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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는 이 말은 이상적이고 야망적이기는 할지 몰라도 과학적이지는 않다. 세상은 원자와 분자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세상은 픽션*과 논픽션* 투성이다.’는 말은 맞을 것이다. 그중에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렸는지,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인간은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뒤죽박죽 섞여서 결말이 있게 일관된 이야기를 만든다. 아담과 이브에서부터 호메로스, 할리우드까지 세상은 온통 이야기투성이다. 그래서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고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이야기 속에서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한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적을 만들기도 하고 전쟁을 정당화하는 보편적 내러티브*를 만들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는 두 명이다. 둘은 시대별로 인간의 이야기 역사를 추적하고, 그것이 오늘날 어떻게 작동하는지 명확하고 분명하게 보여주려고 한다. 저자 ‘자마라 엘 무아실’은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현대문학과와 커뮤니케이션학과를 졸업했고 또 다른 한 명의 저자 ‘프리데만 카릭’은 인문·사회·철학과 경영학을 전공하고 방송국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간단히 소개하는 이유는 독일어에 문외한인 내가 그들을 잘 모르고 소개하기도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책은 2022년 독일에서 출간되었고 한국에서는 2023년 이화여대 독문어과를 나온 김현정 선생이 번역하고 「원더박스」라는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1】좋은 이야기만큼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없다. 이야기의 장면들은 두려움을 불러주기도 하고, 서로 선동하기도 하며 상대를 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폭력과 발견으로 가득 찬 인류의 역사를 나누어진 역사를 통합하는 기구가 이야기다. ‘어둠과 밝음’이 두 가지는 그 안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다. 이야기는 영혼의 호흡과도 같다. 우리는 이야기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가장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인 《성경》은 인간의 우월성과 이용 가능한 내러티브가 가장 오래되고, 위대한 이야기책 중의 하나다.
우리는 세상이 부당하고 서서히 몰락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적어도 우리의 서사 프로그램을 파악하고 세상을 결속시킬 정신적 소재를 바꿀 때 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보려고 노력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런 노력은 사람들에게 정말로 유토피아가 필요한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도덕적으로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뒤에 숨겨진 지렛대를 이해하고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근원적 서사 문화비평을 할 수 있는 것이 이야기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지구상의 다른 모든 존재와 구분된다. 인간의 서사적 진화로 말미암아 우리는 역사의 가장 큰 도전, 즉 우리 삶의 토대가 점진적으로 파괴되는 현상과 마주하고 있다. 그것은 나쁜 소식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든 영웅들의 여정처럼 문제의 해결책도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 영웅들처럼 시련을 이겨내고, 새롭고 이상적이며 더 나은 세상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영웅들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영웅은 스스로 혼자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웅에게는 멘토가 있어야 한다. ‘멘토’는 오디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코스를 돌봐주었던 친구의 이름이다. 이후부터 멘토는 원형적으로, 심리적으로 더 높은 자아, 더 고귀한 우리 자신을 의미했다. 멘토는 과거에는 영웅이었지만 이제 자신의 모험을 통해 얻은 변화의 경험을 다른 영웅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들은 말 그대로 부모 혹은 삼촌이 아니고 일종의 모성애적이거나 부성애적인 성향을 보인다. 멘토는 덤블도어가 헤리포트에게 마술을 가르치는 것처럼 지식을 전수한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며 과거에 경험했던 접근하기 어려운 지식을 불러내는 역할도 한다. 그러나 영웅에게는 멘토인 동시에 적수가 되기도 한다.
최근에 자주 보는 캐스팅 쇼(오디션 같은)나 매우 진부한 광고가 여전히 하나의 마스트 플롯에 따라 작동한다면 영웅은 기본적으로 어느 때보다 더 편재(偏在-치우침)되어 있다. 이와 함께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들도 함께 존재한다. 다행이지만 우리는 전통적으로 영웅을 탄생시키는 전쟁을 더 이상 겪지는 않는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가자전쟁에도 고전적 영웅은 없다.) 그러나 자유화된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에 대한 해석 권한을 둘러싼 것들이 전쟁과 매우 닮았다. 전투에서 군사적 용기가 오늘날에는 시민의 용기, 비타협적 태도가 공감된 것이다. 오늘날 영웅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갈망하는 모두를 이루어낸다. 그들은 더 나은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 사회가 포스트 영웅 사회인데도, 우리는 매일 새로운 영웅을 소환한다. 만화와 컴퓨터에서, 영화관에서, 경쟁 스포츠 또한 지속적 영웅적 인물을 만들어 낸다. 9/11 테러로 목숨을 잃은 소방관도, 기후 활동가도, 내부 고발자도, 정치적 자유 투사도 마찬가지로 영웅으로 규정된다.
포스트 영웅시대에는 영웅 지향의 종말이 아니라 문제적이고 반성적인 발전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영웅의 숭배와 신격화를 일반화시킴으로써 영웅이 ‘망가졌다.’고 생각한다. 대신 궁극적으로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하루 만라도. 우리는 오래전부터 이야기가 심심풀이나 즐거움, 또는 도덕과 교육의 매개체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야기의 개념은 저널리즘의 유행 악세사리며, 광고주를 비롯한 스토리텔러 관점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새롭지도 않다. 인간은 몇 가지 중요한 이유로 서사를 만든다. 계속해서 조망하면서 가장 중요한 스토리 메카니즘을 이해하고 싶어 하고, 절반의 의식적 과정으로 공예나 예술품, 스포츠를 만들고 싶어 하기도 한다. 이런 분석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갈까?
우리가 아는 우리는 자신의 유한함을 근본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유일한 생명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자주 잊고 산다.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죽음의 두려움을 희망으로 맞서기 위해서다. 잊히지 않기를 바라고 과거에서 현재로 스토리를 전달하면서 우리 자신과 우리 조상과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해서 지식을 보전한다. 동굴벽화와 함께 구술의 정보를 전달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던 시대에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것이었다. 그 이야기는 자신의 힘을 모아 간직하고 있으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모든 존재에게는 언제나 ‘자기보존’이라는 강력한 욕구가 존재한다. 인간 또한 죽지 않고 가능한 한 오래 살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유한함을 알아야 죽음을 가급적 성공적으로 막기 위한 방법을 생각할 수가 있다. 인간은 가능한 한 좋은 삶, 길고 행복한 삶을 만들기 위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도전과제를 극복할 때마다 유한성을 바탕으로 어떤 결정을 내린다. 이로써 우리는 성공적인 노력을 성찰하며 배우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지금 우리는 비를 내리게 하는 ‘마법’이 잘못된 인과 관계에 근거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인과 관계에 대해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동체의 안전한 곳에 무엇을 심으면 시간이 흘러 먹을 수 있는 것이 자라나고, 위험한 숲에는 갈 필요가 없다거나 음식과 털옷을 주는 동물을 기르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 영웅적 여정을 통해서 내적, 외적 변화를 통해서 말이다. 인간은 절제를 모르기 때문에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이유도, 의미도 없다는 인식 뒤에 숨은 ‘백색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 모든 사람을 인과 관계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하면, 놀라울 정도로 쉽게 만족을 느낄 수 있다. 설명이나 이야기의 타당성은 우리가 왜 그것을 믿는가에 대한 하나의 기준일 뿐이다.
이야기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모험할 수 있는 놀이터다. 그것이 또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이유다. 이야기는 죽임을 당하거나 부족部族을 영원히 잊지 않고서도 역할과 해결책을 시도하고 사회적으로 협의할 수가 있게 만든다. 우리 조상들은 재미있으면서도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죽지 않고서도 다른 사람의 실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인간의 진화를 강력하게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수직적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특정 유전자를 전달함으로써 진화해 왔다. 문명이란 성공적인 생존전략과 이야기를 여러 세대에 걸쳐 재생산한다. 좋은 이야기일수록 계속해서 이야기되고 중요한 이야기일수록 주의 깊게 듣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선사시대로부터 소셜 콘텐츠였으며, 감정적 소모가 클수록 더 많이 공유되고 리포스트(Repost)*가 되었다.
이야기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실질적 지침의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이야기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고, 해결을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모든 이야기는 우리에게 배움을 가르쳐준다. 구체적이고 명백한 적응과 습관화된 문제해결 능력 덕분에 자신의 현실을, 나아가 끊임없는 적응을 통해 개선한 자신의 삶을 직접 구성하는 존재로 발전했다. 이 모든 것은 왜 스토리텔링이 불, 바퀴, 무기보다 훨씬 앞서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불리지만, 아주 가끔씩만 슬기로울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차라리 호모 나렌스, 즉 ‘이야기꾼’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 모른다. 우리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비로소 인간이 된 유인원이다.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의 원제목이 「이야기하는 원승이」다. 그러면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에 동의했을까? 원숭이는 언제 이야기를 시작했을까? 우리 언어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단정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로 몸이 휴식하고 있어도 뇌는 에너지의 1/5을 소비한다. 호모 나렌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언어 장치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생명체와 구분된다.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말하기를 사용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인간의 언어 특성 중 한 가지는 문법, 즉 재구성한다는 데 있다. 여러 개 난해한 문장에서 참조를 생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간은 가졌다. 동물도 언어로 소통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위험해! 조심해!’라고 할 뿐이다. 우리가 배우는 문법은 이야기를 읽거나 들을 때 정신 속에서 만드는 세계의 시뮬레이션을 구조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구현된 시뮬레이션은 어느 부분에 집중해야 하는지, 얼마나 세부적으로 정확하게 또는 어떤 관점에서 시뮬레이션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조정한다.
인간의 이야기는 ‘있는 이야기하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있을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기’로 바뀌었다. 언제부턴가 동굴 안에서, 밖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곳에서 있지도 않았던 검치호랑이 이야기를 했는데, 이는 언젠가 정말로 검치호랑이와 마주쳤을 때를 대비해 정신적으로 무장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이야기의 허구라는 것이 시작되었을까? 이야기는 우리가 서로에게 경고하거나 위로하는 방식, 우리가 스스로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 모든 인간이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트로이 목마」이야기는 “수년 동안 지독한 포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영웅답게 마침내 전쟁을 끝낼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전쟁의 여신 아테나를 위한 재물로 커다란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 성벽 앞에 세운다. 그리스군이 철수하자 트로이 병사들은 이 목마를 성문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 속에 숨어 있던 오디세우스와 그리스 병사들은 밤중에 성문을 열어 자신의 군대가 들어오게 한다. 그 결과 지금까지 전해지는 살육 가운데 가장 끔찍한 살육이 일어났다.”하지만 목마에 살육 이야기는 파묻혔다. 우리 뇌는 트로이고 이야기에 숨겨진 정보는 그리스 병사다. 목마가 더 인상적이고 아름다울수록 우리는 목마를 도시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살육은 잊었다.
이야기는 우리가 노력하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도전에 맞설 수 있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안전하게 보여주는 일종의 ‘수정구슬’이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수퍼맨과 같은 영웅과 동일화되고 당사자와 우상 사이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정서적으로 고향이자 인적(人的) 동군연합(同君聯合)의 동경 장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영웅과 동일화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야기는 단지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일부가 된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이 된다. 이것은 축구경기를 볼 때도 비슷하다. 한 팀을 택하지 않으면 패배를 걱정하거나 승리를 응원할 수 있다. 그러나 한 팀과 동일화하는 순간부터는 우리 팀이 패배하면 우리가 패배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광스럽게 투영하는 영웅이 승리하면 우리가 승리하는 것과 같다.
이야기하는 원숭이는 가끔 자신도 모르게 남을 속이는 원숭이가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우연적인 사건에서 인과 관계로 얽힌 이야기를 스스로 엮어낼 정도로 우리가 너무 쉽게 패턴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아앨랜드의 철학자 ‘머독’은 이런 시도를 ‘일관성 있는 존재의 어우러짐’이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를 특정 짖는 모든 측면에 정체성을 쏟아 넣어서 어떤 캐릭터를 얻으려고 한다. 주인공이 되거나, 심지어 영웅이 되려고 한다. 그런데 영웅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역사가 지나면서 여러 번 바뀌었다.
인간은 고도로 사회적 존재다. 인간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자신과 자신의 정체성이 속한 집단이나 사회, 문화와 가장 기능적인 관계로 설정하려는 수단이다. 이타적-집단주의적 목표는 언제나 이기적-개인주의적 목표와 얽혀있다. 이 두 가지 욕구는 수용되기 위해 - 다른 계층 구조에서 상승하기 위해 - 교대로 나타난다. 어울리면 남보다 앞서 나가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세상을 통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립이었다. 개인의 자립이 성공의 열쇠였기 때문에 전능한 힘을 가진 개인이 문화적 이상이 되었다.”(철학자 윌 스토)
아테네인들은 세계 최초로 시민들이 자신에 대해 바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완성되었을 때는 가장 고귀한 피조물이지만, 법과 정의가 없으면 최악의 피조물이다.”라고 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민주주의라는 국가형태였다. 이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집단의 시작점이었다. 초기 개인주의 사상은 매우 강력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힘을 느끼고 있으며 이런 이념의 옹호사상가들은 아직도 인용하고 있다. 그런 아테네인들의 서사적 우월성을 기원후 수 세기 동안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정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Ashes to Ashes, Dust to Dust)’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으며 오직 믿음과 순종의 삶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나는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 삶을 결코 이길 수 없다. 나의 육체와 생각, 모든 감정이 근원적으로 불결하며 사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실수를 덜 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완벽한 존재는 ‘신’이다. 신이 창조한 인간은 이상한 뱀과 사과 이야기 이후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 예수 이후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테파노는 35년 예루살렘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 이는 잔인한 기독교 박해의 서막이었다. 로마 제국은 신생 종교가 혁명적인 잠재성과 열성적인 선교 활동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자 위협적인 전술로 이를 근절하려고 했다.
그들의 처형은 가혹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 대해 야생동물의 가죽을 입고 개에게 물려서 뜯겨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기독교인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어둠이 찾아오면 그들의 몸에 불을 붙이고 횃불로 사용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승인했다. 왜일까?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이교와 유대교에 비해 엄격한 자기부정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후에 십자군 전쟁 때 그들이 먼저 죽임을 당하기 전에 고국에서 가능한 많은 이교도를 공격하고 죽임으로써 순교자가 될 수 있었던 것과 맥락이 닿는다. 종교 개혁이 시작된 16세기는 개신교들이 가톨릭교도들에 의해 화형당했고, 어느 쪽을 믿느냐에 따라 순교자로서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믿었다. 기독교 기원은 노예 신분의 사람들에게 완벽한 스토리였다. 이승에서 희생하면 내세에 보상받는다는 스토리는 기발한 착상이다. 크나큰 고통 속에서도 순종하는 것, 바로 그것이 함께 어울리고 앞서 나갈 수 있는 핵심 능력이었다.
고대 그리스와 비슷한 시기에 세계 반대편의 한 학자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중국의 철학자 공자는 ‘우월한 인간은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덕목을 드러내지 않는’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은 우호적이고 조화를 증진하고, 균형과 조화의 상태가 완벽히 지속되도록 한다고 본 것이다. 이런 시각은 7천㎞ 떨어진 아테네에서 보였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그리스인에게 통제 수단이 개인이었다면 중국인에게는 집단이었다. 아시아에서는 희생하는 사람이 영웅이 된다. 희생하는 사람은 가족과 공동체, 국가가 보살핀다. 고대 중국은 2천 년 동안 자서전은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자아 개념이 부각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들은 자기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관찰자로서 자신의 목소리도 견해도 없이 삶의 이야기를 전했다. 동양의 허구물은 원인과 결과의 직선적 패턴을 따르지 않았다.
집단학살의 경우 미국언론들은 살인자의 성격적 결함을 비난하는 반면 중국기자들은 사회로부터 고립과 같은 삶의 배경 문제를 강조한다. 아쿠아리룸에서 중국인은 물고기의 행동을 환경 탓으로 돌리지만 미국인은 물고기의 성격과 의지 때문이라고 본다. 어떤 사람은 주로 이미지를 중요한 대상으로 관찰하고 또 어떤 사람은 대상과 맥락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기도 한다. 환경의 복잡성은 서양인보다 아시아인이 감당을 잘한다. 그러나 아시아인은 자기 삶을 제대로 통제하고 있지 못한다는 감정을 더 자주 느낀다고 한다. 아시아인들은 통제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시아인에게 변화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과제이며, 조화가 자유보다 더 중요하다.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누군가를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우리는, 아니 나는 쉽게 구분하지 못했지만, 네러티브와 이야기, 그리고 스토리는 영어로는 서로 다르다. Narrative, Erzihlung, Grschte 이 세 가지개념과 의미는 서로를 기반으로 한다. 내러티브가 토대를 형성하고 그 위에 내러티브의 문화적 표현으로 이야기가 쌓이고, 다시 그 위에 수많은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는 구체적인 스토리가 쌓인다. 세 가지 층위에 있는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사건의 시간적 순서를 담고 있지만 ‘스토리’는 사건을 완전히 다른 순서로 재현할 수 있다. 이로부터 완전히 다른 스토리가 생겨날 수 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 반면 ‘내러티브’는 시대를 넘나들 수 있는 완전히 시간 초월적인 의미의 캡슐이다. 이야기와 스토리는 놀라울 만큼 종종 서로 다른 문화에서 서로 다르게 변형되어 전해지며 서로 다른 커뮤니티와 집단에 잠재적 정체성을 제공한다. 한 명 이상의 사람이 내러티브를 이해하고 믿으면 곧 그 내러티브는 사회나 국가와 같은 상위 집단에도 – 정치적 움직임을 위해 - 의미를 생성할 수 있다.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사건을 순서대로 담고 있지만, 스토리는 완전히 다른 순서로 재현하기도 한다. 완전히 다른 소토리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 반면 내러티브는 시대를 넘나들 수 있는 완전 시간 초월적인 의미의 캡슐이다. 이야기와 스토리는 놀라울 만큼 종종 서로 다른 문화에서 서로 다르게 변형되어 전해지며, 서로 다른 커뮤니티와 집단에 잠재적 정체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결속은 이야기 차원이 아니라 호환될 수 있는 내러티브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한 명 이상이 내러티브를 이해하고 믿으면 그 내러티브는 사회나 국가와 같은 상위 집단에도 의미를 생성할 수 있다. 이처럼 서사되고, 이상화된 국가는 ‘불굴의’혹은 ‘자유를 사랑하는 국가’가 될 수가 있다.
‘통일’이라는 한 단어에서도 훌륭한 스토리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즉 모든 것을 촉발하는 방아쇠(독일 분단), 수많은 도전(냉전), 해피엔딩(1989년 평화혁명) 등. 적대자와 주인공과 멘토는 과거에는 하나였다가 분단된 두 사회의 여정을 함께 하기도 한다. 우리의 의식은 그야말로 역사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통일’같은 하나의 단어에서도 우리의 서사적 본능이 발동하기에 충분하다.
단어는 마법을 지닌다. 비트겐슈타인은 ‘말도 행동’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결혼한 부부는 혼인서약을 하고 인생의 중요한 문턱 중 하나를 넘으며 함께 결정적으로 변화한다. 결혼식을 마친 커플은 스스로 ‘부부’라고 칭할 수 있게 되면서 변함없는 부부관계, 충실함, 일부일처제에 대한 실존적 이야기를 들려준다. ‘피부색’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결혼’이라는 단어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회에 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해 준다. 지시형은 화자가 요청하거나 명령을 통해 누군가에게 행동을 취하게 하고, 언약형은 화자가 무언가를 하려는 의도를 설명한다. 이를테면 미래의 행동을 약속하거나 누군가 협박할 수도 있다. 또 표현형은 화자의 내면세계를 전달하고 감사함이나 경멸 같은 주어진 상황에 대한 화자의 태도를 표현한다. 선언형은 엄밀히 보면 순진한 마법과 같다.
우리는 말로는 계란후라이를 만들 수 없지만, 회의를 연기하고 사퇴하고 신랑과 신부를 남편과 아내로 만들 수 있고, 전쟁을 선포할 수도 있다. 날계란에 ‘나는 네가 계란후라이가 되었음을 선언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날계란이 조리된 상태로 바뀌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반면 인간의 경우 불과 몇 단어로 실존적 상태를 변화시키는 힘이 작동한다. ‘당신은 무죄다. 당신은 이제 자유다. 당신은 결혼했다.’처럼 말이다. 단어가 지닌 전설적인 힘은, 특히 꾸며냄으로써 허구를 창조하기도 하고, 현실을 모방함으로써 진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집단으로 ‘믿는 척하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큰 규칙은 우리의 언어다. 우리에게는 특정 글자의 조합이 글자 이상의 것처럼 행위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동의가 있다. 문자로는 공격자에 맞서 자신을 지키지 못한다. 하지만 ‘무기를 제공한다.’라는 말은 실제로 전쟁이 시작되거나 끝낼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가 담긴 이미지로도 충분히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1989년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폴란드를 방문해 바르샤바에서 무릎을 꿇은 사진을 기억하는가? 이 모습의 이미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을 기록하고 있다. 범죄와 용서를 구하는 전체 역사를 이야기해 준다.
단순하지만 분명한 그의 제스처는 두 나라를, 그리고 희생자와 가해자를 서로 포갠다. 개별 단어가 전체 내러티브를 전달할 수 있는 것처럼 때로는 개별 이미지도 큰 변화 과정과 영웅의 여정을 말해준다. 이미지는 아이콘이 될 수 있으며 내러티브를 설정하고 전파할 수 있다. 보편적으로 이해되는 내러티브까지 말이다. 이미지는 글자처럼 알파벳도, 고정된 문법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미지가 단어처럼 기호학적 관점에서 기술될 수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이제 영상통화나 화상회의 같은 카메라 기반 위에 상호작용을 포함한 모든 시각적 의사소통이 우리 일상에 침투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상적인 의사소통에는 시각적인 대화 프로토콜이 있는데, 이는 이모티콘이나 지아이에프(GIF)* 또는 밈(Meme)*을 통해 특정 맥락과 생각을 더 이상 끝까지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게 만든다. 소셜 플랫폼에서도 고유의 언어적, 시각적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문화는 지속적이고 거대한 변화를 거치고 있는 동시에 서사적 반복으로 인해 내재화되어 마치 개인적, 집단적 상징 이미지의 새로운 형태처럼 기능하는 고정관념 이미지를 생성한다. 특히 인스타그램은 기본적으로 사진이 아니라, 상투적 이미지가 주를 이룬다. 이는 인스타그램, 트위트, 틱톡, 페이스북, 유튜브 같은 대형 플랫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넌지시 암시만 해도 충분하다. 일상적 의사소통은 모두가 해독할 수 있는 시각적 서사와 서사적 코드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수단으로 소셜 미디어를 주로 사용할 경우, 셀피*는 매우 개인적인 우리 자신의 상징적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디지털 세계에서도 이야기는 원숭이에게도 많은 것을 단순화하는 동시에 복잡하게 한다.
【2】모두 12장까지인 이 책을 이제 겨우 4장까지를 읽었다. 570쪽이나 되는 것을 앞으로 1주일 내에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태산을 오르듯이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다. 새벽에 잠이 깼으므로 이렇게 적었다. (241120)
페이스북 창업자 ‘커크버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미국 대학입학 자격실험에서 1600점 만점을 받아 1등을 했다. 그는 대학에 들어간 후 여자 친구가 그의 야망에 기뻐하기는커녕 무시하는데 극도의 모욕감을 느꼈고, 여자 친구는 치명적인 말을 남기고 떠났다. “넌 분명히 컴퓨터 분야에서 크게 성공하겠지? 하지만 네가 컴퓨터에 미친 괴짜라서 여자들이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평생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될 거야, 진심으로 이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네가 알았으면 좋겠어. 여자들이 널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네가 재수 없는 놈이라서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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