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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12,13~21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내 삶의 단편들’이라는 제목으로 사진 여러 개를 카페에 올린 것 보셨습니까?
제일 처음에 올린 것이 하늘 사진을 찍어 올렸어요.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보는 하늘도 요즘 이렇게 예쁩니까?’ 하고 물었어요.
여기 와서 정말 좋은 점은 청주 아파트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구름입니다.
구름을 보면 별게 다 보여요.
성모님 모습도 나오고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어요.
예전에 본 하늘은 미세먼지로 칙칙했는데, 이곳은 공기가 맑아 너무 아름다워요.
그래서 휴대폰으로 찍기가 죄송해서 큰 사진기로 찍어 올린 거예요.
제 서재 창문으로는 뒷집 스님의 복숭아밭이 바로 보여요.
부인 계신 스님인데 사람 안 쓰고 두 분이 농사를 지세요.
가끔은 내가 마실 것 가지고 나가서 드시라고 하면 되게 좋아하고 반가워하시죠.
그런데 이분들 농사짓는 것을 보면,
일단 스님보다 복숭아나무가 다 높아서 복숭아를 따려면 사다리에 오르셔야 해요.
그러니까 저 스님도 복숭아를 보면서 복숭아나무 사이로 보는 하늘을 보게 될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 돼지 알죠?
과수원에 풀어놓는 돼지들이 있어요.
사과밭에도 어떤 집은 땅에 떨어진 거 먹으라고 돼지를 풀어놓죠.
맨날 구정물만 먹고 사는 돼지들한테는 사과가 얼마나 맛있겠어요?
그런데 과수원에 떨어진 사과를 주워 먹는 돼지가 하늘을 볼까요?
안 쳐다보죠.
땅에 묻혀 있는 썩은 사과라도 찾으려고 땅바닥만 코로 후비고 다녀요.
돼지는 사과만 주워 먹을 뿐, 그 사과를 떨어뜨린 나무는 쳐다본 적이 없어요.
자, 그렇다면 이렇게 건강 유지하며 살고 있고, 일용할 양식 있고,
자식들 다 그래도 자기 앞가림하고 살고 있고,
머리끝에서 발가락까지가 전부 다 은총으로 덮여있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은총만 쳐다보고 살아가지, 그 은총을 준 은총의 나무를 쳐다본 적이 몇 번이나 되는가?
몸이 건강하면 ‘내가 알아서 몸 관리 잘하니까’ 당연히 건강한 것으로 생각하고,
아침에 눈 떠도 내 심장이 자동으로 뛰니까 ‘내가 눈 떠진 거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스님이 복숭아 따는 걸 보면서 저 스님은 돼지와는 달리 하늘을 보시겠다고 생각했죠.
1년 내내 농사지은 것을 따면서 얼마나 하나하나가 소중스럽겠어요?
그런데 봉지를 벗겨 보니 벌레가 반은 먹은 것이 있어 벌레 나오면 어떻게 하시냐 물었어요.
‘그냥 같이 먹고 살아야죠.’ 하십디다.
그것이 불자의 마음이죠.
내가 볼 때는 저 양반은 곤충들이 못 오게끔 막지 않는 양반 같아요.
스님은 기도는 언제 하시냐 물었더니 ‘하고 싶을 때 해요.’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농사가 기도고, 농사지으면서 하느님은 아니겠지만
부처님에게 찬미드리며 그 결실 익은 것을 지인에게 보낼 때가 너무 기쁘시대요.
오늘 복음에는 탐욕스러운 부자 얘기가 나와요.
내 피정 때도 참 여러 번 인용하고 미사 강론 때도 여러 번 얘기한 얘기예요.
아마 여기 와서도 내가 미국 부잣집에 초대받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텍사스의 석유 재벌 집에 점심 초대받아갔는데, 나비넥타이 한 기사가 긴 리무진으로 나를 정중하게 데려갔어요.
아무튼 정문을 지나서 10분을 들어가니 으리으리한 영화에서나 보는 저택이 나와요.
그 앞에는 넥타이 맨 집사, 메이드 6명이 쫙 서 있고, 회장은 계단 위에서 나를 맞이하러 내려옵니다.
식사하기 전에 집구경 시켜주면서 얘기를 하는데 방이 한 60개 된대요.
상상을 초월하는 거죠.
자기들도 못 가본 방도 많대요.
5층인데 그냥 성 같았죠.
벽마다 그림 있어서 이 그림은 어디서 봤나 하면 피카소 그림.
하나에 몇십억짜리 그림들이 계단마다 다 붙어 있었어요.
부자긴 부자인가 보다, 재벌은 재벌인가 보다 생각을 했죠.
그러더니 다 둘러보고 난 다음에 다락방에 가더니 유리창을 확 열어요.
‘신부님, 어디까지 보실 수 있으신가요?’
그러면서 내가 볼 수 있는 곳의 2배 더 먼 곳까지도 자기 땅이라면서, 제 기를 팍 죽이더군요.
그래서 나는 그러냐고 참 대단하시다고 했죠.
그러다가 이 인간 코를 확 납작하게 할까 생각하며
‘주님 지혜를 주세요. 한 말씀만 좀 귀에다 던져주세요.’했습니다.
내 입에서 어떤 말이 탁 나오느냐?
‘회장님, 하늘을 보세요. 저 하늘에는 땅이 몇 평이나 있어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다가 얼굴이 새빨개집디다.
그러더니 죄송하다고 하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밥 먹으러 가자고 합디다.
그 부자는 과수원에 떨어진 사과만 찾아 먹는 돼지처럼 그런 부의 축복을 받고도
그 부의 축복을 주신 하느님을 쳐다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자기 말로는 성당도 몇 개 지었대요.
돈은 잘 내는 사람이니까 나도 초대했겠죠.
하지만, 저는 사람을 한 이삼십 분 대하면 그 사람의 인성이나 믿음의 깊이,
교만한 사람, 교만한 사람인데 무지 노력하는 사람인지 알아요.
사람을 분별할 수 있는 축복을 저한테 주셨어요.
목자가 양을 알아야 하잖아요.
병든 양인지, 건강한 양인지, 이리저리 날뛰는 양인지.
목자는 양을 치려면 그것을 알아야 해서 그런 축복을 주신 것 같아요.
그 부자는 하늘에 땅은 몇 평이나 있느냐 물었을 때 대답을 못 하고 얼굴만 붉혔어요.
수의에는 왜 주머니가 없는지 이 아주 간단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었죠.
그날 그는 점심 먹고 제게 차 한 잔 드시라고 하고, 빨리 편지 한 통을 써서 주었어요.
그 편지에 지금도 갖고 있는데, 너무 죄송하다고, 너무 교만하게 살았는데
저처럼 일침을 놔주는 사람은 처음 보았대요.
긴말도 아니고 긴 설교도 아닌 딱 한 마디, ‘저 하늘에는 얼마나 재산을 갖고 있는가?’
여러분들도 자꾸 하늘을 쳐다보세요.
하늘을 쳐다보시면서 그 축복 주시는 그분을 우리가 봐야죠.
내가 예를 하나 더 들어드릴까요. 이것도 내가 몇 번 얘기했죠.
구두쇠 할머니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어요.
정말 지독한 구두쇠 할머니여서 한 번도 무엇인가를 베푼 적이 없어요.
그래도 자기가 살았던 것을 생각 안 하고 꼴에 천당은 가고 싶은 것 아니에요?
하지만 판결은 지옥, 그곳으로 떨어지기 전 대기하는 시간에 수호천사가 왔어요.
우리에게는 누구나 수호천사가 있죠.
수호천사는 마음이 아파서 ‘할머니, 미안해요. 좀 베풀고 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하니,
할머니가 ‘천사님, 나 저 불붙는 지옥에 가기 싫은데 무슨 방법 없을까?’
하며 너무 애절하게 매달리니, 수호천사가 베드로 사도에게 상담했대요.
‘저도 책임이 있습니다. 저 할머니를 최소한 연옥에라도 끌어 올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습니까?’
베드로 사도가 그랬대요.
‘가서 물어봐. 아무리 구두쇠고 못되게 살았어도 한평생 누구한테 베푼 거 하나 있을 거 아니야?’
그래서 수호천사가 쫓아와서 ‘할머니, 누구에게 뭐 준거 없어요?’ 물었죠.
할머니도 막 머리를 짜내면서 생각했더니, 딱 하나가 있는 거야!
세상에! 생각해 보니 어느 날 파를 다듬고 있는데 거지가 밥을 달라고 온 적이 있어.
그때 이 할머니가 밥은 안 주고 썩은 파 하나를 내 던진 거야.
그래서 수호천사에게 파 준 적 있다고 했죠.
수호천사가 다시 베드로에게 가서 말하니, ‘그래 썩은 파라도 하나 줬으니까 올라와 봐.
지옥문 지키는 천사한테 얘기해놨어. 그 대신 일단은 지옥에 가서 한 달은 살아야 해.’라고 베드로가 말했죠.
그래서 일단 지옥으로 갔는데, 한 달 동안 얼마나 괴롭고 힘들겠어요.
이건 뭐 그냥 길이 아니라 쇠꼬챙이 위를 걸어 다녀야 해.
발등에는 바늘이 그냥 튀어나오고, 상상도 못 하는 고통이었죠.
이렇게 기다리다 한 달이 됐어요.
그런데 그냥 올려주는 게 아니었어요.
‘네가 베푼 것을 가지고 끌어 올려주겠다.’
그래서 수호천사가 엎드려 썩은 파를 지옥으로 내려뜨리며 ‘할머니 잡아, 잡아!’
할머니는 그 썩은 파를 꽉 잡고 있고, 수호천사는 버둥거리지 말라고 경고하죠.
그러면서 천사가 살살 끌어올리니, 세상에나.
지옥에 있는 다른 사람이 그 할머니 발을 붙들고 같이 가자고 하는 거야.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붙든 사람도 천사가 끌어 올렸을 텐데, 하지만 그 할머니 성질이 더럽잖아.
‘이놈의 인간, 왜 자꾸 들러붙어.’
그냥 발로 차고 버둥거리다가 파 뿌리가 뚝!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냥 지옥에 살고 있대요.
여러분들 이제껏 누구한테 베푼 것이 무엇이 있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일에 지옥으로 가라는 판결을 받았을 때, 나를 끌어 올려줄,
지옥에는 못 가게 내 벽이 되어 줄 것이 바로 베푸는 거예요. 이웃사랑.
자신 있으세요?
우리 모두 자신 없어요. 그리고 이 썩은 파 뿌리 할머니 얘기 들으니까 가슴이 뜨끔하잖아.
그냥 이제부터라도 베풀어요.
썩은 파 뿌리는 주지 말라 거예요.
즉, 나한테 남아도는 것 적선하듯 베풀지 말라는 뜻이에요.
이것이 썩은 파 뿌리의 의미입니다.
나한테도 꼭 필요하지만 포기하고, 나보다 더 필요한 다른 사람한테 줄 때 백 점짜리 자선이죠.
있으나 마나 한 것을 주는 것은 생색내는 겁니다.
내가 오늘 정말 먹으려고 준비해놓은 싱싱한 파 뿌리를 줍시다.
예수님은 물질적으로 차고 넘치도록 넉넉히 가진 사람과
또 그렇게 가지지 못한 사람 양쪽에게 다 하실 말씀이 있었어요.
오늘 복음에서는 어떤 사람한테 얘기한 겁니까?
차고 흘러넘치는 사람.
농사를 지었는데 너무 잘 돼서 지금 있는 창고 가지고는 안 돼.
그거 다 부수고 큰 창고 만들어 거기에 가득 곡식을 채워놓고 흐뭇한 거예요.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복음사가는 왜 그 말을 했을까요?
이 인생은 오늘 결론 나오잖아요.
‘어떻게 너는 너 자신에게 그렇게 관대하면서 나한테 인색하니?
은총이 떨어지는 나무는 보지 못하고, 네가 잘라서 이렇게 산다고 착각하느냐?’
소유물을 넉넉히 가진 사람에게는 부자의 비유를 통하여 경고하고 계시지요.
이 세상에 내 것은 없고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 한 분이라는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는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내 집, 내 차, 내 곡식.
이 부자는 건방지게 영혼까지도 자기 영혼이라 그래요.
새로 나온 복음서에서는 ‘영혼’이라는 것이 빠졌지만,
옛날 공동 번역에는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자기 영혼에게’ 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놈이죠.
어떻게 영혼이 자기 것이야?
‘나의’라고 하는 이 말을 많이 쓰는 사람일수록 크리스천이 아니에요.
‘나의’라고 하는 말이 입에 붙어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부자와 같습니다.
이런 대명사를 이기적인 대명사, 침략 대명사라고 저는 이름을 붙였어요.
저는 교우들을 만나서 영적 분별을 하는 첫 번째 기준 중 하나가,
종교인은 그리고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사람은 항상 이 이기적인 대명사를 꼭 앞에다 둬요.
‘신부님 제 자식이요, 우리 애예요.’
어떻게 자식이 자기 거야! 하느님이 부부 몸뚱아리만 빌린 거지.
어떻게 자기 재산이라 그래요.
솔직히 여러분들, 내 것이 어디 하나라도 있습니까?
나이 들면서 점점 그 생각 안 들어요?
내 것이 없구나.
손톱도 내 것이 아니고 머리카락도 내 것이 아니고.
대머리는 뭐 대머리 되고 싶어서 대머리 되겠어요.
머리 감을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카락 보면 얼마나 속이 이상해.
내 것 아니잖아, 내 것 아무것도 없어요.
자식이 여러분 것이면 여러분 마음대로 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내 것 아니에요.
몸뚱아리가 여러분 거예요. 아니잖아요.
여러분 것이면 왜 아파, 왜 암에 걸리고, 왜 뼈가 부러지고.
재물도 여러분 것 아니에요.
돈은 바닷물과 같아 마시면 마실수록 짜져요. 목이 타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참다운 신앙인은 모든 것을 ‘주님의 것입니다’, ‘성령님의 것입니다’, ‘성모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하는 말을 많이 써요.
눈 뜨면 오늘 하루도 주님의 날입니다.
물질의 축복을 받으면 이 물질도 주님의 것입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에게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은 죽을 때까지 나의 것의 일부를 헌금 내고 교무금 내고 감사 예물 낸대요.
다 자기 것이래요.
‘아, 신부님 그래도 내가 움직여서 어디 알바하고 직장 가서 번 돈인데, 내 돈이지 어떻게 하느님 겁니까?’
어리석은 인간이죠.
건강이 좋으니 움직여 취직도 하고 일하는 거지, 못 움직이면 어떻게 돈을 벌어요?
돈을 벌게 되는 과정, 움직일 수 있는 과정은 생각 안 하나?
‘내가 땀 흘려 번 돈인데 이게 왜 하느님 거야?’ 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하느님 못 찾아요.
땅에 떨어지면 그 사과만 주워 먹는 돼지처럼 사는 사람이에요.
절대 위를 안 쳐다봐요.
아까 말했듯 봉헌은 내 것의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하느님 것을 드리는 거예요.
그 때문에 우리는 봉헌하면서 유세 떨 필요도 없고 건방 떨 필요도 없죠.
늘 봉헌하면서도 ‘하느님 것 더 많이 드려야 되는데’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해요.
그래서 신앙인은 아침에 눈 뜨면 세 가지를 외쳐야 한다고 그랬어요.
첫 번째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두 번째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세 번째 나는 주님의 뜻대로 살렵니다.
아침에 눈 뜨면 군인들이 연병장에서 구호를 외치듯 우리 신앙인은 눈 뜨면 이것을 외쳐야 합니다.
사람이 없으면 크게 외쳐요.
식구들 많으면 속으로 외치든 화장실에서 외치든,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나는 주님의 뜻대로 살렵니다.’
이게 신앙의 3대 구호예요.
첫 번째가 뭐라고요?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내 돈도 주님의 것입니다. 내 육신도 주님의 것입니다.
내 자식도 주님의 것이오, 내 남편도 주님의 것이오,
‘내’ 다음 안에 다 들어가요.
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살아보니까 누군가를 섬길 때 행복합니까, 아니면 섬김을 받을 때 행복합니까?
다른 말로 봉사할 때 행복합니까, 봉사를 받을 때 행복합니까?
그래요.
주님의 종으로 살 때 행복하지, 주님을 종처럼 부릴 때 행복한 것이 아니에요.
세 번째는 뭐라고 그랬어요?
나는 주님의 뜻대로 살렵니다.
테살로니카 1서 5장 16~18절(공동번역).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였으니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보여준 하느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기뻐하는 것, 기도하는 것, 감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그거에요.
파푸아뉴기니에서 선교하는 신부님이 서울 어느 본당에서 선교 자금 강론을 하려고 미사를 하셨대요.
그리고 ‘이렇게 어렵습니다. 도와주세요.’ 하며 도움을 청했겠죠.
헌금 시간이 되었죠.
어른들은 ‘뭐 저 양반 하나만 도와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성당이 크니 너무 많이 찾아와. 거지들 같아.’
투덜대면서 마지못해 눈치 봐가면서 신립금도 대충 적었대요.
이렇게 어른들은 시큰둥한데 어느 소아마비 소녀가 신부님 강론을 듣고 너무 감동받은 거예요.
하지만 소녀에게는 헌금할 돈이 없는 거예요.
이 소녀는 정말 이방인들에게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가장 좋은 걸 정말 주고 싶은데 돈은 없고 어떻게?
그래서 자신이 가진 단 하나의 가장 소중한 물건을 주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자신의 몸이 의지하는 한 쌍의 목발을 헌금통 앞에까지 가서 헌금대 위에 올려놨어요.
그리고 그냥 제자리에 주저앉았어요.
선교사 신부님은 소녀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했죠.
그래서 그 목발을 높이 쳐들고 소녀의 마음을 설명해주면서
‘여러분들, 이 소녀에게 목발을 사서 되돌려줍시다.’
순식간에 많은 선교 자금이 다 모인 거예요.
신부님은 그 목발을 다시 소녀의 양 겨드랑이에 끼워주면서 강복 주었대요.
소녀에게 목발은 없으면 걷지를 못하는 소중한 것인데,
한쪽도 아니고 양쪽을 모두 헌금통에 올려놓은 거예요.
그 마음이 이해하시죠?
이 소녀의 온전한 봉헌으로, 사람들은 신립 종이 다시 쓰고, 어마어마한 돈이 모였대요.
자기의 가장 귀중한 것을 선물하는 것이 봉헌입니다.
천주교 신자 중에 특별하게 부자가 없는 이유를 아세요?
하느님에게 인색하기 때문에 그래요.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에게 ‘드릴까 말까~, 줄까 말까~’ 하다가 못 받아요.
개신교 신자들은 팍팍 주거든요.
오늘 번 것, 십 분의 일 딱 떼어 놓죠.
‘이건 애초부터 하느님의 돈이야, 내 돈 아니야. 이거 손대면 나 도둑놈이야.’
예배 때도 보면 은행에 가서 새 돈으로 바꿔서 깨끗한 봉투에 넣어 봉헌하죠.
십일조 할 때마다 망한다면 개신교 신자들이 왜 하겠어요?
십일조 할 때마다 그것보다 10배를 더 받거든.
그런 봉헌에 관한 체험을 하니 신앙이 된 거예요.
그런데 천주교 신자들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처럼 하느님에게 인색해요.
그래서 ‘드릴까 말까 신자’들이야. 하느님은 줄까 말까 고민만 하다 못 줘요.
오늘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이와 같이 될 것이니라.’
또, ‘사람이 제아무리 부유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하십니다.
여러분들 과수원의 돼지 이야기 머리에 새기세요.
먹기만 하지 그 사과가 떨어진 나무는 한 번도 안 쳐다봤다는 이야기요.
이천 년 전 돼지도 그렇고 지금 돼지도 똑같아요.
여러분들은 세례받기 전에 그랬다면은 세례받고 난 후에는 쳐다봐야죠
축복 주신 그분 쳐다보고 감사해야죠. 그리고 겸손해야죠.
여러분들 앞으로 사랑의 대명사를 많이 씁시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나는 주님의 뜻대로 살렵니다.’
하루에 이 세 가지의 신앙 구호를, 심란하고 욕심이 찾아올 때, 두려움이 올 때,
세상 걱정이 나를 사로잡을 때 자주 외치세요.
저는 사제로 살면서도 어떨 때는 하루에 여러 번 외칠 때가 많아요.
‘김 신부는 주님의 것입니다. 이 김 신부요, 주님의 종인 거 아시죠? 김 신부 주님의 뜻대로 살게 도와주세요.’
이 세 개만 붙들고 살면 우리 돼지처럼 안 살아요.
하늘 쳐다보세요.
텍사스의 부자는 지평선 두 배가 되는 땅을 갖고 있어도 하늘을 쳐다본 적이 없어요.
저 위에는 못 쌓는지 자기는 하나도 쌓은 것이 없대요.
지금은 열심히 해요.
봉사도 많이 하고, 그전에 돈으로 생색냈지만 이젠 몸으로 해요.
그리고 재산을 자식들한테 안 주고 정말 가난한 곳에 분배 다 했어.
오늘 강론은 피정입니다.
제가 피정을 자주 못 나가기 때문에 주일미사를 통해서라도 전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 유튜브를 통해 강론을 듣는 여러분들
모두 하느님이 선택해서 오신 분이라는 것, 또 기도하면 언젠가 불러주실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해서 사랑합니다.
♣2022년 연중 제18주일 (7/31)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