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로 품는다
이 남 순
부랴부랴 서둘러 동생 시골집으로 차를 달린다. 벌써 한 달은 됨직하다. 무슨 일인지 동생은 촌집에서, 올케는 아파트에서 거처하며 올케는 동생 식사를 돌보지 않는다. 마음이 쓰여 두고 볼 수 없어 일주일에 두어 번 국이며 찬거리를 마련해 간다. 가는 날에는 간 김에 따뜻한 아침밥 차려주려는 마음에 서둘러 달려간다.
남들은, 챙겨주니 믿는 구석이 있어 올케가 그런다지만,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다. 설거지를 미루어 밥 퍼먹을 밥공기가 없다며 전화한다. 그릇을 있는 대로 다 쓰고 설거지하지 않는 그런 동생이다.
동생은 몇 년 전 폐암으로 폐 한쪽을 들어냈다. 생각만 해도 아픈 동생을 어찌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 있으랴. 오늘도 아침밥을 차려주고 집 청소며 빨래를 한다. 뛸 듯이 분주하다. 점심을 같이 먹고 쓰레기통을 들고 소각장으로 간다.
어느새 해는 한나절을 지나 기울고 있다. 할 일을 대충했다고 생각하니 겨우 한숨 돌려 아지랑이 속으로 눈을 돌린다. 나뭇가지 우듬지에 연한 연둣빛 봄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무딘 마음마저 사르르 녹이는 차력의 묘수 같다. 겨우내 어디에 숨겼다가 소리 소문 없이 이리도 고운 새싹을 뾰족뾰족 흙을 뚫어 내미는 것일까. 따스한 볕이 봄바람 타고 가슴을 밀고 든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시인 말처럼 쪼그리고 앉아 자세히 본다.
대지는 숨결로 움 틔워 연두로 가만가만 소담스럽고 앙증맞은 고운 봄을 펼쳐 놓았는데, 이제야 보고 느끼는구나….
눈앞에 봄을 두고도 보고 듣지 못한 일은 바쁘다는 이유로 타성에 빠져 마음 문을 닫아 놓고서 눈뜨고 눈 가리듯 귀 열고도 막힌 듯이 보고 듣지 못했나 보다.
새삼스레 나를 돌아보게 한다. ‘사람과 사람 관계 속에서 타인 시선에도 자유로울 수 없었고, 공연히 정신없이 그네 타듯이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네를 내려 땅을 딛고 바로 선다.
물소리와 물 내음에서 나를 보고, 듣고, 냄새 맡으며 느끼게 하는 이곳은 아버지께서 가꾸시던 땅이다. 불현듯이 부모님 은근한 정이 느껴지는 듯하다. 눈을 감는다.
부모님 생전 사시가 흘러간다. 복숭아꽃 살구꽃 뒷산 진달래 다투어 피는 봄, 초록 잎새 반짝이는 키 큰 미루나무 꼭대기로 흰 구름 한가히 떠가는 여름….
나와 대화한다. 특별한 내용은 없다. 주제도 없다. 멍하니 나 자신을 보려 애쓴다. 그러다 보니 정신이 맑아지며 내를 본다. 나를 빛나게 하고 나를 행복하게 할 방법이 어렴풋이 보인다.
별것도 아니다. ‘허실생백虛室生白’ 마음 방을 비우니 거기 맑고 밝은 빛이 비운 곳을 차고 든다. 넉넉한 곳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다.
발붙인 햇귀 내리쏘는 밭은 아늑하고 포근한 나의 쉼터가 될 만하지 않은가, 바쁠 때는 돌아가고, 힘들면 쉬어가야지…, 마냥 분주한 일상에서 잠시 생각을 돌리니 이렇게 홀가분하고 편안한 것을….
폭신한 밭이 널찍한 아버지 등에 업힌 듯 따스하다. 가벼운 현기증에 가슴 두근거린다. 호젓이 앉아 아버지, 가만히 불러도 본다. 아버지는 웃으시며 저만치 밭두렁 아지랑이 속에 아련하게 서 계신다. 그곳으로 뛰어간다.
앞서 사나흘 흐리고 비 내리더니, 햇볕이 화창하고 따스하다. 자근자근 내린 봄비로 마른 땅을 촉촉이 적셔 스멀스멀 봄을 들추어놓았나 보다. 밭둑 너머 개울물이 졸졸 소리 내며 오는 봄을 재촉한다.
개울가 버들가지를 탄 버들강아지는 털 속에서 아기자기 꽃술을 내밀고 기지개 켜며 하품한다. 봄볕에 달구어진 가슴에 봄바람이 인다. 이 고운 봄을 나만 즐기랴, 이웃과 나눠야지…. 봄바람 나게 해야지…. 봄 담 아래로 나간다.
어느새 양지바른 언덕 마른풀 속에도 봄이 앉았다. 아버지 등, 그 밭에 냉이며 삼동초 쪽파 등 봄이 가득하다. 파릇파릇 고운 봄을 소복이 담는다.
봄 향 그윽한 냉이도 캔다. 바구니마다 봄을 한가득 눌러 채운다. 열아홉 봄 처녀 설레는 가슴으로 여기저기 봄 전할 달뜬 마음은 “나비야. 나비야”를 흥얼거린다. 부름을 들었을까? 팔랑팔랑 노랑나비 두 마리 날아든다,
봄 처음 보는 노랑나비는 행운을 상징한다는데, 아버지, 어머니께서 봄 전령 나비 되어 오셨을까? 나를 두고 한참을 춤사위로 맴돌고 맴돈다.
나비는 어머니 아버지처럼 흔적 없이 날아갔다. 이웃에게 봄나물에 행운 실은 노랑나비 덤으로 올려주려고 가슴속에 노랑나비 고이 담았다.
이곳저곳 훈훈한 봄소식 전할 생각은 ‘선주네, 학범이네도 좀 주고 문 박사, 12층도, 신 선생, 후배도….’ 줄 생각으로 자꾸자꾸 캐고 있다. ‘봄을 드릴게요. 아니, 봄바람 나세요, 이렇게 말하며 연둣빛 고운 봄을 나눠야지.’
해는 서산에 걸린다. 냉이를 열 번도 더 씻어 물 빠지게 건져두고 동생 저녁 밥상을 차린다. 계란찜에 쪽파 송송 썰어 올리고, 캐온 푸성귀를 씻어 쌈장과 올려놓으니 상큼한 봄을 담은 제법 그럴듯한 밥상이 차려진다.
알콩달콩 사랑하며 잘 살기를 빌며 가슴에 품어온 노랑나비 두 마리 올려놓는다. 한 마리는 동생, 한 마리는 올케 것이다. 밥상보를 덮어두고 냉이며 봄나물 귀히 담아서 들고 동생 집을 나온다.
아버지 품 같은 널찍한 밭을 돌아본다. 아늑히 편안하게 품어 안긴 듯한 여기를 나만의 쉼터로 품는다. 가슴이 풋풋하고 떳떳하다. 해는 고운 노을을 뿌리며 산을 넘는다.
머리도 가슴도 비운 날이다. 텅 빈 속으로 나와 대화한다. 특별한 내용 없이 주제도 없이 멍하니 나를 찾고 싶을 때는 나의 쉼터를 찾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정신이 맑아지고 빛나게 하고 행복하게 할 방법이 어렴풋이 보인다.’ 이 말을 뇌어본다. 환하게 밝아진 나를 본다.
담아 가는 봄처럼 따스한 가슴이 넉넉하다. 이웃사촌 봄바람 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다들 단봇짐 싸면 어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