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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寧越 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 해석문/ 이지관
김원식 추천 0 조회 73 24.02.27 14:34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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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4.06.14 10:35

    첫댓글 은강선원에서 다비하고 수습한 사리를 907년에 동림사에 처음 안치했다.[1] 동림사는 현재 순천 금둔사인데, 현재 금둔사 동편 언덕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이 옮겨진 것이 아니라면 법당 앞에 석탑을 두는 일반적인 가람 배치와 어울리지 않는 점과 탑의 건립 시기가 절중의 입적 시기와 비슷하며, 석불상이 석탑과 마주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절중의 사리를 처음 안치했던 묘탑이라 추정하기도 한다.[2]
    각주
    엄, 기표 (2009년 12월 11일). “신라시대 부도와 탑비가 건립된 승려들의 지위와 활동”. 《선사와 고대》 (31): 236.
    최, 인호 (1998). “순천 금둔사지 출토 기와와 토기”. 《문화사학》 (9): 39-40.
    출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절중(折中, 826 ~ 900)은 남북국 시대 신라의 승려이다.

  • 작성자 24.06.14 10:47

    사자산문 (獅子山門)
    사자산의 운예(雲乂) 선사의 청에 따라 흥녕선원(興寧禪院)에 머물렀다.
    전란이 잇따르게 되자 절중은 상주와 음죽현 원향사(元香寺) 등을 옮겨 다니다가 스승 도윤이 머물렀던 쌍봉사로 갔다.
    진성여왕이 절중에게 무량사(無量寺), 영신사(靈神寺)의 주지가 되어주기를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지방 세력가인 김사윤(金思尹)의 후원으로 동림사(桐林寺)에 주석하였다.
    그러나 전란으로 인해 강화도 은강선원(銀江禪院)으로 옮겼다가 입적하였다.
    절중의 제자들이 그의 부도를 동림사에 건립하였으나 탑비는 미처 조성하지 못하였다.
    그의 비는 입적한 후 44년이 지난 944년(혜종 원년)에 흥령사에서 건립하였다.
    비의 건립에는 광종을 비롯하여 충주 유씨(劉氏) 세력이 주요한 단월(檀越)로 참가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자산문 (獅子山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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