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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2025년 2월 2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발표한 내용 전문이다.
아래의 가계도는 각 가문의 대종회 족보를 직접 조사한 것이다.
조선의 8대 명당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새로운 대안 제시
요약
조선시대 8대 명당으로 불리는 묘들은 가문이 번성했고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후손의 발응이 그들 묘의 영향이라 특정할 만한 지리적 조건이 부족했다. 이런 오류가 발생하는 것은 귀납적 접근에 의존하면서 음택의 분석에 대한 명확한 원칙과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택풍수 이론의 체계에 맞게 언제 어디서나 일관된 원칙과 기준에 의해 산을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술적인 이론 체계 확립과 부단한 현장학습이 병행되어야 한다.
서론
현대에 들어 풍수가 다변화하고 있다. 과거의 풍수가 묘지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면 요즘의 풍수는 산 사람을 위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구체적으로 건축, 토목, 도시설계, 부동산, 조경, 환경, 실내인테리어 등으로 풍수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이는 바람직한 현상인데, 풍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타파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의 가장 기초 단위인 음택에 대한 체계적인 학습을 게을리 할 수 없다. 가장 작은 것을 모르면서 큰 것을 도모한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택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주택과 마을, 도시를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음택풍수가 크게 성행했다. 효를 강조하는 유교사상과 탈신공개천명(奪神功改天命)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풍수가 습합되면서 명당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크게 번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익부빈익빈 현상으로 양반 사대부가들 중심으로 확산되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추후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조선시대 8대 명당으로 불리는 묘들은 후손이 번성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귀납적 결과에만 집착하다 보니 정작 음택풍수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龍·穴·砂·水에 대한 논리적 근거는 부족한 면이 있다. 최근에는 8대 명당에 대한 전언을 비판 없이 수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심한 비판에 직면하기 때문에 학인들 입장에서는 소신 있는 의견을 피력하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그로 인한 잘못된 정보는 또 다른 오류를 범하면서 풍수계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런 점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묘터의 분석에 학문적 근거를 바탕으로 일관된 원칙과 명확한 기준이 제시되어야 한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의 8대 명당으로 불리는 묘들에 대해 음택에서 가장 중요한 龍·穴·砂·水 분석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음택풍수의 기준에 부합되는 새로운 묘를 대안으로 제시하여 올바른 가치관 정립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2. 조선의 8대 명당에 대한 용·혈·사·수 분석
8대 명당은 언제 누가 분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구전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광산김씨 김극뉴 묘, 안동김씨 김번 묘, 청풍김씨 권씨할머니 묘, 반남박씨 시조 박응주 묘, 평산신씨 신숭겸 묘, 동래정씨 정사 묘, 청주한씨 시조 한란 묘 등이 그것이다. 이상 7곳은 대체로 많은 풍수가들이 거론하는 곳으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편이다. 나머지 한 곳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청풍김씨 시조 김대유, 달성서씨 서성, 광주이씨 시조 이당, 덕수이씨 이섭, 진성이씨 이정, 동래정씨 시조 정문도 묘 등이다.
이들 묘의 공통점은 묘 이후 많은 인재를 배출했으며, 가문이 크게 번성했다는 것이다. 다만 후손의 영달과 가문의 번성이 그들 묘의 영향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다. 음택의 동기감응이 수학 공식처럼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택에 관한 평가는 주산론, 용론, 혈상론, 사격론, 수세론, 좌향론 등을 바르게 대입하는 것이 최선이다.
1) 광산김씨 김극뉴 묘
◉위치 :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 산 36
이곳은 묘터가 위풍당당하고 전면의 조망 또한 뛰어나 말명당으로 불린다. 이 묘의 고손 대에서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이 문묘에 배향되고 이후로도 7명의 대제학을 배출하면서 명문가의 기틀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음택에서 가장 중요한 용맥의 변화가 없을 뿐 아니라 혈상도 모호하게 이루어지면서 기맥이 응축된 현상이 없다. 음택의 혈을 맺기 위해서는 용맥의 상태가 절대적이지만, 이곳은 그 점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묘 이후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것은 맞지만, 이 묘의 영향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2) 안동김씨 김번(金璠) 묘
◉위치 :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
新안동김씨를 가리켜 금관자(金貫子)가 서말이라고 큰 벼슬을 많이 했다는 비유로 삼는다. 특히 김극효 아들 대에서 상용·상헌 형제가 정승이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김상헌 후손에서는 父子 영의정, 兄弟 영의정, 父子 대제학 등 12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 수십 명의 판서가 나왔고 김상용 후손에서도 정승 판서가 많이 배출되었다. 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 김옥균, 김좌진, 김두한 등도 新안동김씨이다.
신안동김씨 문중에서도 ‘김번’ 묘가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으로 조선의 8대 명당 중 한 곳이라 하여 풍수인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옥호저수란 묘가 위치한 지형이 호리병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물형이다. 이 묘 이후 조선 후기에 임금의 권력을 능가하는 세도정치를 누렸다고 말하지만, 반면에 혹평을 하는 풍수도 적지 않으면서 극단적으로 평가가 갈리는 곳이다.
이곳 묘의 가장 큰 문제는 묘 뒤에 현무정(玄武頂)이 없다는 것이다. 현무정은 주산에서 이어진 용세를 수습해 기맥을 저장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원만한 봉우리를 형성해야 한다. 또 주산에서 이어진 산줄기가 과협을 지나 90도로 방향을 바꾸는 횡룡이지만, 그 지점에 방향을 바꿀 때 필요한 봉우리가 없을 뿐 아니라 귀성(鬼星)도 없다. 그런 관계로 묘가 자리한 지점은 아무런 혈상을 이루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 용맥이 계속 진행하는 과룡(過龍)이 되었는데, 혈은 기맥이 멈춘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기본적인 원칙이다. 혹자는 이곳을 괴혈이라 하는데, 제 아무리 괴혈일지라도 용맥의 상태가 합당해야 한다. 이곳 묘역에서는 ‘김번’의 아들 김생해 묘가 주산 이하 용맥과 혈상 등이 잘 이루어졌다.
3) 청풍김씨 김인백 처 안동권씨 묘
◉위치 :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산 31
청풍김씨는 조선 후기에 정승 8명, 대제학 3명, 왕비 2명이 나왔으며, 3대정승과 父子 영의정을 배출했다. 역사상 3대정승을 낸 집안은 청송심씨. 달성서씨 등 세 집안 뿐으로 청풍김문의 큰 자랑이다.
의왕시청 옆에 자리한 묘는 김인백의 처 안동권씨 묘이다. 이곳은 앞쪽의 오봉산을 바라보면서 숱한 전설과 함께 와혈의 교과서라고 극찬한다. 풍수인들 뿐 아니라 청풍김씨들 또한 이곳이 명당이어서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고 한다.
이곳 묘는 제비집과 같은 와혈(窩穴)이며, 횡룡으로 혈을 맺은 곳이라 한다. 그러나 묘 뒤편에 최소한의 봉우리가 없어 용맥 또한 없다. 단순히 오봉산을 바라보면서 산 능선 옆구리에 묘를 썼을 뿐이다. 묘역의 정갈한 모습과 전설에 선입견을 가지면서 논리적 평가는 도외시하고 있다. 혹자는 묘 뒤편에 작은 암석이 있는데, 그것을 귀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암석은 뜬 돌에 지나지 않는다. 암석은 땅속에 깊이 뿌리를 박은 형태가 되어야 의미가 있는 법이다. 선입견 때문에 무의미한 것까지 확대해석하면서 견강부회하는 면이 있다.
4) 반남박씨 시조 박응주 묘
◉위치 : 전남 나주시 반남면 흥덕리 산 2-6
반남박씨는 조선시대에 왕후 2명, 대제학 2명, 정승 7명, 문과 급제자 215명을 배출하였다. 이곳은 땅을 팔 때 큰 벌이 나와 지관에게 달려들어 쏘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런 사연으로 이곳 묘는 벌 명당으로 불리게 되며, 후손들은 지관이 벌에 쏘여 죽은 고개에 봉현(蜂峴)이라는 표지석을 세워 그의 넋을 달래주었다고 한다.
박응주 묘는 나지막한 야산에 위치했으며,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조 묘가 그렇듯 이곳도 풍수적 환경은 양호하지 못하다. 무엇보다 묘까지 도달하는 용맥이 넓게 퍼졌으며, 생동감이 없다는 점이다. 또 묘 주변에 박힌 강한 암석은 땅속의 상태를 짐작케 한다. 이 말은 박환(剝換)이 이루어지지 못해 땅이 거칠다는 뜻인데, 기맥이 응축된 혈은 박환 과정을 통해 기운이 순화되는 법이다.
특히 안산이 없어 물이 길게 빠져나가고 그로 인해 바람에 속수무책이라는 것은 큰 취약점이다. 가문에서는 이점이 우려되어서 전면에 저수지를 조성했으나 그런다고 바람까지 막을 수는 없다. 우측 봉현 고갯마루에서도 묘를 향해 바람이 불면서 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장풍득수를 이루지 못했다.
직계후손을 보면 명당의 발응이라 보기에는 특별한 인물이 없다. 풍수의 동기감응은 묘의 직계후손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명당으로 불리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벼슬과 명성이 명당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분사회에서는 어느 정도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5) 평산신씨 신숭겸 묘
◉위치 : 춘천시 서면 방동리 821
신숭겸은 고려를 개국한 왕건을 도와 대구 팔공산에서 전투를 하다 전사한다. 이때 견훤의 군사들이 그의 목을 전리품으로 베어가자 왕건이 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장사를 지내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신숭겸장군 묘의 봉분이 세 개인 것은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곳 묘의 가장 큰 문제는 묘까지 이어지는 뒤편의 봉우리가 흉하게 갈라졌다는 점이다. 혈을 맺는 봉우리는 수려하고 원만해야 하지만, 이곳은 흉하고 추한 모습이다. 그런 까닭에 묘 뒤편의 산줄기에 험한 바위가 많을 뿐 아니라 급한 경사를 이루어 불안한 상태다. 혈은 유기체와 같아 안정되고 편안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더욱이 묘역 아래까지 산줄기가 길게 늘어지면서 어떠한 혈증도 없다. 이곳 역시 성역화된 조경과 뛰어난 조망 때문에 냉철한 평가를 못하고 있는데, 용과 혈이 우선이며, 사격과 물길은 다음이라 했다.
6) 덕수이씨 이섭 묘
◉위치 :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 산 9-1, 백아곡
이섭은 택당 이식 조부이다. 이곳 묘는 조선중기 때부터 당대의 많은 풍수가들이 길지라 말하고 있으며, 후대인들 또한 많은 일화를 남긴 택당의 조부 묘로 인해 덕수이씨가 3정승 6판서를 배출했다고 한다.
택당 이식은 부친 이안성이 1613년 작고하자 백아곡에 묘를 쓰고, 다시 조부 묘를 이장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풍수가로 이름을 떨치던 이의신, 박상의, 오세준, 두사충을 초빙해 감정을 받는다. 그들은 당시 왕실에서 활동하던 지관들인데, 부친 이안성 묘 옆이 야자형(也字形)의 길지라고 극찬을 한다. 그리하여 택당은 그 터에 조부 묘를 1615년 이장한다. 하지만 그곳은 용맥이 아닌 지각이고 혈은 반드시 용맥에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지각은 용맥이 변화할 때 균형을 잡아주는 보조적인 역할인데, 왕실의 풍수가들이 용과 지각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시대건 풍수의 진위 논쟁은 끊임이 없었지만, 조선의 풍수에서 손꼽히는 인물들 안목이기에 실망과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이런 상태라면 조선왕릉 또한 온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7) 동래정씨 정사 묘
◉위치 :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 산 38
이곳에 대한 평가를 보면 조선8대명당, 영남 최고의 명당, 와혈(窩穴) 또는 옥녀단좌형이라 부른다. 이곳 역시 후손 중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는 5명의 아들을 두는데, 그중에서도 셋째 아들 정난종 후손이 특히 번성했다.
그러나 묘 뒤편의 용세가 곳곳에 골이 지고 파여져 험한 상태다. 음택풍수에서는 용맥의 상태가 최우선인데, 이점을 간과하고 있다. 또 혈을 맺는 곳은 용맥선상에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이곳 묘는 용맥을 벗어난 오목한 지점에 자리했으니 가장 기본적인 것을 도외시하고 있다.
후손들이 번성했다 하여 귀납적으로 평가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만약 이곳이 좋은 묘터라면 여러 아들에게 고루 영향이 미쳐야 하지만, 특정한 후손에게만 발응이 있다는 것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8) 청주한씨 시조 한란 묘
◉위치 :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가산리 산 18
이곳 묘의 가장 큰 특징은 묘 앞이 솟아 작은 봉우리가 있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기룡혈(騎龍穴)이라 부른다. 기룡이란 용맥이 계속 진행하는 행룡(行龍), 과룡(過龍)을 말한다. 하지만 혈을 맺으려면 기맥이 멈추어서 응축된 현상이 있어야 한다. 묘 뒤편의 용맥 또한 넓게 퍼져서 무기력한 상태인데, 좋은 용맥은 중심점이 뚜렷하고 활발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간과하고 있다. 한편 묘소 앞에는 작은 샘물이 있다. 이것을 명혈에만 있는 진응수(眞應水)라 하지만, 이 또한 견강부회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 보았듯이 조선의 8대 명당으로 불린 곳은 대체로 시조 묘가 많았다. 이들 가문은 조선시대 많은 인재를 배출했으며, 전면의 조망이 화려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보면 이들 묘가 명혈이라 하기에는 음택풍수 이론에 위배되는 곳이 많았다. 그런데도 명당으로 불리는 것은 각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자 과장된 면이 있는데, 후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학인의 입장에서는 이들 묘가 명당이라는 인식하에 시작하다 보면 잘못된 정보로 인해 첫 단추를 잘못 꾀면서 그릇된 가치관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음택풍수에서는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한 체 학문적 논거하에 원칙과 기준에 충실하며 터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
3. 새로운 대안 제시
풍수에서 혈은 산의 꽃이며 나무의 열매에 비유한다. 명당의 혈은 산천정기가 특정한 지점에 뭉친 곳으로 산 중에서 가장 따뜻하고 건강한 지점을 말한다. 이때 나무의 열매가 가지 끝에 맺히듯 산의 혈 또한 산줄기 끝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터에 조상의 묘를 쓰면 후손이 번창하고 훌륭한 인물이 나지만, 좋지 못한 곳에 묘를 쓰면 가문이 쇠퇴하고 몰락하게 된다. 이를 동기감응이라 하며 풍수가 2천년간 유지되어온 핵심 키워드이다.
앞에서 음택풍수를 판단할 때 원칙과 기준이 없어 즉흥적인 면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논자가 제시하는 기본적인 원칙과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산이 단정하고 반듯해야 한다. 특히 묘 뒤편의 최종적인 봉우리가 원만해야 한다. 만약 주산이 멀면 과협을 만들어 새로운 봉우리(현무정)를 형성해야 한다. 음·양택을 막론하고 풍수에서 주산은 뿌리에 해당되는데, 뿌리가 튼튼해야 줄기와 열매가 건강한 법이다.
둘째, 용세는 상하좌우 흐름이 역동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이때 용맥은 균형감 있고 후부(厚富)한 모습이 되어야 한다. 만약 편룡이 되거나 야윈 상태가 되면 부실한 것이니 건강한 기맥을 품은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용맥은 임산부의 탯줄 혹은 인체의 혈관에 비유한다.
셋째,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기맥이 농축된 모습으로 평탄하면서도 봉긋한 혈상을 이루어야 한다. 입수꼭짓점과 전순을 연결했을 때 당판의 좌우가 균등해야 하며, 좌향의 초점이 뚜렷해야 한다. 좌향의 초점은 기맥이 당판을 지났다는 근거가 된다.
넷째, 주변 사격이 장풍득수 조건을 이루면서 유정해야 한다.
다섯째, 朝·案山이 혈과 비례해 수려한 모습이 되어야 한다.
음택 명혈은 이와 같은 조건을 충족하면서 가문이 번성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이어야 한다. 이에 준하여 다음과 같은 묘를 제시한다.
1) 진주강씨 강회백 묘
◉위치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내리 699
주산에서부터 이어진 산줄기가 상하좌우 변화를 일으키다가 마지막 순간 솟구치는 모습으로 경쾌하면서도 박진감이 있다. 묘는 작은 봉우리 정상에 유두와 같은 모습으로 쓰여 있어 돌혈로 분류한다. 묘 앞에는 넓은 논밭과 함께 수구처(水口處)가 잘 교쇄되었다. 문중에서는 이곳을 연꽃이 물에 떠있는 형상이라 해서 연화부수형으로 부른다. 묘의 후손 중 손자 대에서 강맹경, 강희맹, 강희안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진주강씨는 조선의 명문가로 자리 잡게 된다.
2) 광산김씨 김반 묘
◉위치 : 대전시 유성구 전민동 산 18-17
주산 이하 용맥의 상태가 양호하며, 과협처가 잘 이루어졌다. 그리고 산 끝에 이르러 차분히 멈추었다. 묘를 중심으로 청룡·백호가 유정하게 감싸주었고 조망도 탁월하다. 광산김씨는 특히 김반·김익겸 후손이 뛰어난데, 3대 대제학과 7명의 대제학을 배출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전사한 아들 김익겸(23세) 묘가 위에 있으며, 아래에 김반 묘가 자리하고 있다. 혈처에 자리한 두 묘가 시너지 효과를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3) 안동김씨 김생해 묘
◉위치 :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
앞장에서 거론한 김번 묘와 같은 묘역에 자리하고 있다. 옥호저수로 불리는 김번 묘는 뒤편의 봉우리가 혈을 맺을 만한 역량이 없을 뿐 아니라 용맥도 계속 진행하면서 멈추지 못했기 때문에 지리적 조건이 크게 부족한 곳이다.
반면에 김생해 묘는 주산에서부터 과협처를 지나 석맥으로 중심맥을 이루면서 차분히 멈추었다. 전면에는 문필봉과 안산이 조응하면서 사격도 뛰어나다.
특이한 점은 김생해 묘 용맥이 석맥으로 강한 기운인데, 이 묘의 손자인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7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에서 항전 중 성이 함락되자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장렬하게 자결한다. 동생 김상헌 또한 대표적인 척화파로 6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서도 절의를 굽히지 않았다고 하니 두 분 모두 강직한 성품이다. 동기감응 논리로 보면 이들의 성품이 강한 석맥으로 이루어진 김생해 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울산김씨 김요협 묘
◉위치 :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산 77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 조부 묘다. 선운산(336m) 밑에 자리한 묘는 꿩이 엎드린 형국이라 해서 복치형(伏雉形)으로 불린다. 맵시 있는 산줄기 끝에 커다란 열매를 맺은 듯한 형상이며, 빼어난 앞산의 봉우리가 구슬처럼 이어지고 있다. 손자 대에서 인촌은 고려대학교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으며,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김연수는 삼양그룹을 창업했고 증손자가 국무총리를 지낸 김상협이다.
5) 청풍김씨 김징 묘
◉위치 :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산 27
깊은 산중에 제비집과 같이 둥그렇게 둘러싸인 와혈이 되었다. 특히 우백호가 가까이서 감싸주었다. 묘는 열매처럼 이루어진 결정체 위에 말을 타듯 당당하게 자리했으며, 당판 밑 전순부분이 온전하게 보전된 상태다.
이 묘의 후손 중 손자 대에서 김재로·김치인 부자가 영의정에 오르는 등 6명의 정승이 배출되어 가문의 최고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6) 여흥민씨 민기 묘
◉위치 : 충북 제천시 백운면 도곡리 산 25-1
묘까지 이르는 용세가 역동적이며, 산 끝에 이르러 멈추었다. 묘를 중심으로 좌·우측 능선이 감싸고 있으며, 특히 전면의 문필봉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진혈은 수려한 봉우리와 마주하며 이루어지는 법이니 유유상종이다.
이 묘 이후 9대 연속 문과급제와 3대 장원을 배출하였다. 특히 증손 대에서는 숙종비 인현왕후와 구한말의 명성황후, 순종효황후, 민영익, 민영환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인재를 배출하면서 구한말 최고의 명문가를 이루었다.
7) 연안이씨 이석형 묘
◉위치 :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산 3
이곳은 포은 정몽주 묘와 나란히 있다. 이석형은 정몽주의 증손녀 사위인데, 부인이 일찍 죽자 포은선생 옆에 묘를 쓰고 후일 이석형과 합장한다. 두 묘가 여인의 젖가슴처럼 나란히 있어 쌍유혈(雙乳穴)로 불린다. 그러나 풍수인들 간에 두 묘에 대한 평가가 상반되기도 한다.
주산에서 과협을 지난 용맥은 두 줄기로 나누어지는데, 한 줄기는 정몽주 묘로 이어지고 다른 한줄기는 이석형 묘로 연결된다. 용맥이 나누어질 때는 반드시 정룡(正龍)과 방룡(傍龍)으로 구분되고 혈은 정룡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정룡과 방룡을 구분하는 방법은 정룡은 용맥이 후부하고 변화가 있지만, 방룡은 변화가 없어 밋밋한 것이다. 이곳은 정몽주 묘 뒤편의 용맥이 직룡으로 변화가 없기 때문에 방룡이고 이석형 묘 뒤편은 기복변화를 하면서 좌우로 지각을 형성했기 때문에 정룡이 된다.
이석형 직계후손에서는 부원군3, 정승8, 대제학6, 판서42, 공신4, 청백리2, 문과급제자 120명을 배출했다. 특히 고손 때에 이르러 대제학 월사 이정구와 이귀(李龜) 등을 배출하면서 연안이씨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묘 하나의 후손 중에서 이토록 많은 인재가 나기는 드문 일로서 명혈의 소응을 말해주는 대표적 사례다. 특히 손자 대에서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장수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광산김씨는 김반 자손에서만 3대 대제학과 7명의 대제학을 배출했는데, 연안이씨에서는 이석형 후손에서만 3대 대제학과 6명의 대제학을 배출했다.
8) 장수황씨 황균비 묘
◉위치 : 전남 남원군 대강면 풍산리 산 4, 북서향
단군 이래 최고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황희 정승은 이곳에 묘를 쓴 이후 태어나며, 100년 넘게 많은 인재를 배출한다. 특히 황희·황수신 부자가 영의정에 오르면서 장수황씨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 묘 후손 중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자 다른 성씨가 황균비 묘 봉분을 없애고 자신들 묘를 쓰기도 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 치열한 산송(山訟)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뚝한 주산으로부터 이어진 산줄기는 기복변화를 거치면서 묘까지 이어진다. 그런 까닭에 족보에서는 관주형(貫珠形)이라 기술하고 있다. 관주형이란 용맥이 구슬을 꿴 것 같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수려한 봉우리를 바라보며 좌선룡(左旋龍)으로 방향을 틀면서 자리하였다. 다만 현재의 묘는 당판 중심에서 치우쳐 있는데, 오랜 세월 산송을 거치면서 봉분이 틀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점은 주변은 온통 험한 암석으로 이루어졌으나 묘를 쓴 지점만 흙으로 이루어졌다.
그 외에도 광산김씨 김호, 반남박씨 박소, 덕수이씨 이안성, 동래정씨 정난종 묘 등도 용·혈·사·수의 조건을 갖추었으며, 후손 중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기존의 8대 명당과 비교했을 때 광산김씨는 김극뉴 묘 보다 그의 손자 김호 묘와 5대손 김반 묘가 뛰어났다. 좋은 묘터가 연속되면서 시너지 효과가 배가된 것으로 보인다. 안동김씨는 김번 묘에 비해 그의 아들 김생해 묘를 제시했고, 청풍김씨는 권씨할머니 손자 김징 묘가 지리적 조건이 뛰어난 곳이다. 반남박씨는 시조 묘 보다 박소 묘, 덕수이씨는 이섭 묘 보다 그의 아들 이안성 묘, 동래정씨는 정사 묘가 아닌 아들 정난종 묘가 우월하게 좋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4. 맺음말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의 8대 명당으로 불리는 곳은 음택풍수에서 요구하는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지 못한 곳이 많았다. 이들 묘는 가문이 크게 번성했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후대의 발응이 그 묘의 영향이라 특정할만한 지리적 조건이 부족했다. 오히려 허명(虛名)뿐인 8대 명당보다 후손의 묘가 풍수지리적 조건이 뛰어난 것을 볼 수 있다. 풍수학인들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학문적 논거를 바탕으로 냉철한 분석이 필요한데, 그릇된 정보는 미망(迷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수고전을 통한 학문적 접근과 부단한 현장 답사가 병행되어야 한다. 특히 주산과 용세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으므로 기본과 기초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대안으로 제시한 묘들은 음택풍수에서 요구하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명문가의 기틀을 마련한 곳이다. 주산은 우뚝하면서 단정하고 용맥은 역동적인 변화와 함께 질서가 있다. 그리고 산 끝에 이르러 차분히 멈추면서 열매와 같은 형상이다. 또 전면의 수려한 봉우리와 마주하는 경향이 있으며, 전체적인 포스가 당당한 모습이다. 이들 묘의 공통점을 숙지하면 좀 더 쉽게 음택풍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 묘는 오랜 세월 후손에게 영향을 주면서 뛰어난 인재를 배출함을 볼 수 있는데, 인재양성 측면에서 음택의 명혈을 보호하고 보존하며, 또 개척되어야 한다. 인재는 곧 국가경쟁력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음택풍수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노력,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참고문헌
김동규譯,『人子須知』, 명문당, 1992.
김현회,「澤堂 李植의 風水觀과 葬墓法에 관한 硏究」, 대구한의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7.
지영학,「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음택풍수 입지 특징 연구」-광산김씨 가문을 중심으로-,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8.
지종학,『풍수지리 형세론』, 다사랑, 2010.
,「풍수지리 이론의 유형별 비교 분석」, 한국사진지리학회지 제29권 1호, 2019..
최창조譯,『청오경·금낭경』, 민음사, 1993.
한국고전번역원,『澤堂集』
徐善繼·徐善述著,『地理人子須知』, 臺灣 竹林印書局, 中華民國七八年
첫댓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글을 읽는 영광을 가지게 됩니다. 교수님의 넓으신 헤안과 풍수적 사고에 존경을 표합니다. 풍수를 공부하는 학인으로써 조선팔대명당에 대하여 들어보기도 했고 관심도 있기에 의문점에 대하여 질문드려 봅니다. 우선 대표적인 예로 청풍김씨 김징 묘소에 대하여 질문드려 봅니다.
1. 현무정이 있는가?
관찰사 김징 묘소가 좋은 자리라 하시니 질문드립니다. 그 묘소에서 제대로 된 현무정이 있는지요?
2. 와혈로 봄이 마땅한가?
교수님께서는 김징 묘소를 와중미유에 해당하는 혈상으로 보시는 것 같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빈약하긴 하지만 유혈로 짐작케 하는 모양의 용이 길게 나온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더해 와혈로 본다면 당판이 너무 기울어 와혈의 특징인 횡대는 커녕 기운이 멈출만한 어떤 형태의 땅의 작용이 없어 보입니다. 또한 와혈이라 하기엔 沈窩로 보아야 할텐데 그렇게 본다 해도 가까이 붙은 본신용호가 너무 높고 험하게 우뚝 솟아 위압감마져 드는걸로 보입니다. 저는 이 자리를 유혈의 형태로 보았고 용호가 너무 위압적인데다가 당판도 기울었고 그에 비해 용이 너무 초라해 혈적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죠. 안산은 뚜렷한 모양도 없이 기울어 좌향을 제대로 정하기조차
어럽더군요. 용이 빈냥한데다가 흘러내리는 모양도 이상하구요. 제 추츶이긴 합니다만 이 자리에 묘를 조성할 때 복토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3. 청풍김씨 청풍부원군계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김여광의 양자인 김계(繼)의 묘소를 살핀 후 김인백 부인묘를 보아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이장하기 전의 김극형( 의왕의 초장지를 알 수는 없지만)의 묘소가 큰 작용을 했다고 보는 견해를 제시합니다. 여러 주장이 있지만 오봉산 하의 안동권씨 묘소야말로 제대로 된 와혈의 자리로 볼 수 있고 또한 김극형 묘소가 의왕에 소재했다가( 증손자인 김재로가 세운 신도비문을 참고해 보면) 현 충주시 봉황리로 이장되었으니 적어도 그 자리가 증손까지 영향을 줄 수 있었기에 그런 견해를 가집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김징의 묘소는 전혀 자리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안동원씨 묘소를 좋게 보며 거기에 더해 김극형의 초장지에 주목하는 견해죠. 교수님의 고견을 구해 봅니다.
@hyunjae 제 글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1. 김징 묘는 횡룡으로 되면서 분기점에 작지만 봉우리를 일으켰기에 현무정이라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그 지점은 입수라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2. 김징 묘를 와혈이라 본 것은 좌우 용호를 포함한 국세까지 포함해서 말한 것이고
미시적으로 보았을 때는 유혈로 보아도 좋겠습니다.
이점은 미시적으로 보는 것과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의 관점 차이기 때문에 귀하의 말도 맞습니다.
3. 김징 묘 아래 부분은 전순부분인데,천연적인 상태입니다.
대부분 이 부분에 후손이 묘를 쓰지만 이곳은 비어있는 상태라 온전히 전순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전순 아래는 예전에 작은 샘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4. 안동권씨 할머니 묘는 제 글에서 지적했듯이 횔룡의 분기점에 아무런 봉우리가 없습니다.
봉우리가 없다는 것은 용맥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는 탯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묘 뒤에는 용미를 길게 달아서 용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지점은 인작일 뿐입니다.
김극형의 초장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기에 답변드릴 수 없음을 양해바랍니다.
@지종학 답변 감사드립니다.
1. 김징묘는 횡혈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보입니다. 현장에서 보면 우선룡으로 보이지만 횡혈은 아니라고 보는게 타당하다고 봅니다.
2. 와혈로 보기엔 혈장이 위치한 룡이 너무 크다고 보죠. 오히려 유혈의 혈상에 너무 위압적인 용호가 거슬리네요.
3. 김징묘소는 보토의 흔적으로 흘러내리는 모습이 역력하더군요. 세번을 답사했는데 그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죠. 전순 아래의 샘이라고 볼수는 없고 물이 솟는 것은 확인했지요.
4. 안동권씨묘소를 빼고는 이 가문의 부흥을 말하기 어렵겠죠. 오히려 김징 묘소는 가치가 없다고 봅니다. 비록 조선8대명당에는 들지 못할지라도 안동권씨 묘소는 배울 점이 많은 와혈의 특성을 가진 좋은 자리로 봅니다.
5. 제가 김극형의 초장지를 언급한 것은 청풍김씨들의 발음이 치자 항렬까지 내려갔는데 그 발음의 원천을 김징 묘소로 볼 수 없었기에 그리 한 것입니다. 김극형 묘소는 고손들에 의해 봉황리로 이장되었기에 적어도 초장지에서 발음을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지기 때문이죠.
공부 잘 했습니다 . 건강하십시요.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세요
제 견해로는 8대명당 선정도 문제가 있지만 대안에도 미흡한 점이 많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광산김씨 김반의 후손들이 번성하긴 했는데 그 두 가문이 김익희와 김익겸의 후손인 것은 분명한 바
1. 김익희의 후손에서 두명의 상신이 나오는데 김상복은 김반의 5대손인데다가 김희는 6대손까지 멀어진 후의 일이지요. 즉 계대가 너무 벌어진 셈이죠. 바꿔 말하면 김상복이나 김희의 영달에는 김반 보다는 김진옥(김상복의 조부,) 김희의 묘소는 김진망(증조부)의 묘소가 작용한 것으로 보게 됩니다.
2, 김익겸이 약관에 강화도에서 폭사한 후 부친인 김반이 체백을 수습해 전민동의 묘를쓴 후 어린 두아들 만기와 만중이 장성해서 그 영향을 받은 후 대제학에 오르고 손자인 진규나 증손자인 양택이 연거퍼 대제학에 오르는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봅니다. 전민동의 김반묘역을 보면 상하장인 김익겸과 김반의 묘소가 둘자 혈적하다고 볼 수 없겠죠. 혈이 그렇게 상하로 바짝 붙어서 만들어지기가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즉 둘 중에 김익겸 묘소를 졍혈로 보면 될것입니다. 김반묘소는 겨우 여기나 취할 정도이니 큰 자리가 아니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