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를 한국전쟁에 바친 마지막 4할 타자
2023. 7. 3.
스포츠 뉴스 야구는 구라다
‘7월의 6·25전쟁 영웅’ 테드 윌리엄스 이야기
1952년 4월 30일. 개막 6번째 경기였다.
펜웨이 파크에 2만 4764명이 몰렸다.
빨간 양말들에게는 특별한 날이다.
어떤 이별을 위한 무대였다.
‘테드 윌리엄스 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팀의 간판스타가 떠나는 날이었다.
주인공이 마이크 앞에 섰다.
“야구 선수에게 최고의 날은
자신을 위한 하루가 생길 때일 것이다.
오늘 여러분이 그런 날을 내게 만들어줬다.
14년 전 이 멋진 팀의 일원이 됐다.
그동안 훌륭한 동료와 팬들과 함께했다.
이번 여름을 위해 기도해 달라.
살아있는 동안 오늘을 기억할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이라니.
뭐가 이렇게 비장해?
하지만 괜한 오버는 아니다.
하루 뒤 군입대를 앞둔 심정이다.
그것도 이역만리 머나먼 타국 땅이다.
하루에 수백~수천 명씩 전사자가
나오는 전장으로 징집 명령을 받은 것이다.
구단은 그 해 연봉을 전액 지급하기로 했다.
8만 5000달러, 현재 가치로
97만 6000달러(약 13억원)가량이다.
동료, 친구들은 캐딜락 승용차를 선물했다.
“꼭 돌아와서 이 차를 몰고 보스턴 거리를 질주하라”
는 기원이 담겼다.
이날 경기는 팽팽했다.
승부는 역시 그의 손에서 결정됐다.
7회 결승 2점포를 터트렸다.
레드삭스가 타이거스를 5-3으로 눌렀다.
사람들은 이것이
그의 마지막 홈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뜨거운 환호가 쏟아졌다.
한국전쟁 파병을 앞두고
펜웨이 파크에서 열린 송별식 mlb.com
캡처미 해병 전투비행단으로 39번이나 출격
사실 그의 징집은 의외였다.
이미 2차 대전 중에도 3년(1943~1945)을 복무했다.
소위로 임관해 비행 교관으로 근무했다.
종전 무렵 사령관과의 약속도 있었다.
다시 소집은 없겠지만 (여론을 의식해) 예비군으로
병적은 유지하라는 당부였다.
하지만 돌발 사태가 벌어졌다.
한국전쟁에 미군이 참전하고, 이게 길어졌다.
전투기 조종사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 바람에 다시 소집 영장이 떨어진 것이다.
실무 장교의 착오였다는 훗날 보도도 있었다.
거기 적힌 테드 윌리엄스
(Theodore Samuel Williams)가,
그 야구선수인 줄 몰랐다는 고백이다.
아무튼….
실전 경험은 전혀 없다.
비행 교관으로 근무했을 뿐이다.
하와이 전선 투입을 대기하던 중 2차대전이 끝났다.
그나마도 조종간을 놓은 지 7년이 넘는다.
8주간의 추가 교육이 필요했다.
한 교관의 기억이다.
“그는 특별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훈련에 임했다.
재능은 말할 것도 없다. 공중 사격은 늘 1등이었다.
명문대 출신 교육생들도 1시간은 걸릴
복잡한 계산 문제도 15~20분 만에 해치웠다.
가장 우수한 인재였다.”
거기서도 최고였다.
비행 학교를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곧바로 전선(한국)으로 투입됐다.
배속된 곳은 경북 포항이다.
K3 비행장에 주둔하던
미 해병 311 전투비행 대대로 배치됐다.
F9F 전투기 편대장의 임무를 맡았다.
당시 윙 맨 중 한 명이 존 글렌 상원의원이다.
NASA 우주비행사로 최초의 궤도
비행을 성공시켜 국민적 영웅이 된 인물이다.
글렌의 기억이다.
“워낙 유명한 야구선수여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한 번도
자기 입으로 야구 얘기를 꺼낸 것을 본 적이 없다.
과묵하고 가장 용감한 군인이었다.
39번이나 되는
출격 명령에 불평 한마디 없었다.
언제나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국방부 블로그평양 폭격 중 겪었던 죽을 고비
물론 늘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생사의 고비를 넘긴 게 몇 차례다.
그중 최악은 1953년 2월의 기억이다.
평양 인근에서 작전 도중 적의 대공포망에 갇혔다.
수십 발을 맞고 기체가 너덜너덜한 상태가 됐다.
급히 기수를 남으로 꺾었다.
수원 비행장으로 향하는 중 센서에서 잇따라
신호가 울렸다.
연료가 새기 시작했고, 다이빙 브레이크도,
랜딩 기어도 작동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동체 착륙을 시도했다.
1마일 이상 활주로를 미끄러졌다.
불꽃이 튀기며 흘러내린 연료에 불이 붙었다.
소방차 몇 대가
펼친 진화작업은 1시간이나 걸렸다.
다행히 조종사는 무사했다.
훗날 당사자의 기억이다.
“비행기가 멈추고 나가려는데 캐노피(조종석 덮개)가
열리지 않았다.
불길이 번지는 와중이어서 무척 당황했다.
탈출 버튼을 누르고 간신히 빠져나왔다.
착륙 때 브레이크를
너무 세게 밟아서 발목이 부러질 뻔했다.
활주로에서 진땀을 흘리는데
누군가 오더니 사인을 요청하더라.
기가 막혀서 한참 웃었다.”
당시 지휘부는 비행기를 버리고
공중에서 비상 탈출하라고 지시했다.
기체 이상으로 조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동체 착륙을 감행했다.
(비상 탈출 때) 낙하산으로 착지하며
무릎 부상을 당할지 모른다는 걱정 탓이다.
“그 때 가졌던 가장 큰 두려움은
작전 중에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전투 중에
다치면 어떻게 하냐’ 는 것이었다.
상이용사가 되는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다시 야구를 못하게 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적의 대공포에 맞아 격추될 뻔했던
윌리엄스의 전투기 국방부 블로그
그는 파병 기간 내내 중이염으로 고생했다.
감기에 폐렴이 겹치며 생긴 병이다.
고공 비행을 해야 하는 전투기 조종사에게는
치명적이다.
후유증으로 청력에 이상을 겪었다.
이 문제로 의병 전역하게 된다.
1년간 39번의 출격을 완수했고,
이 중 1/3은 적진으로 넘어간 작전이었다.
퇴역 날짜는 1953년 7월 23일이다.
휴전 협정 이틀 전이었다.
진정한 위대함이 새겨진 또 다른 4할 시즌
그는 가장 화려할 때 두 번이나 커리어가 중단됐다.
2차 대전 중이던 1943~1945년(24~26세)
3년간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시기(33~34세)다.
약 5년간의 공백이 없으면 어땠을까.
mlb.com은 평균값을 토대로 이렇게 추산했다.
통산 3400안타(8위), 660홈런(6위),
160bWAR(4위)을 기록했을 것이다.
또 2400타점, 2600볼넷, 6000출루로
이 부문 최고 기록 보유자가 됐을 것이다.
그는 전역 후 곧바로 레드삭스에 복귀했다.
그리고 왕성하게 활동했다.
이후에도 줄곧 3할 중반 이상의 고타율을 기록했다.
38세 시즌인 1957년에는
생애 두 번째로 높은 0.388까지 마크했다.
41세까지 현역으로 남았으며,
1966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2002년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끝내 밤비노의 저주가 깨지는 것(2004년)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그를 마지막 4할 타자라고 부른다.
22세 시즌이던 1940년의 타율 0.406은
여전히 깨지지 않는 대기록이다.
(올 시즌 마이애미의 루이스 아라에스가 여기에
도전하고 있다. 3일 현재 타율은 0.389이다.)
하지만 그의 숨겨진 4할 타율은 두 번이나 더 있다.
바로 한국전 참전
기간인 1952년과1953년에 남긴 것이다.
1952년 6게임에서 10타수 4안타(0.400).
그리고 1953년은
전역 후 37게임에서 91타수 37안타를 쳤다.
0.407의 타율이다.
비록 규정 타석에는 한참 부족하지만,
진정한 위대함이 깃든 기록이다.
우리 국가 보훈부는
지난달 30일 보도자료 하나를 배포했다.
7월의 6·25전쟁 영웅으로
테드 윌리엄스를 선정한다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