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하루, ‘아’름다운 하루
박 은 주
팔랑대는 연초록 잎들과 찌르르 새소리의 합주가 한창이다. 연연한 분홍빛 산철쭉마저 진 자리, 이제 풀잎과 나뭇잎들이 숲의 주인공이다. 아, 저 신록의 빛, 뻑뻑하던 눈과 귀가 다 시원히 밝아온다. 바람은 좀처럼 지휘를 멈추지 않는다. 골고루 퍼져가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흔들리는 나뭇잎들의 몸짓이 명랑하다. 한 계절 안에 사계절이 있다는 말을 올봄처럼 자주 떠올린 때가 있었던가? 오던 걸음을 물러 자꾸 겨울로 뒷걸음치더니, 오늘 아침 들이쉬는 숨에 묻어오는 삽상한 공기는 가을, 지금 여기 내 눈앞 세상은 누가 뭐래도 초록의 봄, 봄이다.
잠에서 깬 후에도 한참을 잠자리에서 해찰을 부리는 버릇이 있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는 9시쯤 집을 나서서 산책하는 것이 내 하루 일정의 시작이다. 산책은 한 시간 반가량 걸리는 가벼운 걷기 수준으로 산책 코스는 주로 집 뒷산인 접성산에 있는 팔각정까지 오르거나, 동네 수변공원으로 걸어가 문성지를 한 바퀴 돌아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저수지로 갈 때도 될 수 있으면 찻길을 피해 산을 넘어갔다 돌아오곤 한다.
특별한 산책 장소가 나를 부를 때도 있다. 늦가을 가로수 은행잎들이 노랗게 물들 즈음 불현듯 생각나는 곳, 몇 해 전 가을 어느 날, 낯선 산길로 접어들었다가 우연히 만난 ‘세렌디피티의 기쁨’을 내게 안겨준 은행나무 숲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가까운 이들을 그 숲으로 초대해 함께 산책도 하지만, 처음 이름 붙인 그대로 그곳은 여전히 ‘내 비밀의 숲’으로 남아 있다.
산길이든 평지든 흙을 밟고 바람 속으로 걸어가다 손을 뻗고 바람결을 느끼거나, 가만히 발걸음을 멈추고 왔던 길을 돌아다보곤 한다. 해 비치는 날 산을 오르면 앞에서 나를 이끌다, 하산길에는 언제나 내 등 뒤나 옆에서 곁을 지켜주는 내 그림자. 흐리고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대로 산책길 친구가 되는 존재를 만나며 걷는다.
여행을 떠났다가 일상으로 돌아와 며칠 만에 만난 산이 사뭇 새삼스럽다. 살금살금 그러다가 훌쩍 멀리뛰기로 점프를 하기로는 봄은 정말 으뜸이다. 듬성드뭇했던 산길 초입, 나무 사이 틈마다 가지 끝에 고개를 쑤욱 내민 연초록 잎들로 몽골몽골 채워져 있다. 가을날 뾰족이 침을 세울 갈참나무 나뭇잎 가장자리가 아직은 간지럽도록 연해 신기하고, 5월이면 하얀 꽃을 조롱조롱 매달 아카시아 이파리는 아기 손바닥같이 앙증맞다. 여행지 휴양림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서구 미인처럼 늘씬하고 멋스러웠다면 낯익은 동네 숲의 나무, 풀꽃들은 내 아이의 훌쩍 자란 키를 재거나 아이의 입속을 들여다보던 그때 그 순간들의 신통함과 기쁨을 떠오르게 한다.
무심히 일상을 살다가 가끔 ‘아보하’라는 단어를 생각하곤 한다.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무작정 그 말이 좋았다. 논리보다는 느낌이 앞서는 편인 내게 그 말은 나긋하고도 평온하게 안겨 왔다. 아마 ‘알로하’와 음이 비슷해, 하와이의 키 큰 종려나무와 꽃목걸이 그리고 가본 적도 없는 와이키키 해변을 떠올렸지 싶다.
하지만 그 단어가 ‘아주 보통의 하루’를 일컫는다는 걸 알고는 처음엔 고개를 약간 갸우뚱했다. 아주와 보통 사이의 삐걱거림, 일종의 모순 형용 표현인, ‘네모난 세모’와 비슷하달까. ‘아주’가 ‘보통이 아닌 정도로’라는 말인데 아주 보통이라면? 그러다 ‘보통이 아닌 보통의 하루’라고 풀어서 소리 내어 말해보며, 대체 그런 하루는 어떤 시간일까, 생각해 보고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보통은 보통일 뿐, 지루하고 별 볼 일 없는 것이라 여겼던 젊은 날과는 달리, 나이가 든다는 건 어쩌면 그 보통이란 것이 얼마나 비범하고 귀한 것인지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아보하’란 평범하지만, 우리가 가꾸고 지켜내야 할 소중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런 하루, 그런 나날을 보내는 한 사람을 본다. 영화 속, 그가 일구는 삶의 루틴은 정갈하다. 희부윰하게 밝아오는 새벽, 매일 이웃 할머니가 쓰는 비질 소리에 깨어나고 책을 읽다 잠이 드는 한 남자의 일상을 담은 영화 「퍼펙트 데이즈」. 단조롭게 반복되는 독신의 삶, 도쿄 시내 공중화장실들을 돌며 청소하는, 어쩌면 보잘것없어 보이는 그의 직업, 그의 삶 어디가 완벽하고 충만하다고 영화는 말하는 것일까?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짓는 그의 미소, “어차피 더러워질 텐데 뭘 그렇게 열심히 청소해요?”라는 젊은 동료의 투덜거림에도 그저 묵묵히 바닥을 밀고 변기와 세면대를 깨끗이 닦는 한결같은 성실함, 키우는 식물을 정성껏 보살피고, 엄마를 잃고 우는 아이의 손을 잡는 다정함이 모두 그를 남다르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점심을 먹는 공원에서 그가 매일 카메라로 찍는 ‘코모레비’(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빛)가 있기에 그의 삶은 특별하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순간에만 존재하는 코모레비, 매 순간 변하는 빛과 나뭇잎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찍은 사진을 현상해 정리하고 소중히 보관하는 그는, 찰나의 순간이 모여 일상을 이룬다는 걸 아는 사람이다. 또 매일 그것을 되새기기에 그의 삶은 충만하다.
물론 그 사람이라고 돌연한 삶의 이치를 비켜서 일상이 매일 잔잔하게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한순간에 그의 평정심이 무너져 내릴 때도 있다. 다만 삶의 희로애락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다시 일어서서 자기 자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조금은 흠이 있더라도 꾸준히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에 완벽한 나날이라 말하는 것이리라
국립 중앙박물관에는 각기 다른 방에 전시된 반가사유상과 달항아리가 있다. 그 둘은 완벽에 대한 두 가지 정의, ‘얼룩 한 점 없는 완전함’ 그리고 ‘자신 그대로의 온전함’으로 내게 다가온다. 피안의 세계, 해탈의 경지에서 피어난 부처의 미소 앞에서 염원의 기도를 올리게 된다면, 흘러가는 시간 앞에 놓인 달항아리는 비록 완벽하진 않지만, 그 결함을 채워가며 보완하고 맞추어 가는 것이 삶이라며 은은한 빛으로 위안을 준다.
완벽에 대한 무언의 압박으로 꽤 오래 나 자신을 짓누르며 보냈던 시절이 있었다. 직장에서의 경력이 쌓여가고 가정에서도 아이들이 한창 커가던 40대 때였다. 두 군데, 그 어디에서도 완전하지 못한 결함투성이로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친 듯한 자신을 탓하기도, 그것을 핑계로 삼기도 했다.
그 이후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직장을 떠난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 나를 본다. 완벽이나 완전과는 천리만리 떨어져, 내 마음 하나조차도 어쩌지 못해 팔랑 가슴으로 허둥거릴 때가 많다. 다만 지금은 인생이란 결과나 완성이 아닌,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란 걸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다고 할까. 앞으로도 삶의 틈, 균열을 모두 메꾸며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삶의 허방을 짚고 비틀거릴 때도 있으리라. 그럼에도 내 속에 있는 수많은 나 중에 가장 온전한 나, 아我름다운 나를 찾아, ‘아름다운 보통의 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면, 살아간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고 충만한 삶이 아닐까?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영화 속의 그 남자, 히라야마와 조카딸이 자전거의 은륜을 굴리며 노래하듯 외친다. 나 또한 현재라는 건반을 꾹꾹 누르며 걸어간다. 안단테 소스테누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