. 그가 문제의식을 갖고 한국인을 바라본다는 건, 역사적인 관점에서 한국인을 바라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철학을 전공했고 역사에 관심이 많지만, 글쟁이 작가다.
그는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은 한국인을 저주한다. 시민은 공무원을 공무원은 시민을 저주한다. 학생과 교사도 서로 증오하며, 남녀는 양측을 비난하고 진보와 보수는 상대편이 몰락해 사라지기를 바란다.”아무리 곱게 생각하려 해도 조금은 섬뜩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이 나도 한국인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1부】한반도에 사로잡히다
한국인의 뿌리는 단군으로부터 시작된다. 20세기 중반 대한민국이 수립되기 전부터 단군신화는 있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야기로 전해졌으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신화」는 일련 스님의 《삼국유사》에 기초한 것이다. 하늘의 지배자 환인의 서자(庶子)인 환웅이 신단수 아래에서 선택한 동물이 호랑이와 여우라는 이야기도 있고, 부계인 단군이 아니라, 모계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잡식인 곰과 철저히 육식만 하는 호랑이를 경쟁시킨다는 것은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환웅은 외부세력이고, 곰과 호랑이는 토착 세력이었다는 그럴듯하게 풀어내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것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한반도 남쪽에는 한韓인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세운 나라가 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이다. 이는 고구려·신라·백제와 다른 개념이다. 고구려는 부여의 후예로 예맥인이 지배층을 구성한 나라이고, 백제와 신라 그리고 신라에 흡수된 가야는 예맥인과 한인이 혼합된 나라다. 삼국시대 지배층들은 삼국을 삼한이라고 했다.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를 한반도의 토착민인 한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것은 정복민이 피정복민을 철저히 불평등한 관계로 나누는 세계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반도의 고대인들은 천하통일을 ‘삼한통일’이라고 했다. 통일신라는 그것을 ‘삼한일통’이라고 했고, 고려는 삼한을 재통일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했다. 삼한은 우리가 속한 세계이면서 천하였다. 세(三)한이 통일되면서, 큰 한이 되고. 큰 한이 대한, 대한제국 - 대한민국이 되었다.
한국인은 혼혈이되 배타적 혼혈이라는 이중성을 가진다. 혼혈이 완료된 시점부터는 더 이상 혼혈을 거부했다. 한국인은 성격이 급하고 놀랍도록 이기적이기는 하나, 동시에 이타적이다. 어찌 보면 천박함과 숭고함을 지닌 민족성인데, 이것의 비밀을 푸는 일은 매우 복잡할지도 모른다. 그런 기질은 자연환경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된 것이다. 한국의 뚜렷한 사계절은 눈으로 보이엔 아름답지만, 몸으로 견디기엔 고통스럽다. 물론 한국보다 더운 곳, 추운 곳도 많다. 하지만 1년이란 시간을 한정하면 한국처럼 극단적인 사계절 차이가 분명한 곳은 없다. 한국인은 극단적 차이에 혹은 절대적인 온도에 고통받는 것이 아니다. 대만이나 중국은 우리보다 춥고, 덥다. 일본만 해도 그렇다. 그들도 뚜렷한 사계절이 있지만, 1년이란 시간 안에 더위와 추위가 함께 있다. 한반도는 전체가 비슷한 조건에 노출되어 있고, 여름에 덥고 겨울엔 춥다. 극단적인 변화에 매년 반드시, 정기적으로 노출되고 있다.
이런 환경적 조건으로 한반도는 단연코 전 세계에서 쌀농사를 짓기에 가장 어려운 지역이다. 한국인에게 쌀은 가장 중요하지만, 동시에 가장 부족한 무엇이었다. 가장 어려운 곳에서 성공했으니, 다른 지역에서는 더 빨리 퍼질 수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일부 학자들은 한반도가 벼농사의 원산지라고 주장한다. 한국인의 인간성은 마늘과 쑥에 의해 탄생했다. 한국인의 인간성은 본질적으로 숭고함과는 거리가 멀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옥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한국인의 인간성이다. 관념에 존재하는 철학이 아니라, 현실적인 과제가 더 중요했다. 조금이라도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인간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속물적이고 세속적인데 놀랍게도 한국인의 숭고함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한국인은 중국인, 일본인보다 훨씬 더 보편적 가치와 원리원칙을 중요히 여긴다. 결과적이지만 그렇다. ‘내가 산다’는 ‘함께 산다’로 ‘함께 산다’는 ‘남을 살린다’로 진화했다.
쌀은 반찬이 있어야 먹을 수 있다. 반찬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밥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신김치는 입에 침이 고이게 하고 밥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게 돕는다. 국물의 역할도 같다. 고려 시대까지 김치는 나박김치, 동김치 같은 것으로 김치가 국 역할까지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그렇다. 자체의 수분이든, 침이 고이게 하든, 입안에 수분을 공급해서 밥 먹는 행위를 돕는다. 한국인의 식사는 밥과 국, 반찬으로 구성된다. 한식이 특별해 보인다면 그것은 외국인의 눈으로 볼 때이고, 한국인에게 한식은 지극히 보편적이고 흔한 음식이다. 원래 주식은 맛이 없다. 그래서 물리지 않고 오래도록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햄버거와 카스테라 등 외국 영양식이 들어왔지만, 한식만큼은 옛날 형태 그대로 남아 있다. 한식은 원시적인 틀을 유지한 채로 발달해 왔다. 한식은 지나치게 보편적이고, 엄격하다.
서자로 태어나는 것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듯 한국인은 쌀밥을 좋아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한반도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쌀을 좋아하도록 개조되었다. 한자인 논 답(沓)은 동아시아에서 한국에만 존재하고, 그것을 따로 만들어 썼다. 쌀밥이 밥의 기준이듯, 노동의 기준은 벼농사다. 벼농사는 반찬거리를 채집하는 일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노동은 인간성을 만든다. 한국인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쌀에 집착한 민족인 만큼 쌀농사 기술을 익히고 연마했다. 스탈린은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을 쌀농사의 북방한계선인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고려인들은 거기서 쌀농사를 짓고, 김치 담글 채소를 찾다가 기어이 당근으로 김치 담그는 법을 개발했다. 이 김치를 ‘마르코프차’라고 하는데, 이것이 중앙아시안들을 중독시켰다. 한국을 대표하는 김치는 배추김치지만, 가장 넓은 지역에서 사랑받는 김치가 마르코프차다. 에도시대 정치가이자 유학자였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1719년 20권에 달하는 일본어 사전 〈동아東雅〉를 집필하면서, 여기에 ‘고려장(高麗醬)’에 대해 기록했다.
“고려의 장醬인 말장이 일본에 건너와서 그 나라 방언 그대로 미소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글자로는 고려장이라고 표기하였다.”
한자 발음 표기인 말장, 며조, 미조, 미소는 모두 매주가 그 어원이다. 말장도 그렇지만, 콩나물은 어떤가? 비타민C와 무기질 공급원인 콩나물은 누가 처음에 재배해 먹기 시작했을까? 기원은 모를지라도 그것을 기록에 남긴 것은 한국인이 세계 최초다. 938년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이 콩을 냇물에 담가 콩나물로 만들어 굶주린 병사들에게 제공했다는 기록이다. 콩은 쌀농사의 파트너인 동시에 음식재료의 필수품이었다.
한국인들의 먹고살기는 언제나 비극이었다. 비극이라니? 노력하고 절약해 부유해지면 비극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하고, 절약해도 겨우 살아남는 것에 그칠 뿐이라면 비극이다. 겨울은 춥고 길고 척박하다. 겨울이 지나면 제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삶에 집착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인생에 만족한다는 한국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행복하게 산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죽지 못해 산다’고 말하는 한국인이 100배는 더 많다. 조선 시대 선조가 남긴 푸념이 있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중국)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 왜국 역시 우리처럼 가난하지는 않다.”우리는 이런 선조로부터 걱정하는 습관을 물려받았다.
인간의 목표는 행복이지 지능이 아니다. 한국인의 높은 지능?과 불행은 자웅동체와 같다. 한몸이다. 한반도의 환경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습관을 강요한다. 지금 배불리 먹어도, 다음 봄에는 굶주릴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겨울은 춥고 다음 농사는 또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안다. 한반도의 사계절은 너무나 변화무쌍해 고통스럽게 한다. 가뭄, 태풍, 장마, 이상저온, 이상고온 등등. 호환(虎患)처럼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한국인의 지능이 세계 1위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 과학자가 밝힌 것이다.
세계의 중요 민족 중에 한국인은 일본인과 함께 행복감을 느끼는 호르몬, 즉 세로토닌 분비량이 가장 적다고 한다. 둘만이 아니다. 애초에 동북아시아인들은 행복지수가 낮다. 1980년대 가파른 경제성장과 3저 호황으로 세계여행 붐이 일어났었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하고 돌아온 한국인이 한 말은 “저렇게 낙천적이니까 게으르고, 게으르니까 나라가 발전을 못한다.”였다. 하지만 잘 사는 유럽을 다녀오고는 “나라가 잘 살아서 그런가. 거기 사람들은 참 여유롭고 잘 웃더라.”였다.
한국인이 음주가무를 좋아하고 무속을 믿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오죽하면 지금의 정부도 무속인의 말을 듣고, 청와대를 버리고 용산으로 왔다고 하는가. 개인적으로 청와대가 대통령이 집무를 보기에 더 좋다고 생각한다. 멀쩡하고 전통적인 관사를 두고 굳이 옮겼어야 했는가 싶기도 하다. 다음 대통령이 다시 청와대로 돌아간다는 소리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기우일까. 한국에는 진정한 의미의 목회자, 사제, 승려도 많지만, 그들이 대중적 차원에서 무속의 영역을 벗어난 적은 없다. 한국 최대규모라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 설교를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그가 우리 선배라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는 현명히 투자한다면 부자가 된다. 부유하고 장수한다. 언젠가 죽을 것이지만,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삼박자 구원론’을 내세우고, 신체장애인을 일으키는 기적을 여러 번 연출했다. 기획된 쇼였는지, 성령의 힘인지, 강력한 플라시보(가짜를 진짜로 믿게 하는)효과 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현실에서 눈에 보이는 증명, 영험이면 충분했다.
북한의 김정은과 측근들은 어떤가? 그들은 무속과 종교의 영역을 미신으로 전락시켰다. 대신에 큰무당이 왕을 겸하는 제정일치 사회로 회귀했다. 그들의 큰무당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는 영험을 증명하려고 한다. 김일성은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나뭇잎을 타고 강을 건너고, 김정일은 축지법을 써 손으로 번개를 다루었다고 한다. 스위스 국제학교에서 농구를 즐겼던 김정은은 아버지 할아버지 이야기가 창피했던지, 세 살 때 피아노를 치고, 총을 쐈으며, 여섯 살 때 뛰어난 승마 실력을 과시했다고 한다. 다방면에서 천재라는 점을 과시하고 있지만, 그도 큰무당 임에는 차이가 없다. 주체사상이 하나의 종교라는 점에서 북한도 한반도 종교가 무속의 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한반도 역사에는 신기한 것이 있다. ‘한국은 어째서 중국에 흡수되지 않았는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구한말 러·일전쟁 전리품이 되어 제대로 저항도 못 해보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일은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오랫동안 한국인의 자존심을 긁을 것이다. 끝나지 않은 내전 한국전쟁은 미·소의 냉전이자 대리전으로 남북한 모두 이들 ‘큰형님’없이는 전쟁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한민족이 전쟁을 못 하지는 않았다. 수당전쟁, 고려거란전쟁을 보면 알 수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민족 중에 전쟁 민족이 아닌 집단이 없다. 패배자는 이미 사라졌다. 혈통과 언어를 잃어 정체성을 말살당한 것이다. 혈통과 언어 중 적어도 하나를 잃으면 민족은 사라진다. 진시황은 ‘중국’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한족의 뿌리는 화하(華夏) 문명이다. 그것이 한족의 원류다. 최초로 중국을 만든 진나라가 금방 망하고, 한나라가 재통일하면서 화하족은 한족으로 바뀌었다. 한족은 혈통이 아니라 문화적 개념이다. 한족은 주변을 정복하기도 하고, 흉노 등에게 정복당하기도 했다.
중국의 역사는 분열하면 통합하고, 통일하면 팽창하고, 팽창에 실패하면 분열했다. 진나라는 베트남을, 한나라는 고조선을 쳤다. 이때도 우리는 멸망할 뻔했다. 한사군 때 말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에 치르진 나·당 전쟁에서도 자칫 패했더라면 사라졌을지 모른다. 현재 티베트인과 위구르인이 받는 고통을 보라! 중국이 한국 문화에 드라이브를 거는 노골적인 욕망은 중국의 팽창이라는 오래된 역사의 연속이다. 그것은 중국 공산당 집단의 특징이 아니다. 대만을 흡수해 천하통일을 완수하면 그들은 태평성대를 구가한다는 명분으로 한국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그들에게는 당연한 수순이다.
한국인은 중국인에게 개인적으로는 별다른 편견이 없을지라도 그들의 머릿수에는 진저리를 치는 습관을 본능적으로 갖고 있다. 한반도 역사는 처절한 생존의 역사임과 동시에 언제나 중국에 멸망 당할 가능성을 걱정해온 역사다. 이 스트레스는 진나라와 한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후부터 2천 년 이상 지속되었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은 북한이 바다에 미사일을 쏘아대고, 중국이 한국을 대놓고 협박하고, 러시아와 일본 군함이 한국의 영해를 침범하는데도, 태연한 얼굴로, 금요일 밤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놀란다. 이것은 한국인에게 유독 발달한 본능적인 감각 때문이다. 국가적 위험에 하나하나 반응하면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 제 명대로 못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독자적인 민족과 언어와 문화 정체성을 지키는 데 지금까지 성공한 것은 세계사적으로 매우 놀랍고 특이한 사건이다. 중국의 통일 왕조의 인구는 언제나 한반도 인구의 10배 이상을 유지해왔다. 현재는 약 28배다. 생산력의 차이도 그만큼 난다.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땅이어서 전쟁에 필요한 인구뿐만 아니라 비용도 넘친다. 물리력의 정직한 충돌로는 중국의 물량을 당해낼 수 없다. 그런데도 버텨냈다. 고려 초 몽골제국에 의해서 멸망할 뻔했을 때도 30년을 버텨낸 대가로, 유리한 협상을 끌어내 나라를 지켜냈다. 일본은 한 번은 실패했고(임진왜란), 한 번은 성공했다.(한일합방) 일본은 중국이 아니지만, 그들도 또 다른 중국이다.
중국의 송나라는 44년간을 버티다 완전히 멸망해 원나라가 되었지만, 고려는 39년간 항거한 끝에 가까스로 속국이면서, 어쩌면 독립적인, 부마국으로 남았다. 당시 송나라 인구가 1억 명이었지만, 고려는 1천 명에 불과했다. 전쟁에서 기마 병사 10만은 100만 보병과 맞먹는다. 고구려가 어떻게 수나라 백만대군을 물리쳤을까? 라는 질문과 같다. 고려는 어떻게 39년간 저항했는가? 시간이 흘러 일본은 또 다른 중국이 되었다. 일본은 한국보다 크기는 1.7배, 쌀 경작지도 한반도보다 넓고 풍요롭다. 기후도 유리하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쌀농사가 국력이었다. 일본은 문명적으로 후발주자였고, 고대는 물론 중세까지도 어떤 결과도 만들지 못했다. 신라를 침공했을 때는 고구려 원정군에게 패했고, 백제-왜 연합군은 나당연합군에게 패했다. 그러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인명을 잃었음에도 인구와 쌀 생산에서 조선을 압도했다. 임진왜란에서 비록 실패하고 돌아갔으나 조선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19세기 일본은 중국, 인도, 프랑스에 이은 인구 대국이 되고, 한반도를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현재 일본은 세계 11위 인구에다 경제는 2위를 내줬지만 3위다. 폭력적인 투쟁 차원에서 일본은 또 다른 중국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는 외적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방법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첫째가 바로 산성이다. 한국인은 생존의 민족, 욕설의 민족, 흥의 민족 이면서 산성의 민족이다.
웬만해서는 적을 뒤에 남겨두고 지나칠 수 없는 요지에는 산성이 있다. 산성을 쌓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꼭 필요한 정도만의 산을 깎고 멈춘다. 더 이상 노동할 인력과 식량이 없었기도 했다. 산을 깎으면 나온 화강암으로 산성이 완성된다. 거창의 황석산성도 그렇지만, 가까운 금정산성만 해도 이 산꼭대기에 이런 장대한 산성을 쌓다니 하고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산성은 지형에 의존하고 양보해야 하기에 모든 산성의 모양이 각기 다르다. 하나의 산성도 동서남북 구조가 다르다. 비좁은 산성에도 다른 형태의 킬존(Kill zone, 내부로 진입하는 적이 밀집하도록 해 몰살하는 공간)이 있다. 이것은 외적에게 불규칙함에서 오는 예측 불가능성을 강요한다. 산성에는 현문이 있고, 치가 있다. 말을 타고 바로 들어올 수 없게 만든것이다고 그것을 막는 것이다. 검문을 받은 뒤에야 들어 올 수 있게 한다.
한반도의 성에 비해 서양의 캐슬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다. 일종의 탑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양식 봉건주의 경험을 가진 일본 성은 전통구조와 기능이 서양과 같다. 그 성은 성주의 일터고, 그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인 동시에 외적의 침략과 피지배층의 반란으로부터 성주를 보호한다. 한반도 성은 중국과도 다르다. 주민을 보호한다는 것에서 읍성이나 평지성은 중국과 같지만, 외적이 쳐들어올 때는 성밖에 사는 백성들까지 수용하고 보호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사를 통털어 평지성에서 승리한 사례는 거의 없다. 승리는 주로 산성에서 거둔다. 한국 성의 본질은 산성이다. 산성은 어디에나 있었고, 언제나 있었다.
612년 고구려 멸망 위기 때는 평양성이 있었다. 수나라 장군 내호아는 5만 명의 수군을 이끌고, 우문중은 30만의 육군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향했다. 둘이 만나면 고구려의 미래는 없게 생겼다. 고구려는 먼저 내호아 군을 격파하기 위해 거짓으로 패한 후 평양성 안으로 적을 유인했다. 약탈에 정신이 팔리도록 했다. 수군은 환자들인 병사를 빼고도 4만이었다. 고구려는 영양왕의 아우이자 훗날 영류왕의 아우 고건무가 이끄는 5백 명의 결사대로 4만의 적을 섬멸하다시피 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중국 사료에는 고건무의 “용맹과 무공이 절륜하다.”고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5백 대 4만은 중국 무협 소설과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그것은 평양성 덕분이었다. 평양성 구조에 섬멸 당한 것이다. 이를 본 우문중은 평양성을 눈앞에 두고 되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대를 덮쳤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살수대첩’이다. 30만 5천 명 중에서 2,700명만이 살아 돌아갔다고 그들은 기록했다. 고구려 국토 자체가 평양성 역할을 한 것이다.
내호아는 614년 이번에는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재진격을 고집했다. 하지만 이때 고구려는 전투 대신에 외교력을 발휘해 수나라 인사들을 설득했다. 경험자와 다시 싸우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이다. 평양성의 구조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이런 과정에 수나라는 내분으로 양제의 신하이던 이연에게 나라를 내주고 말았다. 한국인의 성격 절반은 쌀농사를 짓는 논에서, 나머지 절반은 산성에서, 그러니까 산성은 전쟁과 평화의 시소게임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양일까, 질일까?
임진왜란 전 1380년 한반도 역사상 그때까지 가장 최대 규모의 왜구가 연합함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이 왜구와의 싸움을 「황산대첩」으로 우리는 기억한다. 전투에서 이성계는 1만여 명에 이르는 왜구를 불과 70여 명만 살아 돌아가게 하고 모두 죽였다. 고려의 영웅이 된 이성계는 이로부터 12년 뒤 새 왕조를 개창했다. 이보다 전에 벌어진 「진포해전」에서는 고려 해군이 100여 척의 배로 500여 척의 왜선을 화포로 불태웠다. 이때 화포 개발의 총책임자 최무선(崔茂宣)이 부사령관 자격으로 참전했으며, 이 두 전투에도 불구하고 왜구가 소멸할 운명은 아니었던지 임진왜란 때 다시 쳐들어왔다. 왜구가 줄어든 것은 일본이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하면서였다.
조선의 활은 유럽의 기술로 만든 일본 조총에 비해 결코 뒤지는 무기는 아니었다. 둘은 장단점이 있는 무기다. 그러나 조선은 화력에 집착했다. 조선이 집착한 화포는 성능과 수준에서 일본을 압도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병사는 조총의 존재와 소리에 놀라 패전을 거듭했다는 말은 후세에 만들어진 환타지다. 조선의 화포 소리가 더 컸다. 조총은 활보다 우수하고 신식 무기인 것은 맞다. 조선이 조총을 적극적으로 개발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청나라는 1654년과 1658년에 터진 러시아와의 국경분쟁, 나선정벌(羅禪征伐)에서 조선에 조총부대 파병을 요청했다. 병자호란 때도 조선군은 전투력이 못해서 진 것이 아니다. 식량의 모자라 청나라에 항복했다. 소설과 영화로 나온 「남한산성」에는 조선군 2만 5천을 육성하고 있었지만,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산성을 포위한 청군에 항복했다.
13척의 배로 133척(지원 선단까지 합치면 300척)의 배를 제압한 전설 같은 이야기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장면이다. 명랑해전이라는 이 전투는 이순신이 산성 방어 전략과 유인술과 대포 사격이라는 전술로 이긴 것이다. 이순신은 일부러 적을 유인했고 역류지역을 선택했다. 산성 방어는 적이 몰려들어야 전과를 얻을 수 있다. 13척으로 대드는 조선군을 빨리 없애고 싶었던 욕망에 쉽게 달려든 왜군이었지만, 명랑은 달려드는 순간 거센 물줄기를 타게 되고 결과적으로 떠밀려가고 마는 곳이다. 명랑해전의 절반은 이순신과 그가 탄 대장선(座船)혼자서 치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머지 배는 적의 압도적인 규모에 물러나 구경했다. 아니 도망할 궁리를 했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된 전투가 이순신의 뜻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이순신은 중군을 맡은 김응함을 끌어내 목을 베고, 나머지 장수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게 했다. 너무 급박해 즉결처분을 할 시간도 없어지자, 자신이 지휘하는 단 한 척의 대장선으로 산성 방어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싸워야 하는지 분명하게 전달했다.
‘사적진력!(射賊盡力-힘이 다할 때까지 쏘고 또 쏘아라)
지자총동, 현자총통, 천자총통으로 한 번에 300발을 발사하는 산탄인 조란환(鳥卵丸)은 마침내 대량 살상에 성공한다. 대장선에 가까이 붙으면 낫을 걸고, 성벽을 기어오르듯이 뛰어올라 화살과 석환, 승자총통(휴대용 화포)으로 맞섰다. 오전에 이미 수십 척 적선을 격파했다. 이순신은 바다에서 안시성의 양만춘과 같은 전투를 치러낸 것이다. 오후가 시작될 때 이순신은 비로소 아군의 지휘관들을 소집했다. 거제 현령 안위가 혼구멍이 났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 놈이 군법에 죽고 싶냐?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당장이라도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기세가 급하니 공을 세울 기회를 주마.”두 번째가 김응함이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말을 듣고도 적을 향해 뛰어들지 않는 병사는 없을 것이다. 그는 육지에서 100만 대군을 상대하던 방식대로 해전에서도 그대로 했다. 이순신은 해군장수가 아니라 육군장수였다.
한국인의 선조들이 한반도에 사로잡힌 탓에 얻은 특질은 천박한 숭고함이었다. ‘한국인은 숭고한 속물이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숭고한 속물은 평시와 전시 생존의 지옥과 멸망의 그림자 사이에서 태어난 별종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한국인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는 민족적 얼개에 얽힌 틀이지, 민족성 자체가 아니다. 민족성을 형성하려면 먼저 하나의 민족이 탄생해야 한다.
【2부】민족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