씀바귀꽃
정이랑
돌과 돌 사이에서 피어나는 삶이 있다
쉽게 쉽게 살아가는 것이 어디 있으랴
너와 내가 만들어 놓은 이 자리,
바람이 와서 흔들어 대고
빗물도 흘러들어 발을 적신다
달콤한 사랑을 꿈꾸지 못해
쓴맛으로 가득 차 있는 몸,
한 해를 그래도 살아내는구나
너, 가고 없는 틈 사이로
홀씨 하나 떨어져 참고 참아서
노랗게 밀어 올릴 다음 해를
먼 곳 바라보며 기다려 보련다
시에시집017 『노래하는 은행나무 2023년』 에서
대숲
정원기
속이 비어서 제 속에 바람을 지니고 산다
댓잎 갈며 들릴 듯 말 듯 사운거리다 한쪽으로 몰리면서 솨악 물소리 내기도 하고, 후두둑 후두둑 빗소리 시늉을 내기도 한다, 푸른 잎 세워 임 부르기도 하고, 바람 물결 적신 채 기상 굽히지 않는구나
저희끼리 손 비비며 자잘자잘
건넛마을에서 마실 나온 바람
잎사귀 낱낱 솟구치지 못하네
엷은 날개처럼 허옇게 풀린 구름,
허성한 대숲이 바람을 부른다
시에시집017 『노래하는 은행나무 2023년』 에서
오월 첫날에
정삼조
오월 첫날 모란은 지고
새로 작약 피었다네
하늘은 마냥 푸르고
때로 구름이 들고 나는 곳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 덧없음의 틈새에
우연히 끼어들어
그리움 된 사람 있었다네
그 그리움 땅에서 솟아
새로 작약 피었다네
오월 첫날에
시에시집017 『노래하는 은행나무 2023년』 에서
식장산에서
정바름
개심사 범종이 미물들을 깨운다
놀란 고라니가 풀쩍 뛰어오른다
지구를 밀고 가는 개미의 행렬
우주를 저어가는 날벌레 무리
밀고 저어 도달한
우주의 어느 변두리에서
지나온 길은 점점 멀어지고
나는 숲으로 스며든다
시에시집017 『노래하는 은행나무 2023년』 에서
벚나무
이강하
오늘도 나는 자유가 없다
절망이 탈출하는 공명 줄같이
눈부신 어제가 찍어낸 출렁다리같이
갓 핀 잎들에 갇혀 파랑의 파란에 질려 있다
시에시집017 『노래하는 은행나무 2023년』 에서
만월
유준화
달이 찔레꽃을 출산했습니다
찔레꽃이 피어도 오지 않았습니다
만삭인 달이 억새꽃을 출산했습니다
억새꽃이 피어도 오지 못했습니다
가시를 잡고 달빛에 물어보는 칠십 년
휴전선 일백오십오 마일 철조망에
바람의 뼛가루가 뿌옇게 흩어지는 밤입니다
이제, 남은 시간 없는데
이산가족들 아직도 상봉하지 못하여
눈물의 뼛가루가 뿌옇게 흩어지는 밤입니다
시에시집017 『노래하는 은행나무 2023년』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