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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을 시작한 인물들은 당시 천도교 익산교구장이었던 박영진(朴永鎭, 1856~1928)과 천도교 관계자들이었던 정대원(丁大元, 1862~1929), 고총권(高寵權, 1867~1959), 김병호(金秉鎬, 1865~?) 등이었는데, 특히 박영진과 고총권은 1894년에 여산 동학농민혁명군의 일원으로 공주 우금치 전투와 논산 황화대전투에도 참가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이들은 여산 읍내와 황화면에서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다가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는데, 박영진과 정대원은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복역했고, 김병호는 징역 4월형, 고총권은 태형(笞刑) 90도(度)에 처해졌습니다. 비록 대규모 군중들과 함께 하는 시위는 아니었지만, 이들의 의거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을 시작했다’고 주장하는 군산의 3월 5일에 비해서 3일이 빨랐습니다. ※ 3월 2일 여산읍내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체포된 박영진과 정대원은 같은 판결문에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올라갔는데, 김병호는 그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볼 때 따로 움직였던 것이 아닌가 추정됩니다. 또한 정대원은 완주(完州)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판결문의 내용에 따르면 박영진과 같은 익산군 황화면 황화정리 출신입니다. 제가 다방면으로 탐문해본 결과 후석마을에 거주하는 정태우 님의 증조부 성함이 정대원이고 공주와 여산을 오가면서 일을 했고, 사회활동에도 참여하셨다는 내용을 수집했습니다. 비록 이름의 한문 글자가 다르고 생몰 연대도 약 3년 정도 차이가 나지만 당시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일부러 이름을 고쳐쓰거나 두 개의 이름을 사용할 수도 있고, 생몰 연대 역시 기록을 철저하게 남기지는 않았던 당시에는 큰 차이가 아니라고 생각되고, 또 완주와 공주는 흘려쓴 손글씨라면 착각이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 3.1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던 정영모님 댁(원수리 389번지) 일대
이날의 거사는 군중이 참여하는 ‘한강 이남 최초의 3.1운동’이라고 주장하는 군산보다 5일이 늦지만 나머지 지역 중에서는 가장 빠른 의거이며, 이날 행사에 참여했던 주동자들은 신막에서 체포되었는데, 이정ㆍ박사국은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이병석은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아서 옥고를 치렀고, 김치옥은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고문으로 인해 사경에 처하게 되자 가석방되었는데 나머지 평생을 반신불수와 정신이상으로 고생하다가 사망했습니다. 여산에서는 3월 30일에도 독립만세 시위가 있었다고 하나 아직은 상세한 내용의 기록을 찾지 못했는데, 기록을 찾는대로 내용을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이정은 가람 이병기박사의 넷째 숙부이고 이병석은 가람의 아우이며, 박사국님은 전주 완산도서관장으로 재직 중인 박용자 친우의 조부이십니다. ▲ 정영모님 댁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원수리 389-1번지의 정태은 친구네 옛집과 ▼ 이정 혹은 이병석님 댁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옛 마을회관
또한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고 담장으로 가로막혔지만 1910년대 초에 신작로가 생기기 전까지는 전봇대가 서있는 자리들이 삼남대로의 통행로였다고 합니다. 옛 기록과 구전에 따르면 김삿갓이 여산의 주막에서 아들과 마지막 상봉을 했다고 하며, 《춘향전》 판본 중 일부에는 ‘새술막’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익산 지역 최초의 3.1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인 신막에도 3.1독립만세운동과 관련된 기념물이 전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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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 현장에 기념관 하나가 없다는게 참 아쉽네요.
별로 내세울게 없는 우리 고향에 이런 역사적 현장이 있다는게 자랑스럽고 익산시에서도 현장에 기념관을 세워서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보존하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