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다, 담다
박 은 주
‘아, 또 막힌다. 길 찾기가 막막하다.’ 이럴 때는 주방으로 가는 게 상책이다. 나물을 데쳐 무치고 멸치를 볶는다. 한 시간도 채 안 돼 저녁 식탁에 오를 반찬 두 가지가 뚝딱 만들어졌다. 두어 시간 끙끙대도 별 소득 없던 글쓰기에 비해 얼마나 효율적인가. 글쓰기도 이렇게 시간에 비례한 결과물을 딱 내놓으면 좋으련만.
노트북 앞에 앉아 끙끙대는 나를 보며 남편이 빙긋 웃으며 놀려댄다. “아이고, 쌀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그러니 너무 힘들이지 말고 하라? 해석은 자유, 내 방식대로 알아들었다. 그다음부턴 묘하게도 글이 술술 잘 풀려나간다. ‘그렇지. 뭘 바라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그냥 하는 거잖아.’
화분에 일주일마다 물 주며 식물을 가꾸듯 성실한 글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앗, 이거다! 반짝 떠오는 영감을 줄기차게 붙잡고 단번에 글을 완성해 내는 재주나 근성이 내게는 없다. 게다가 은빛 비늘 반짝이는 활어 같던 생각들은 막상 책상 앞에서 글자로 옮기려면 어느새 소금에 절인 듯 도통 생기라곤 없다. 언제라도 생생히 남아 있을 것 같던 글의 모티브마저 아차, 시간을 놓쳐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린 때는 또 몇 번이던가?
그럴 때마다 스멀스멀 피어나는 글쓰기의 비효율성과 무용성, 그 무정함에 힘이 빠지고 헤어질 결심마저 든다. 그렇다. 글쓰기는 애태우고 간혹 내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성격 까탈스러운 애인을 똑 닮았다. 그런데도 이미 마음을 빼앗겨버려 돌아설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글쓰기는 효율적이지 않고 소용없는 행위이기만 한 걸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정리되지 못한 뒤엉킨 생각의 미로에서 이리저리 헤매는 글쓰기 초보자가 들인 시간만큼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여곡절 과정을 거쳐 마침내 글 한 편을 앞에 두었을 때의 기쁨을 어디에다 비할까. 마음 밑바닥에서 샘솟는 ‘소용없음의 소용 있음’의 극치! 그 순간의 희열과 뿌듯함은 길고 아득했던 그동안의 수고로움을 단번에 제압한다. 그날 밤은 어둠조차 포근하고 잠은 꿀잠이다.
그렇다면 도중에 멈추거나 끝맺지 못한 글은 허사로만 남게 된 것일까? 그것 또한 아니었다. 글쓰기의 여정에서는 쓰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글을 쓰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뜻밖의 만남이 언제나 나를 기다렸다. 기억 속 소중한 사람과 사물, 자연을 불러내고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내 손을 잡아 이끄는 다정한 만남이 있다. 아쉬움이든 그리움이든, 유정有情한 그 순간들이 무용한 시간으로 남을 리는 없을 테다.
글을 쓰며 생각을 궁굴리다 얻는 또 다른 덤은 예사롭게 스쳐 지나친 말이 새삼스레 다가온다는 것이다. ‘짓다’와 ‘담다’, 두 동사가 이번에는 그랬다. ‘어떤 재료로 만든다.’ 그리고 ‘그 내용물을 포함한다.’는 뜻의 이 말들이 음식과 글에 두루 쓰인다는 점이 새삼 신기했다. 그러고 보면 음식이 몸을 살찌우는 양식이듯, 글이 마음의 양식이 될 때가 있다. 삶의 허기를 채워 다시금 잘 살아가도록 내게 힘을 주는 것이 글쓰기가 아닌가? 아, 글은 정말 쌀이 되고 밥이 되기도 하는구나!
대체 나는 무엇을 담은, 어떤 글을 짓고 싶은 것일까? ‘짓다’는 단지 ‘만든다’는 한 동작만을 담고 있지 않다. 밥을 지으려면 여러 번 씻고 헹군 쌀을 솥에다 안쳐 김이 나고 뜸이 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글 또한 정성과 시간이 쌓이고 쌓인 후에 비로소 지어지는 것이리라.
머릿수건을 쓴 채, 쌀을 씻어 조리로 티를 걷어내고 아궁이 불 앞에서 매운 눈물을 흘려가며 어머니가 지어주신 더운밥 한 그릇, 식구들의 밥상 위에 올리셨던 그 밥처럼 허기진 배를 든든히 채워 접힌 허리를 펴게 하는 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글을 나도 짓고 싶다.
기쁨, 슬픔, 그리움 같은 삶의 질료에다 오롯이 진심을 담은 글이라야 하리라. 그래서 누군가의 마음에 가 담겨 조그만 힘, 따뜻한 온기를 서로 나눌 수만 있다면…….
흘러가는 시간과 계절 따라, 때로는 지난여름 애호박과 가지나물처럼 부드럽고 질리지 않는 담박한 맛을, 또 다른 어느 때는 늦가을 무처럼 웅숭깊은 맛을, 내 글 속에 담아낼 수만 있다면…….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봄이 이제 드디어 왔나 보다. 봄빛이 완연한 날, 수필교실 선생님이 보내신 봄 편지가 도착했다. 아슴아슴한 분홍빛 봄꽃을 찍은 사진을 담아 상반기 수필 창작반 개강을 알리신다.
올해는 누가 또 어떤 맛을 담은 어떤 글을 지어낼까? 글쓰기의 두레상에 오순도순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울 날들을 눈앞에 그린다. 우리가 지은 글 밥에선 온정溫情이 폴폴 피어나고 제각각 담아낸 상큼하고, 짭짤하고, 매콤하고, 그리운 맛에 함께 울고 웃겠지. 마음을 더불어 나눌 봄날을 손꼽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