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최근까지 300여 년 동안의 과학문명은 그 위대성을 인류의 마음 깊숙이 새겨놓았다.
대자연의 위력 앞에 무력하게만 느끼던 인류에게 크나큰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 반면에 고대의 철학에 대한 경시하는 풍조를 낳았고, 이 때문에 전통사상과 가치를 무조건 비과학적인 미신으로 치부하고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지구의 나이가 6천만년이라고 가르치는 성경의 말씀은 과학적인 계산치인 45억년과 비교하면 터무니없는 계산이기에 잘 걸러서 들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동양의 음양론과 점괘로 계산하는 학문은 일종의 점성술로서 잠시 머리를 식히는 오락으로만 사용해야한다고 선을 긋고 있다.
그런데 사실 근대과학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모든 존재들이 마치 각 부품들이 기계적으로 합쳐져서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물질중심의 단선적인 기계론과 절대주의적인 결정론의 사고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최근에 극히 미세한 세계를 파헤치는 양자역학, 그리고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홀로그램 우주론의 등장으로 근대과학의 한계를 극복하려 노력해왔다.
그러나 최첨단의 과학적 탐구에 근거한 발견들은 여전히 우리의 상식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모든 물질세계의 시원으로 파고들면 하나의 원자로 구성되고, 이 원자세계는 사실 99.999%가 텅 빈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 과학의 결론이다.
지금 내가 그 속에서 살고 의지하는 모든 것이 빈 공간의 세계이다.
인류가 이룩한 물질문명의 모든 것의 실상이 이처럼 엉성하게 얽힌 세계이다.
심지어는 내 몸까지도 실제로는 거의 100% 텅 빈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금은보화를 지키기 위하여 울타리를 쳐놓고 경계망을 구축해놓아도 결국은 구멍이 숭숭 뚫린 세계이다.
어쩌면 내 것과 네 것으로 양분하는 일도 결국 쓸 데 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물질문명의 본질이 마치 빈 공간에 부질없는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고전적인 깨달음을 주고 있는 듯하다.
또한 현대과학의 눈부신 발달은 과학의 기본적인 전제조건인 객관성과 검증가능성을 어렵게 하며, 다시 고전적인 신의 세계로 되돌아가도록 하고 있다.
물리학의 발달로 과학자들은 물질을 더 깊이 뚫고 들어갈수록 어떤 독립된 구성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그물 관계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계들은 언제나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자를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이라는 관찰자는 관찰되는 과정들의 연쇄고리에서 마지막 연결을 이룬다.
프리초프 카프라는 그의 저서 ‘생명의 그물’에서 어떤 존재의 성질도 관찰자와의 상호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물질은 오직 마음과 결부될 때만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관이 배제된 객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주관과 객관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있고 없고는 주관적으로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일 뿐 '실제로 무엇이 있다 혹은 없다'를 객관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는 선언이다.
마음의 작용으로 동일한 세상을 각각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본질을 알아야한다는 의미도 된다.
현대과학은 필연적으로 이미 줄곧 대립해왔던 종교적인 학문과 손을 잡지 않으면 자기 본래의 사명을 다할 수가 없는 진퇴양란의 처지에 빠지게 되어있다.
특히 객관적인 진리의 세계로 가는데 최후의 보루라고 믿어왔던 수학마저도 증명불가능한 명제로 구축되어 있다.
과학과 수학으로도 객관성을 증명 할 수가 없는 현실들이 널려있다. 사실 인간이 현실의 확고부동한 법칙을 얻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점이 증명된 것이다.
이제 과학과 수학은 물론 철학과 종교의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현미경을 통한 미시적인 접근이 아니라, 지구 위를 멀리 조망하면서 북극성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이른바 새로운 마술적이고 최면술적인 감정이입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결국에는 인류문명의 시원적인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지금까지 미신으로 치부해왔던 동양적인 세계관에 눈길을 주어야할 때가 왔다.
특히 동양적인 것이 등장한 이전에 이미 밀려나있었던 우리의 문명사에 관한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인류의 최초의 경전이 바로 천부경이라고 하는 81자의 수로 이루어진 것인데 인간의 모든 지혜가 이 경전에 다 담아질 수가 있고, 인류문명의 최고의 지혜가 바로 수학인데 이의 시조도 결국은 천부경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학문의 시조인 플라톤은 이미 그이전의 원시문명을 찾아 돌아다니며 배움을 얻고자 하였다. 온고지신이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과거를 들추어 오늘을 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사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문명의 과거는 실종되어 있다. 아니, 과학문명의 조류에 밀려있는 우리는 과거를 모르는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어 있다. 하지만 관심을 좀 더 가지게 되면 남겨진 유물과 유적이 다 사라진 것이 아님도 알 수가 있다.
이제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 앞으로 가야할 길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우리의 철학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잃어버린 철학은 우리들의 삶의 현장 속에서 각종의 무형의 형태로 그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잃어버린 철학의 흔적을 찾을 것인가?
물론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이 구축한 문명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방법이 있을 수가 있다. 또한 우리조상들이 구축한 문명의 내용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그 전체 모습을 있는 그대로 탐구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 민족의 삶의 현장에서 지금까지 전래되는 유형과 무형의 유물과 유적을 통하여 그 속에는 어떠한 철학적인 논리와 관점, 그리고 특징이 담겨져 있는가를 보다 관심 있게 탐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 조상의 삶의 흔적을 추적하다보면, 오늘날의 과학적 수준으로도 접근하기 어려운 놀라운 수준의 지혜를 인생의 삶속에 적용하고 활용한 흔적이 발견된다.
지금부터 적어도 3천년 이전에는 어디서부터 유래하는지 모르는 빛나는 문명을 이루고 세상을 선도하였던 그 흔적들이 발견된다.
아쉽게도 수천 년 전의 그 빛나던 철학은 잊어버린 지 오래고 한과 설움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