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冥 曺植 先生 年譜
1501년(연산군 7) - 1세
음력 6월 26일에 경상도 삼가현(三嘉縣) 토동(兎洞: 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또는 산해(山海), 본관은 창녕(昌寧). 아버지는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지낸 조언형(曹彦亨)이고, 어머니는 인천이씨(仁川李氏)인데 충순위(忠順衛) 이국(李菊)의 따님이다. 선생의 증조부 생원 조안습(曺安習)이 비로소 삼가현(三嘉縣) 판현(板峴)에 자리잡아 살았다.
1507년(중종 2) - 7세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웠다. 아버지가 <시경(詩經)>, <서경(書經)>등을 입으로 가르쳐 주면 바로 외워 잊지 않았다. 독려하 지 않아도 부지런히 공부하였고, 의심스럽거나 알기 어려운 곳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질문하여 이해한 뒤에 그만두었다.
1509년(중종 4) - 9세
선생이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자 어머니가 매우 걱정을 하였다. 선생은 아픈 것을 참고 기운을 내어 어머니에게 “조금 낫습니다. 하늘이 사람을 태어나게 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지금 제가 다행이 장부로 태어났으니 하늘이 저에게 부여한 사명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어찌 지금 갑자기 요절할까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1518년(중종 13) - 18세
아버지를 모시고 단천(端川)의 임지로부터 서울로 돌아왔다. 선생이 15세 때 쯤에 아버지가 단천군수에 임명되어 임지로 따 라가서 살다가 이때 서울 장의동(藏義洞)으로 돌아와 살았다. 단천에서 생활하는 동안 선생은 다른 선비들과는 달리, 공부의 범위를 유교경전에만 한정하지 않고, 아주 폭넓게 공부하였다. 유교경전과 거기에 따른 후세학자들의 주석서는 물론, 제자백 가(諸子百家)/천문(天文)/지리(地理)/의학(醫學)/수학(數學)/병법(兵法) 등을 두루 공부하여 안목을 넓혀 나갔다. 또 아버지를 따라 관아에서 생활하면서, 직접 행정체제의 불합리성, 아전(衙前)들의 농간, 백성들의 곤궁상 등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남명은 자기자신의 수양방법을 스스로 두 가지 마련했다. 한 가지는 깨끗한 그릇에 물을 가득 담아 꿇어앉아 두 손으로 받쳐들고서 기울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은 채로 밤을 새우며 자신의 뜻을 가다듬는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옷 띠에 쇠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그 소리를 듣고 정신을 깨우쳐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대곡(大谷) 성운(成運)과 같은 깨끗한 선비와 이웃하여 살면서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며 학문을 닦고 인격을 수양해 나갔다. 이 시기에 동고(東皐) 이 준경(李浚慶),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등 뒷날 유명한 인물이 된 사람들과 사귀었다.
1519년(중종 14) - 19세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산 속의 절간에서 공부하다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부고를 들었다. 이 때 숙부 조 언경(曺彦卿)도 조광조 일파로 몰려 파직되었다. 나라를 바로잡고자 일하던 어진 사람들이, 자신의 경륜을 펴보지도 못한 채 간신배들에게 몰려 목숨을 잃는 것을 보고서 남명은 못내 슬퍼하였다.
1520년(중종 15) - 20세
진사/생원 초시(初試)와 문과 초시(初試)에 모두 급제하였다. 그러나 생원/진사 회시(會試)에는 응하지 않았다.
1522년(중종 17) - 22세
남평조씨(南平曺氏) 충순위(忠順衛) 조수(曺琇)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1525년(중종 20) - 25세
절간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다가, 원나라의 학자 노재(魯齋) 허형(許衡)의 다음과 같은 말을 <성리대전(性理大全)>에서 읽게 되었다. “이윤(伊尹)의 뜻을 뜻으로 삼고, 안자(顔子)가 배운 바를 배워, 벼슬에 나가서는 경륜을 펴서 업적을 이루고 초야에 있으면서는 지조를 지켜야 한다.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한다. 벼슬에 나가서는 아무 하는 일도 없고 초야 에 있으면서는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장차 무엇 하겠는가?” 허형의 이 말에서 남명은 자 신의 학문하고 처신할 방향을 찾아 결심이 섰던 것이었다. 드디어 과거하기 위해서 하는 공부가 그릇되었음을 깨닫고서 마음 속으로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다음날 날이 새자마자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 때부터 모든 공명을 위한 형식적이고 지엽적인 학문은 떨쳐 버리고, 유학의 정수를 공부하기에 전념하였다.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와 송유(宋儒)들이 남긴 글을 정력을 쏟아 공부하였다. 공자(孔子)/주렴계(周濂溪)/정명도(程明道)/주자(朱子)의 초상화를 그려 네 폭의 병풍을 만들어 자리 곁에 펴 두고서 아침마다 우르러 절을 올리며, 마치 직접 가르침을 받는 듯이 하 였으며, 그 학문을 올바로 배우겠다고 마음 속으로 맹세하였다.
1526년(중종 21) - 26세
부친상을 당하였다. 남명은 서울에서 영구(靈柩)를 모시고 고향으로 가서 장례를 치르고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1529년(중종 24) - 29세
의령(宜寧) 자굴산(闍崛山)에 있는 절에서 머물며 글을 읽었다.
1530년(중종 25) - 30세
어머니를 모시고 김해(金海)의 신어산(神魚山) 아래로 옮겨가 살았다. 따로 정사(精舍)를 지어 산해정(山海亭)이라 이름하였다. ‘높은 산에 올라가 바다를 내려다본다’는 뜻으로 남 명의 학문의 방법을 함축한 말이다. 대곡(大谷) 성운(成運)․청향당(淸香堂) 이원(李源)/송 계(松溪)/신계성(申季誠)/황강(黃江) / 이희안(李希顔) 등이 내방하여 학문을 강론하였다.
1531년(중종 26) - 31세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심경(心經)>을 보내왔기에, 책 뒤에 <서이원길소증심경후 (書李原吉所贈心經後)>라는 글을 써넣었다.
1532년(중종 27) - 32세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가 <대학(大學)>을 보내왔기에, 책 뒤에 <서송규암인수대학후(書宋圭菴麟壽大學後)>라는 글을 써넣었다. 성우(成遇)가 <동국사략(東國史略)>을 보내왔기에, 책 뒤에 발문(跋文)을 붙였다.
1536년(중종 31) - 36세
첫째 아들 차산(次山)을 낳았다. 가을에 향시에 응시하여 삼등을 하였다. 이 해 서암(棲庵) 정지린(鄭之麟)이 와서 배웠다. 남명이 제자를 가르친 것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1538년(중종 33) - 38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이림(李霖)의 천거(薦擧)로 헌릉(獻陵) 참봉(叅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43년(중종 38) - 43세
경상감사(慶尙監司)로 와 있던 이언적(李彦迪)이 편지를 보내 만나자고 했지만, 남명은 사절하였다.
1545년(인조 1) - 45세
이 해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는데, 10월에 친구 이림(李霖)<곽순(郭珣)>성우(成遇) 등 어진이들이 아무런 경륜(經綸) 도 펼쳐보지 못한 채, 간신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목이 메여 눈물을 흘렸다. 11월에 어머니상을 당하였는데 12월 영구를 모시고 돌아가 아버지 산소의 동쪽 언덕에 장사지내고는 시묘살이를 하였다.
1548년(명종3) - 48세
전생서(典牲署) 주부(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어떤 경륜을 펴 볼 만한 자리 가 아니고, 또 조정에서는 간신들이 실권을 잡고 있는데, 남명이 벼슬에 나가서는 괜히 ‘숨 어 있는 어진 사람을 등용했다’라고 간신들의 명분만 세워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김해로부터 삼가현(三嘉縣) 토동(兎洞)으로 돌아와 살았다.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강학(講學)하는 장소와 제자들이 거처할 집으로 삼았다. ‘계부(鷄伏)’는 닭이 알을 품어 병아리가 부화한다는 뜻인데, 학문을 통해서 사람을 길러 내는 것을 이처럼 해야 한단, 것이고, (雷龍)’은 “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소리친다)”라는 뜻이다.
1551년(명종 6) - 51세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 덕계(德溪)오건(吳健)이 와서배웠다.
1553년(명종 8) - 53세
벼슬에 나올 것을 권유하는 퇴계(退溪)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어 벼슬하러 나가지 못할 뜻을 밝혔다. 퇴계가 ‘지금은 벼슬하 러 나올 만한 때’라고 권유하였으나, 남명의 시각에서는 벼슬할 만한 때가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남명은 국가․민족을 등 지고 자기 자신만을 깨끗이 간직하기 위해서 숨는 것만을 고집하는 은자(隱者)는 아니었다.
1555년(명종 10) - 55세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상소하여 국정(國政) 전반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남명의 상소 가운데는, “대비(文定王后)는 진실로 생각이 깊다하나 깊은 궁궐 속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어리니 돌아가신 임금님 의 어린 자식일 따름입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왕대비(王大妃)를 모독하였다 하여, 명종(明宗)이 처벌하려고 했으나, 산림 처사(山林處士)의 우국연민(憂國憐民)의 상소를 처벌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부당한 조처라는 조정 신하들의 변호로 무사하였다. 온갖 부조리가 만연하던 당시 정치상황에서 남명의 과감한 직언(直言)은 산림처사의 비중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557년(명종 12) - 57세
보은(報恩)의 속리산(俗離山)으로 대곡(大谷) 성운(成運)을 방문하였다. 거기서 보은현감으로 있던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을 만나 명년 팔월 한가위 때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1558년(명종 13) - 58세
진주(晋州) 목사(牧使) 김홍(金泓), 자형 이공량(李公亮),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구암(龜巖) 이정(李楨) 등과 함께 지 리산(智異山)을 유람하였다. 이 해 8월 15일에, 작년의 약속에 의하여 성제원(成悌元)과 해인사에서 만났다. 밤 늦도록 이야 기했는데, 그 내용이 모두 국가와 백성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1559년(명종 14) - 59세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하고 나가지 않았다.
1561년(명종 16) - 61세
지리산 아래 덕산(德山)의 사륜동(絲綸洞)으로 옮겨 살면서 산천재(山天齋)를 지었다. ‘산천 (山天)’은 <주역(周易)>대축괘(大蓄卦)로서, ‘하늘이 산 속에 있는 형상으로서, 군자가 이를 본받아 강건(剛健)하고 독실하게 하여 스스로 빛냄으로써 날로 자신의 덕(德)을 새롭게 한다 는 뜻이다.
1563년(명종 18) - 63세
남계서원(藍溪書院)에 가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사당(祠堂)을 참배하고 나서, 여러 학생들이 강(講)하는 것을 들었다.
1565년(명종 20) - 65세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이 서울에서 폐백을 들고 찾아와 가르쳐 주기를 청했다.
1566년(명종 21) - 66세
봄에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찾아와 집지(執贄)하였다.7월에 임금의 부르는 전지(傳旨)가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8월 에 상서원(尙瑞院) 판관(判官)으로 불렀다. 10월 3일에 대궐에 나아가 숙배(肅拜)하고 사정전(思政殿)에세 명종(明宗)을 만 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같이 무슨 일을 해 볼 만한 임금이 못된다고 판단하고는, 11일에 돌아왔다. 이 때는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고 권간(權奸) 윤원형(尹元衡)도 쫓겨나, 을사사화 등으로 축출되었던 사류(士類)들이 돌아오게 되어 조정이 좀 맑아졌으므로 남명도 한 번 벼슬에 나가 볼까 하는 생각이 있었기에 임금을 만나러 갔던 것인데, 실망하고 돌아왔다.
1567년(선조 즉위년) - 67세
11월에 새로 즉위한 선조(宣祖) 임금이 교서(敎書)를 내려 특별히 불렀으나, 상소만 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2월에 또 다시 불렀지만, 사장(辭狀)만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남명은 상소하여, 역대 임금들의 치국(治國)에 실패한 전례를 지적하고서,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임금 자신인 학문과 인격을 닦는 데 있습니다”라고 직간(直諫)을 하였다. 망우당 (忘憂堂) 곽재우(郭再祐)가 와서 <논어(論語)>를 배웠다.
1568년(선조 원년) - 68세
5월에 선조 임금으로부터 부르는 전지(傳旨)가 있었지만,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7월에 부인 조씨(曺氏)가 세상을 떠났다.
1569년(선조 2년) - 69세
종친부(宗親府) 전첨(典籤)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570년(선조 3년) - 70세
선조 임금이 다시 벼슬에 나오라고 불렀지만, 사양하였다. 남명은 벼슬을 계속 사양하여 끝내 나아가지 않았는데, 이는 남명 에게 내린 벼슬이 무슨 경륜(經綸)을 펼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1571년(선조 4년) - 71세
4월에 선조 임금이 경상감사(慶尙監司)를 통하여 남명에게 음식을 내려보냈다. 남명은 상소하여 사례하였다. 12월 21일부터 병을 얻어 낫지 않고 계속 끌었다.
1572년(선조 5년) - 72세
1월에 옥계(玉溪) 노진(盧縝),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한강(寒岡) 정구(鄭逑), 각재(覺齋) 하항(河沆) 등이 찾아와 문병을 하였다. 동강이 “혹시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게 되면, 마 땅히 어떤 칭호를 써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으니, 남명은 “처사(處士)라고 쓰는 것이 옳겠 다”라고 했다. 2월 8일에 몸채에서 숨을 거두었다. 1월에 경상도 감영(監營)에서 남명에게 병이 있다고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은 특별히 전의(典醫)를 파견하였지만, 전의가 도착하기 전에 남명은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경의(敬義)의 중요함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했고, 경의에 관계된 옛 사람들의 중요한 말을 외웠다.
부고가 알려지자, 선조 임금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증직(贈職)하였다. 부의(賻儀)를 내리 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남명의 영전에 치제(致祭)하였다. 4월에 산천재(山天齋) 뒷산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이 때 들어온 문인이나 친구들이 보내온 만사(挽詞)와 제문(祭文)이 수백 편이 되었다. 남명은 사림(士林)이 권간(權奸)들에게 여러 차례 죽임을 당하여 도학(道學)이 거의 사라지려는 시대에 태어나서 아주 분발 하여 정진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후학(後學)들을 가르쳐 인도한 큰 공이 있었다. 노년에 이르기까지도 이러한 정신이 조금 도 쇠퇴하지 않았다. 비록 초야에 묻혀 지냈지만, 국가와 민족을 잊은 적은 한 번도 없는 학문으로 현실을 구제하려는 생각 을 갖고 있었다.
1576년(선조 9)
유림들과 제자들이 덕산서원(德山書院)을 건립하여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다.유림들이 삼가(三嘉)에 회산서원(晦山書院) 을 건립하였다.
1578년(선조 11)
유림들이 김해(金海)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건립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남명의 제자인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송암(松庵) 김면(金沔)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 등이 의병(義兵)을일으켜 국가와 민족을구출하는 공을 세웠다 .
1604년(선조 37)
제자 정인홍(鄭仁弘)의 주관하에 <남명집(南冥集)>이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1604년(선조 39)
초간본 <남명집> 목판(木版)이 소실되어 다시 간행하였다.
1609년(광해군 1)
국가에서 덕천서원(德川書院: 덕산서원의 바뀐 이름), 용암서원(龍巖書院: 晦山書院의 바뀐 이름), 신산서원에 사액(賜額)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이 상소하여 증직(贈職)과 증시(贈諡)를 요청함으로 인해서, 남명에 게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 겸 영경연홍문관 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를 증직(贈職) 하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시주(諡注)에, 도덕이 있고 들은 것이 넓으면 ‘문 (文)’이라고 하고, 곧게 도를 지키면서 꺾이지 않는 것을 ‘정(貞)’이라고 한다.
1617(광해군 9)
생원(生員) 하인상(河仁尙) 등 유림(儒林)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남명을 문묘(文廟: 성균관에
있는 공자를 모신 사당)에 종사(從祀)할 것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이후로 남명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건 의하는 상소를, 경상도 유림이 7회, 충청도 유림이 8회, 전라도 유림이 4회, 성균관과 사학(四學) 유생들이 12회, 개성부(開城府) 유림이 1회, 홍문관(弘文館)에서 1회, 양사(兩司: 司憲府와 司諫院의 합칭)에서 1회 했으나, 끝내 허락을 받지 못했다.
1623(명종 원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주로 남명의 제자나 재전제자(再傳弟子)들로 이루어졌던 대북정권(大北政權)이 몰락함으로 인해서 남명 및 남명학파(南冥學派)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어 남명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되지 못한 채 최근에까지 이르렀다.
[자료출처] 허권수 著,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 한길사, 2001 부록
카페 게시글
역사이야기
남명 조식선생 년보
jhy
추천 0
조회 6
24.05.28 11:45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