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야마는 고종황제의 홍릉을 매화낙지형 명당이라 했는데...
홍릉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합장릉이다. 현재의 홍릉은 1900년 고종 재위 때 터를 정했다. 1895년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 명성황후의 홍릉이 청량리에 있었으나 고종께서는 그곳의 풍수지리가 좋지 않기 때문에 이장하려고 새롭게 터를 정한 곳이다. 그리고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이곳에 묻혔으며, 이때 청량리에 있던 명성황후도 이곳으로 이장하여 합장했다.
1900년 무렵 조선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할 힘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닐 때였는데,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들려는 일제가 고종황제를 명당에 묻히게 했을지 의문이다.
다음은 ‘무라야마 지준’이 쓴 『조선의 풍수』에 실린 내용이다. 그는 영화 파묘에서 ‘무라야마 준지’로 나와 한반도의 척추에 해당하는 곳에 쇠말뚝을 박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친일파의 묘를 쇠말뚝 위에 잡아준 인물이다.
‘무라야마 지준’은 1919년 7월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조선으로 들어와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한다. 당시 그의 나이 28세였으며, 그 후 22년 동안 조선에 있다가 1941년 일본으로 귀국했다.
홍능은 고종 재위 때(1900년) 풍수사 제갈, 주운한, 김광석, 전기응에게 명하여 선정한 곳이다. 천마산과 묘적산을 거쳐 흘러온 맥이 멈추어 매화낙지형을 이룬 곳으로 청룡·백호 등 주변 산이 겹겹으로 감싸준 곳이다. 홍능의 땅은 원래 장중응(張重應)씨 선조의 산소였으나 이장하게 했다.
이곳에 왕릉을 조성할 때 돌에 새겨진 오백년권조지지(五百年權措之地)라는 표석이 나왔다. 이것은 조선 초 무학대사가 오백년 후에 왕릉이 될 것이라 예상하여 그 뜻을 돌에 새겨 매장해 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왕릉을 선정할 때 몇 명의 지관이 옳게 길지를 선정했던 것이다. 즉 홍릉은 무학대사가 왕릉으로 보장한 땅이니 명당이 틀림없는 곳이다.
홍릉의 실제 지형을 살펴보겠다.
홍릉 뒤에는 묘적산이 우뚝 서있고 앞에는 불암산의 형태가 빼어나게 보여 얼핏 보면 뛰어난 자리라 생각하기 쉬운 곳이다. 하지만 주산인 묘적산이 능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관계로 용맥이 마치 죽은 뱀이 축 늘어진 것처럼 생동감이 전혀 없다. 겉만 화려한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인데, 용맥의 상태가 부실함의 정도를 지나 분노가 치밀어 오를 정도로 나쁜 곳이다.
또 청룡·백호가 잘 감싸주었다는 무라야마의 말과는 달리 제멋대로 뿔뿔이 도망가는 모습이다. 당시 무라야마의 그림을 보면 전혀 다르게 묘사되어 있으니 얼마나 허구인지 알 수 있다.
특히 홍릉은 매우 습한 곳이어서 주변이 늘 축축한 상태다. 그런 까닭에 잔디가 살지 못해 자주 보수를 하지만, 마찬가지라고 한다. 석물의 상태 또한 금이 가고 부러지는 등 부실하기 짝이 없다. 조선시대 같으면 능의 관리를 소홀히 했다고 해서 여러 사람이 처형되었을 정도인데, 능침 속 상태가 단단히 탈이 났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홍릉을 정할 당시 상황이 매천야록에 기록되어 있다.
경자년(1900년) 8월 금곡의 능에 철도와 전선을 개설하고 주변에 있던 묘 2만여기를 발굴하였다. 금곡은 길지가 많이 있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에 재상들의 선대 묘가 많았다. 그중 양주조씨들 선산은 지관들이 명당으로 손꼽고 있었으나 묘소를 발굴하여 보니 유해가 모두 녹아 버리고 다만 물병 하나만 남아 있기도 하였다. 그 밖에 많은 묘들도 명당으로 불리던 곳이 도리어 흉지였으며, 흉지로 생각되던 곳이 오히려 길지여서 종종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민간의 무덤 몇몇은 따뜻한 기운이 있을 뿐 아니라 백골도 황금처럼 누렇게 보존되어 있으므로 발굴과정을 감독한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기도 하였다.
금곡에 홍릉을 조성하면서 수많은 묘를 발굴하자 사람들은 묘 터를 뺏긴 것을 원통해 하면서 유언비어가 돌았는데, 이곳 금곡에 능을 쓰면 조선의 국운이 다하여 망하며, 왕실 후손들도 대가 끊길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런데 떠도는 말처럼 실제로 조선은 망하고 말았으며, 왕실의 손도 끊어지고 만다. 고종황제의 홍릉은 전혀 묘를 써서 안 되는 악지였던 것이다.
이번에는 유릉에 대한 무라야마의 설명을 보겠다.
유릉은 순종께서 1926년 승하하자 이곳에 묻히고 먼저 서거한(1904) 첫째 황후 순명효황후를 이장하여 합장한다. 그리고 후일 둘째 황후 순정효황후가 1966년 승하하자 함께 합장하였다. 하나의 봉분 아래 3기의 실을 갖춘 동봉삼실(同封三室)의 유일한 사례이다.
유릉은 조선의 27대 왕인 순종과 그의 비를 합장한 곳으로 십자통기형(十字通氣形)을 이루고 있다. 유릉은 당시 조선왕실의 지관 전기응씨가 선정했다. 이곳은 능을 중심으로 네 개의 산줄기가 감싸주는 형태로 홍릉보다 더 뛰어난 곳이다.
십자통기형이란 사방에서 기운이 통하는 명당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릉에서는 네 개의 능선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마치 우스꽝스러운 팔놀림 같은 모습이 되고 말았다. 이미 홍릉 뒤에서부터 시작이 잘못된 것이지만, 유릉까지 능선 또한 지극히 무력하고 천박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홍릉과 유릉은 풍수에 무지한 일반 백성조차 쓰지 않을 악지인 것이니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그리고 순종황제는 죽어서도 치욕스러운 곳에 누워계시고 있다.
당시 일제의 풍수사 ‘무라야마 지준’은 지금의 홍릉 터는 무학대사가 이미 500년 전에 왕릉이 될 땅임을 예견했던 곳이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최고의 명당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멀쩡한 무학대사까지 끌어들여서 욕을 보이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어용풍수를 동원한 자신들의 사기행위에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서 ‘500年權措之地’라는 표석까지 날조해 묻어두고 있다. 마치 오래 전 일본의 어느 고고학자가 구석기유물이 발견되었다며, 자신들의 역사를 조작하려 했던 행위와 닮았음이다. 또 유릉의 땅은 홍릉보다도 더욱 뛰어난 명당이라 말하면서 조선 민중을 철저히 기만하며 우롱하고 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조선을 위해 크나큰 은혜라도 베푼 것처럼 선전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홍릉과 유릉의 터 선정은 일제의 조선 말살 시나리오에 의한 다분히 의도적으로 기획된 것이고 왕실의 지관 몇몇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동조했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조선을 침탈한 일제가 조선 왕실의 번영을 위해 명당을 잡아줄리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만한 일이다. 이때 실제는 흉지지만 얼핏 보았을 때 그럴듯한 곳을 골라 풍수의 말로서 조선왕실과 민중을 기망했던 것이다.
혈족으로 승계되는 권력 구조에서는 임금의 묘 자리가 나쁘면 나라의 운명 또한 위태롭게 된다. 그럼에도 당시 조선의 수많은 벼슬아치와 풍수사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그땅의 불리함과 불가함을 말하지 않고 있다. 조선의 풍수는 이곳 홍릉과 유릉에서 500년 조선왕조와 함께 종말을 고하고 있음이다.
두 번 다시 그와 같이 풍수를 이용한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식 있고 실력있는 풍수사를 양성하여 우리의 강토를 지켜내야 한다.
https://youtu.be/6Aq0S_u1BC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