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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아내와의 탐방 아내가 점심을 먹고 생각지도 않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가자고 해서 나섰다. 지난 4월 10일 전철을 타고 역사관에 도착하니 1시 30분이었다, 토요일은 당국에서 청소년 무료입장을 식혀서 학생들이 많았다. 형무소 역사관을 막 들어서니 초등학교 6학년 정도의 학생들 20여 명이 선생님에게 독립운동사에 대한 설명을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었다. 저 새싹들이 독립운동사를 듣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그들 가슴속에 꽉 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독립운동사를 학생들과 같이 우리도 들었다. 나는 어릴 적에 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선생님의 독립운동사를 듣다가 보니 사회에서 어깨너머로 많이 들어본 얘기들이 많았다. 중앙 사를 둘러보며 연약했던 감옥의 환경을 알게 되었다. 나도 어릴 적이 일제강점 기였으니 순사들의 악랄함을 들어서 잘 알고 있어 공감이 갔다. 오죽하면 어린이가 울다가도 순사 온다고 하면 무서워서 울음을 끝일 정도였다. 중앙 사 3.4번 동을 거치며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일본 형사들이 우리 독립투사들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장면을 보며 유관순 열사의 고문 등을 상상해보니 온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일제강점기 동안 그들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던 그 시절이 상상 조차하기 싫어졌다. 공작 사에 들어서니 캄캄한 방에서 독립운동의 역사가 흑백 영상에 묻어 흘러나왔다. 그 방을 자세히 보니 학생들이 꽉 차서 참혹했던 독립운동 사의 영상물을 보고 있었다. 우리도 영상물을 학생들과 함께 가슴에 울분을 토하며 다 보고 생각을 해보니 나는 나라를 위해 과연 무엇을 하고 살았나 생각을 해봐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나 먹고살기에 급급했었다. 독립운동의 역사공부를 하는 학생들을 보니 민망스럽기까지 했다. 해방 이후 60여 년이 넘도록 우리 기성 인들이 이 새싹들에 무순 본보기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정부 수립 이후 6.25 전란을 겪으며 어려움은 있었다. 하지만. 나라의 대표적인 기성 정치인들은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치는 간데온데없고 권력투쟁과 코앞에 이권 때문에 당파싸움만으로 일관해왔기 때문이다. 우리 기성 인들도 각성하고 이 새싹들에 희망을 주는 기성 인이 되어 그들의 삶의 지표가 되는 좋은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지막으로 한센병사. 추모비에서 묵념으로 예를 갖추고 사형장 건물로 갔다. 사형장 건물에 들어서며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이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독립투사님들의 숭고한 정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장의 죽음 앞에서도 나라 위해 뜨듯하게 죽음을 맞이한 독립투사님들이 나라의 선조로 자랑스럽습니다. 나는 사형장을 뒤로하고 밖을 나오니 지하토굴이 하나 있어 붙어 있는 설명서를 자세히 글 읽어보니 사형이 집행된 독립 운동가들의 시신을 몰래 묘지로 이동하던 통로 쓰여 있었다. 이런 현실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며 사람이 하루를 살다가 죽어도 사람답게 살다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실천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2010. 4. 10 초립동(趙應九)
※동립문공원에 핀 매화 꽃 ※역사속에 웃둑선 독립문 ※우리역사에 기리 남을 역사의 인물 서재필 선생의 동상 ※ 서재필선생님의 상설명문 ※ 서재필선생의 동상앞에 핀 매화꽃 ※동립선언 문 기상탑 ※ 공약 삼장문 ※ 토요일이라 독립운동 역사를 배우려 현장답사를 나온 학생들 ※ 우리민족의 "을사오적"들의 모습입니다. ※ 일제 순사에게 끌려가는 우리독립운동가 ※ 침탈자의 오만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일제순사 ※ 일제형사에게 고문을 당하는 독립투사들 ※ 지금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 독립운동가가 사형이 집행이되면 밤에 몰래 이곳으로 끌고 나온 곳이라 설명이 되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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