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베드로에 대한 바울의 책망
(갈라디아서2:11-14)
서론 :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이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보다 못한 사도가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책망할 수 있는 사도임을 안디옥에서 있었던 사실에 근거하여 언급해 주고 있다. 바울은 한때 베드도가 미혹 받아 바울의 책망까지 듣게 된 외식적인 행위에 대해 들어 내놓고 밝히면서 사람의 구원이 율법에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게 되는 이신득의의 진리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이 미혹을 받았던 율법으로 말미암은 구원 설에 대해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1. 베드로의 외식
문제의 발단은 베드로가 안디옥 지방에서 어떤 이방인들과 함께 먹게 된 일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들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은 일은 당연한 일이며 잘 한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관습에 의해 이방인들이나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 하여 음식을 먹는 일을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율법적 행위는 성경적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담이 허물어졌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둘 다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고 구원을 얻기 때문에 이 같은 행동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이미 폐해진 일이었다.
이 같은 일은 행 15장에서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갔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에 의해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공식적인 결정을 내린 이후의 일이다. 그분 아니라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이방인들과 함게 교제한 일도 이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바나바와 또 다른 성도들과 함께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던 중, 야고보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이 그곳에 당도했을 때, 놀랜 나머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던 그 자리를 떠난 것이다. 베드로가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하여 숨은 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이 사람들로부터 책망을 들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믿음에 앞서서 사람들에게서 받을 오해와 교회에서 받을지도 모를 책벌에 더 마음을 쓰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베드로에게는 이방인들과 교제하며 함께 음식을 먹어도 죄가 아니라는 확고한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믿음이 없이 하는 일은 죄가 된다. 의심하면서 하는 일도 믿음이 아니다. 베드로는 또한 사람을 두려워했다. “그가 할례 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갔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베드로는 양쪽 모두에게 외식하는 자가 된 것이다. 베
드로는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율법에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 하면서도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행동을 보여주었고 바나바 등 성도들에게는 베드로가 취한 행동으로 오직 믿음으로 의를 얻는 다는 의에 대한 회의를 주게 된 것이다.
베드로의 이 같은 행동은 외식이 아닐 수 없었다. 외식이란 믿음으로 하지 않고 남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모든 행위가 외식인 것이다.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에 대하여 정죄 하셨다. 외식하는 자의 구제, 외식하는 자의 기도, 외식하는 자의 금식 등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외식하는 자의 죄가 크기에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를 빼라”고 하신 것이다.
2. 바울의 책망
이 일을 듣고 바울은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공적 석상에서 베드로를 면책한 것이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게 된 이유는 14절에서 언급해 주고 있는 것처럼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했다”는 데 있었다. 그리스도인 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앞에 복음의 진리 가운데 굳게 서야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복음의 진리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람을 두려워한 나머지 복음의 진리를 버리고 외식했던 것이다.
바울이 베드로에게 책망한 요지가 나오는데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행동은 복음적이 아니라는 책망인 것이다.
결론 :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람보다 더 두려워할 줄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2) 유대인과 이방인
(갈라디아서2:15-16)
서론 : 바울은 15절에서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을 수 있다는 복음적 진리를 개진하기 위해 서론적으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들의 우월감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말이다.
1. 유대인들의 유월감
유대인들은 자기들 스스로 의로운 백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고 자기들은 온 세계 백성 중 유일하게 그 율법을 지키는 민족으로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으며 하나님도 없는 이방인들은 죄인들일 수밖에 없다.
①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되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약속 받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아래 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는 아무런 약속도 주신 일이 없다.
② 하나님께서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으며 그 율법을 통해서 의와 생명을 약속해 주셨다. 그러나 이방인에게는 율법을 주신 적도 없고 구원이나 생명의 약속을 주신 일도 없다.
③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규례를 주심으로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할례가 주어졌으며 이 할례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으로 성별된 것으로 믿고 있었다.
④ 하나님께서 영광의 메시야를 자기 땅에 보내심으로 종말에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며 그 때 이스라엘은 세계의 지도 국가, 중심 국가가 되어 세계를 지배할 것으로 알고 있다.
2. 유대인들의 이방인 관
유대인들은 대단히 편협적인 이방인 관을 가지고 있다.
①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의 자손에게 약속해 주셨기 때문에 이방인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백성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자손들과 함께 믿음의 자손을 약속하셨는데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다 아브라함의 언약에 동참할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갈 3 : 28-29). 그리고 육신적인 자녀로서의 특권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까지요, 그 이후 에는 믿음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한 아브라함의 자녀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②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아무런 소망이 없는 백성으로 단정짓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원래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녀들인 유대인들을 섭리하셨던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자녀들을 택정 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소망은 그 백성에게 있는 것이다. 아무리 유대인들이라 해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3. 사람이 의롭게 되는 일
바울은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 앞에는 할례, 무 할례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율법이 있고 없고 가 문제가 아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이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의가 문제일 뿐이다. 할례나 율법이나 유대인의 혈통이 의의 표준이나 조건이 될 수 없다. 의의 기원에 대해 바울은 아브라함에게까지 올라갔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 여기심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상속받을 우리의 의를 위함인데 이 같은 성경적인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결론 : 바울은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한다. 하나는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주장이다. 율법의 직능은 의를 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는데 있다.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유대인들이 율법에서 얻을 수 없는 의를 얻은 것이다.
(13) 하나님을 향항여 사는 새로운 생활
(갈라디아서2:17-19)
서론 :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했을 때의 경우를 예를 들어, 그 책임 소재를 밝히면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 들의 의와 죄와의 관계는 교리 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들이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얻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되며 구원의 도리가 흔들리게 된다.
1. 의와 죄의 관계
17절에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범하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바울의 이 말은 율법적인 의를 주장하는 자들의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구원관을 공격하는 모함에 대한 반론이다. 그들은 만약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의를 얻는다면 그가 의를 얻은 후에 죄를 범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었으며 또 정죄에 이르지 않으니 그러면 그 죄는 그리스도께서 짓게 하신 것이냐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는 일에 대한 오해는 의를 얻은 후에 범하는 그리스도인의 죄는 어떻게 처리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 죄가 정죄에 이르지 아니한다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조장하는 분이 아니냐는 것이다.
의를 얻은 후에 그리스도인 들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오히려 죄를 범하여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의를 주셨으니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같은 율법주의자들의 반론에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인의 죄의 책임은 그리스도인에게 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18절에서 그 책임 소재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헐었다’는 말은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뜻이다. 이 같은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졌다. 그런데 그 후, 내가 그 헐었던 것을 내 스스로 다시 세운다면 그것은 헐었던 분의 책임이 아니라 다시 세운 나의 책임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그 책임이 율법적인 책임이 아닌 것이다. 율법의 정죄로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이 범하는 죄는 율법이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을 하나님이 묻는 것이다. 이 책임은 정죄가 아니라 징계로 나타난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료 ... ”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히12:7-9).
3.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바울은 19절에서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생활과의 관계를 밝혀 주고 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존재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율법은 죄인들에게만 필요한 법이다. 죄인들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이미 율법을 향하여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율법을 향하여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율법데 대하여 죽게 하신 것인가? 그것은 그 다음 말씀이 밝혀 주는 대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를 얻고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 들은 죄를 범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결론 :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세 가지 사실에 대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첫째, 죄 가운데서 살아가면 안 된다. 둘째, 우리가 범하는 죄가 소멸되어야 한다(회개). 셋째, 하나님을 향하여 새로운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