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요 14장으로 넘어갑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는 것이 곧 택함이며 택함은 바로 거듭남입니다.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운명과 하나님의 손에 잡힌 존재로 바뀌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통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다른 여느 사람들처럼 편하게도 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가지고 누릴 수도 있을 텐데 왜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주시지 않고 좁디 좁은 길로 걷게 하셨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운명과 같은 존재를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를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이해하십니까? 아직도 너무 억울하십니까?
하나님과 같은 운명, 하나님과 같이 영원한 존재가 된 것을 속상해 하십니까?
사실 우리들 중에는 현실로 인해 속상하고 억울해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타고난 목숨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에게 미혹되는 속성이 아직 우리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롬8:7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하십니다.
육신이 뭐냐 하면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확실히 말하건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건강이 있으니 할 수 있다, 아직 나이가 있으니 할 수 있다, 아니면 아직도
자본이 남았으니 할 수 있다, 아직도 내게는 기술이 남아 있으니 할 수 있다’ 고 말합니다.
이건 육이고 이건 영이라고 구분할 줄 알아야 육신 곧 겉 사람이 계속 쇠하여
가고 죽어져 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배워서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겉 사람 속에서 우리의 새 영이 살아 있음을 날마다 점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이 하루아침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석수장(石手匠)이가 돌 하나를 가지고 와서 조각품을 만드는데 이것을 하루 만에
뚝딱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조금씩 쪼아내며 모양을 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수석(壽石)도 하루아침에 아름다운 수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큰 돌이 떠 내려와서 그 모진 물살에 시달리고 부딪히는 과정을 통해서 되어 집니다.
또 깎임과 닳음의 과정을 거치며 하류까지 떠내려 온 다음 아름다운 수석으로 발견되죠.
그렇듯이 과연 나의 겉 사람은 후패하고 내 속사람은 새로워지고 있는가,
지금 내가 생활 속에서 성령의 소욕이 많아지는가, 아니면 육신의 소욕이 많아지고
있는가를 항상 체크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서로 다툽니다.
이 둘이 서로 다툼으로 말미암아 내분이 일어나서 아무것도 안 되도록 합니다(갈5:17)
참 기도는 성령의 소욕을 좇겠다고 결단하고 자신을 만들어 가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정신노동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육신의 소욕이 속에서 자꾸만 일어납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육신의 소욕은 죽어가고
성령의 소욕이 속에서 커가야 합니다. 그래서 살아진다는 것은 바로 되어 진다는
뜻인데, 이는 하나님의 생명, 곧 성령의 소욕이 내 속에서 우세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사람이 죽을 지경이 되고, 똥줄이 탄다는 것은
성령 이전의 베드로처럼 자기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다고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나는 할 수 있다고 고집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진리를 배우지 못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거짓말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배워 미혹이 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제가 잘 알고 있는 어느 권사에게 가끔 물어 봤습니다.
“권사님, 잘 됩니까? 잘 되겠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목사님, 걱정 마십시오. 앞으로 잘 될 겁니다. 제가 한 번 제대로 사명을
감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 대답을 들어보면 꼭 신학교 갓 졸업한 사람과 같습니다.
신학교 갓 졸업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만만하게 덤빕니다.
‘목사님 걱정하지마세요’ 라는 그 말 속에는 “돈으로 하겠다.
경험으로 하겠다. 똥고집으로 하겠다”는 등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내게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대답을 하는 겁니다.
아니죠. 한참 동안 고난의 수업료를 내고 공부를 더 해야 됩니다.
한 예로 오래 전에 신학교를 나와서 안수 받은 지 얼마 안 된 분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제가 물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사역을 하시렵니까?”
그러니까 그분은 "나는 유명한 신학자가 되겠습니다." 제가 다시 "학교는
어디 나오셨습니까?" 하니까 "총신과 신대원을 나왔습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훌륭한 교수가 되는 것은 참 좋은 비전입니다.
한국교회는 신학교의 교수가 바뀌어야만 교회체질이 바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사님 10년만 성경을 통해 자기 자신을 만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정말 훌륭한 교수가 될 것입니다.”하고 권면을 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건 제가 신학교와 신대원을 여기저기서 마치고 미국에 공부를 하러 갔다
왔지만 제가 가장 자신이 없는 부분이 성경이었기 때문입니다.
학생이 교과서에 익숙해야지 킬 문항 몇 개 배워 수능을 치를 수 없습니다.
목사가 성경이 쉬워져야지 성경은 모르고 누구를 따라 킬 문항 몇을 들고 나서서야...
이분은 신학교에서 다 배웠다는 겁니다. 신학대학원까지 나왔기 때문에
나는 이제 부족한 것이 없고 가르치기만 하면 된다고 자신만만한 겁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충분히 남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분에게는 자신의 지식이 보화입니다. 남을 가르치는 것이 그 사역의 목표입니다.
선생이 되려고 하는 거죠. 성령 받기전의 베드로와 같고 아볼로와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고 나서는 베드로가 자신의 고백대로 되었느냐 하나도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나니 자기가 하겠다던 그 의지도 의욕도 깡그리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두움이 닥치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부였던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말았고 그 자리에 예수님은 다시 찾아가시고,
부활의 주님이 그에게 성령을 주시므로 거듭난 베드로가 되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사용되었다는 스토리가 성경 속에 담겨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처참한 낭패를 맛본 베드로는 “내가 하겠습니다.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내가 주를 사랑(필레오)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사랑해 봤자 인간의 사랑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를 사랑한다는 베드로 고백처럼” 하는 이 복음송은 베드로의
상태를 잘 모르는 노래입니다. 베드로가 그런 식으로 내가 주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사랑이 주님의
사랑과 같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그 전 같으면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면 “예, 주님 제 성격을
잘 아시잖아요. 한다면 하는 놈입니다. 제가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겸손해졌습니다. 주제파악이 된 겁니다.
성경에 겸손해진 사람이 많지만 그중에 특별히 두 사람 요나와 베드로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회개를 하고 “내가 주의 목전에
쫓겨났을지라도 내가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욘2:4)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부인한 후에야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요21:15-17) 그런 요나에게 사명이 다시 주어지고,
그런 베드로에게 사명이 다시 주어지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에 한번 들어가 봐야 되고, 베드로처럼 낙향을 한번 해봐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만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사신 다음 곧 ‘요나의 표적’ 이후에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듯이, 또 그의 제자들도 자연적으로 태어난 이 본성이
십자가에 죽고 난 다음에 비로소 성령이 임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 겁니다.
첫댓글 아멘!
주께 감사 할렐루야!
좋은 산앙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