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는 아는 만큼 보인다
비보를 배우려면 태안사를 답사해라
곡성 태안사는 신라말(742년) 신라의 고승 3명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적인선사 혜철(785~861)이 동리산문을 열어 이름을 떨쳤고 그의 제자 광자대사(864~945)가 중창하여 불사를 일으켰다.
적인(寂忍)은 혜철이 77세로 입적하자 경문왕이 내린 시호이다.
처음에는 대안사(大安寺)로 불렸으며 구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파 본산지이다. 동리산(桐裏山)은 봉황이 머문다는 오동나무를 뜻하는데, 지금은 봉황의 머리라는 봉두산(753m)으로 바뀌었다.
태안사 대웅전은 동리산(봉두산)에서 이어진 산줄기 끝에 남서향으로 자리했다. 전국의 유서 깊은 사찰들은 이처럼 풍수에서 중요시하는 용맥 끝에 자리했는데, 해인사, 봉정사, 부석사, 마곡사, 선운사 등이 그러하다.
태안사는 동리산의 기운이 뭉친 혈처에 해당하는 곳이니 풍수적 의미가 남다른 곳이다. 스님들이 이런 곳에서 수행하면 크게 깨우치게 되고 불자들이나 일반인들도 간절히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기도 명당인 셈이다.
태안사의 중요문화재는 적인선사 부도 탑(보물 제273호), 광자대사 부도 탑(보물 제274호), 광자대사탑비(보물 제275호), 청동 대바라(보물 제956호), 동종(보물 1349호), 일주문 등이 보물로 지정되었고 능파각과 삼층석탑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이다. 절에서 의식을 치를 때 사용하는 바라는 지름 92cm로 국내에서 가장 큰 것으로 효령대군이 세종임금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보물로 지정된 광자대사 탑비는 비신은 사라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 귀부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이고 이수는 용의 모양을 새긴 비석의 머리를 말하며, 비신은 입적한 스님에 대한 기록을 적은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비신이 깨져 일부분만 남은 상태를 현재는 귀부와 이수 사이에 놓아둔 상태다.
이 절은 1925년 최남선이 찾아와 “신라 이래 이름 있는 절이요, 또 해동에서 선종(禪宗)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다. 아마도 고초(古初)의 신역(神域)같다.”고 극찬한 곳이다. 즉, 태고적 신이 살던 신비한 곳 같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찰이 깊은 산 중에 있지만, 태안사는 더욱 깊은 산 중이어서 신이 살던 곳이라는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15세에 출가한 도선은 여러 곳을 다니며 수행을 하다가 20세 때 이곳 태안사에서 혜철선사의 법문을 듣고 크게 깨우치면서 제자가 된다. 그 후 도선은 이곳 태안사에서 3년간 머물며 수행에 정진하게 된다. 도선이 수행하던 곳인지 몰라도 태안사 곳곳은 비보풍수의 흔적이 유독 많은 곳이다.
입구에서 호젓한 산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유독 다리가 많다. 속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면 돌아가라는 귀래교(歸來橋), 마음을 씻으라는 정심교(淨心橋), 깨달음을 얻으라는 반야교(般若橋), 깨달음을 얻었다면 모든 번뇌 망상을 벗어던지라는 해탈교(解脫橋)가 줄을 잇는다. 다리 하나를 지날 때마다 마음을 비우게 되니 몸도 가벼워진다.
다음으로는 능파각 다리가 나온다. 능파각이란 태안사 입구 계곡에 설치된 누각 모양으로 된 다리의 이름인데, 거친 계류를 진압한다는 뜻이다. 계곡 건너로 이동해야 할 이유가 없음에도 이곳에 다리를 설치한 것은 급한 계류가 흐르는 수구처를 긴밀하게 하여 水氣의 누출을 막고자 했던 다분히 의도적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능파각은 고려 초(937년) 광자대사가 중창할 당시에는 천복루(薦福樓)라 하였다. 복을 천거한다는 뜻이니 꼭 한 번 다리를 건너서 복을 받기를 바란다.
능파각 좌우에는 산줄기가 내려와 마치 열쇠를 채우듯 좁게 이루어졌다. 이를 풍수용어로 한문(扞門)이라 하며, 출입구를 지키는 초병과 같은 역할이어서 명당의 징표로 삼기도 한다.
절 입구에는 두 개의 돌탑 무더기가 대문 역할을 하듯 서 있는데, 태안사 내부의 기운이 빠지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할이다. 돌탑 좌우에는 무성한 나무를 심어 바람이 빠지는 것을 막고자 했으니 이중으로 입구를 단속한 것이다.
조금 더 오르면 태안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가운데 섬을 만들어 삼층석탑을 배치했다. 풍수에서 물은 경제력이라는 것을 알고 인위적으로 만든 연못이다. 삼층석탑은 원래 광자대사 부도 앞에 있었으나 연못을 조성하면서 옮겨온 것으로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대웅전 뒤쪽은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가 있는데, 배알문을 지나야 한다. 배알문 높이가 낮은 것은 머리를 숙이고 들어와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라는 의미다.
적인선사 부도 탑 뒤에는 오래된 동백나무와 대나무 숲이 있다. 이는 계곡에서 부는 바람을 막고자 비보 숲을 만든 것이다. 만약 숲이 없었다면 계곡을 따라 대웅전을 향해 골바람이 심했을 것이다. 이러한 골바람은 요풍, 질풍, 천풍, 적풍, 살풍 등 온통 부정적으로 부른다고 했으니 바람의 폐해를 알고 적극적으로 방비했던 것이다.
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라 했다. 완벽한 땅은 없으며, 아무리 좋은 땅도 한두 가지 결함은 있다는 뜻이다. 태안사는 깊은 산속 작은 분지에 해당하지만, 골바람에 취약한 면이 있다. 이것을 비보하고자 곳곳에 조형물과 숲을 조성한 것이니 비보 사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무심코 지나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알고 보면 의미가 남다른 것이니,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였다.
태안사는 효령대군이 머물던 곳이고 최남선은 신이 살던 신비한 곳이라 할 정도로 유서 깊은 사찰이다. 또 풍수의 대가 도선국사가 용맹정진 수행하던 곳으로 비보풍수의 다양한 형태를 배울 수 있다.
무엇보다 고즈넉한 숲길과 능파각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날려주는 최고의 장소니 봉황이 깃든 태안사를 둘러볼 것을 추천한다.
https://youtu.be/X-dOMAGnwYk
첫댓글 태안사 꼭 둘러봐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