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차언명 바울라 원장입니다.
오늘 부터 수원교구 소하동 성당 주임 신부님이신 유재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강론을 녹음해서 글로 옮긴 것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항상 밝고 유쾌하신 유프 신부님께서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녹취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유프 신부님'이라는 명칭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유재걸 프란치스코의 앞 발음을 따서 만들었습니다. 왠지 신부님의 이미지와 무척 잘 어울리는 듯합니다.
제가 유프 신부님 강론을 글로 정리하려고 결심한 계기는 부활 전야 미사의 '부활만세사건' 때문입니다. 이번 부활전야 미사에서 유프 신부님이 강론 때 부활의 느낌을 가장 잘 알기 위해서는 알렐루야를 한국어로 말하면 '만세' 라는 단어라고 말씀하시고, 전 신자가 소하동이 떠나갈듯 부활만세 삼창을 하자고 제안 하셨습니다. '부활 만세'를 신부님의 선창으로 삼창을 하고 나니 명치끝 막힌것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유프 신부님은 이게 바로 부활의 느낌이라면서 이 느낌을 간직하며 신앙생활 하기 바란다고 말씀하시며 강론을 마쳤습니다. 부활전야미사에서 짧지만 강력한 신부님의 강론은 대한독립만세사건 만큼이나 강하게 저에게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신부님 강론을 소하동 성당 신자분들만 듣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서 녹취해서 글로 남기고자 결심했습니다. 신자분들께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신앙 생활에 작게나마 이 글이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구어체 강론을 문어체로 적는 과정에서 어색한 부분은 조금 수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최대한 원래 말씀대로 적으려고 하였습니다.)
유프신부님 부활 제3주일
2024. 04. 14. 소하동 성당 주일 9시미사 강론
찬미예수님!
3주간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주 만나고 계십니까?
사실 예수님을 자연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고 사람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의 손길이 닿아 있기 때문이에요. 물론 이것이 ‘New Age’ 같이 “모든 것에 신이 있다.”라고 표현하는 것과는 다른 거예요. 그렇죠, 나무에도 신이 있고 여기에 신이 있고 저기에도 신이 있다는 그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모든 것에 닿아 있어서,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의 섭리를, 하느님의 사랑을, 하느님의 뜻을 체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자연을 보면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는 이렇게 놀랍구나를 느끼고, 우리가 무엇 하나 우리 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지만 그대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여주고, 또 겨울이 가고 봄이 와서 식상해하지만 이는 참 놀라운 것이죠.
“하느님은 참 신비로운 분이시다.”
이런 고백들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할 수 있음을 체험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 모든 일에 뭐다? 증인이다! 즉 증인이 되는 방법이 우리를 고백하는 것이겠죠.
무엇을 하나를 보더라도 “아~ 하느님께서 이렇게 하시는구나.”, 꽃을 보고도 “이쁘다”로 끝내면 안 되는 거죠. 꽃 이쁜 건 모든 사람이 다 알죠.
근데 꽃이 이쁜 건 왜 이쁜 거예요? (신자:하느님이 만드셔서...)
네, 하느님이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감사하고 고백해야 하는 거예요
“와! 하느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있네. 하느님은 이 아름다운 꽃을 우리에게 주셨네.”
이렇게 끊임없이 우리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일의 증인, 즉 하느님의 섭리와 삶과 죽음의 모든 것들이 하느님 안에서 왔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집에만 계시지 마시고 날도 많이 좋아졌는데 TV 보면서 유튜브 보면서 집에 계시지 마시고 조금은 살살 걸어다니면서 자연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까 단지마다 꽃들이 많이 피어 있더라고요. 한내천에 벚꽃하고 개나리, 진달래, 철쭉 등
너무너무 예쁘지 않습니까? 회색 건물이 있는 아파트 건물들 사이에 분홍색 노란색 이쁘게 피어 있는 거 보면 막 이쁘고 기쁘지 않아요? (신자:네~)
저도 이제 나이 먹었는지 이게 다 좋아 보이네요. ㅎㅎㅎ
하느님 보면 놀라운 분이시죠. 그분 안에 그런 색들이 다 있다는 거죠.
그렇죠, 하느님 안에 그런 일이 다 있다는 거예요. 하느님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을 하시는지!
하느님 너무 보고 싶지 않습니까? 죽어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에 푹 빠져서 더 청정한 아름다우신 하느님을 늘 그리워하다 보니까 죽음이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거죠. 죽음을 두렵지 않게 여기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도 기쁨이 되는 거예요.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를 잃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처럼 부활해서 진정한 아름다움이신 하느님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닌 거지요.
그런데 또 봉성체 다니다 보면 “하느님이 왜 안 데려가는지 몰라!”라는 분이 계세요. 그런 얘기 하지 마세요. 왜냐면 그건 하느님 뜻이니까 하느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이제 쓸데없이 제가 빨리 죽으라고 기도해 드릴게요. 그럴 수가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렇죠!
누구 죽으라고 기도하는 사람 봤습니까? 자기 깨달음을 강요한다는 거죠.
자기 깨달음!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도 기도할 때 너무 힘들 때 “빨리 좀 데려갔으면 좋겠네.”가 아니라 “하느님 제가 당신의 아름다움에 머물게끔 잘 죽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하셔야 됩니다.
어차피 우리는 다시 다 하느님 앞에 나아갈 것이기 때문에, 부활이란 그렇게 우리 삶의 곳곳에 녹아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체험하는 것이 바로 부활이라는 거죠.
어디 멀리 가서 자꾸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이 녹아들어 있으며 늘 함께 살고 있습니다. 부활을 체험하게 되고 하느님 선함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면서 그 모든 아름다움이신 하느님을 다시 꼭 만나고 싶은 그 열망으로 우리와 하나로 살아가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내일의 삶이 다 무엇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되는 것이죠.
왜겠어요? 왜 죄 안 짓고 하느님 뜻대로 살아야 빨리 하느님 앞에 나아가죠.
욕심부리고 다투고 시기 질투하고 그러면 어떻게 돼요? 하느님께 가는 시간이 점점 느려지는 거예요. 영영 못 가는 사람도 있다가 아니에요. 그 사람들 어디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삶을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만 하는 사람.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받았고 또 하느님 뜻 안에 머물고자하는 열망이 있고 때론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욕심이라든가 여러 가지 이유들로 죄에 빠져버린 우리의 모습이지만, 다시금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늘 회개하면서 나를 용서하신 하느님께도 감사하고, 제 안에서 하느님 안에서 이 세상을 다시금 바라보면서 우리가 또 행복해하고 감사하고 그게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과는 다른 삶,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나의 모습을 비춰 보이게 되어 있어요. “너는 뭐 맨날 이렇게 기뻐.”라고 했을 때 “아니, 하느님이 주신 이 모든 것들을 내가 만나고 있는 게 너무 기뻐.”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증언하는 증인의 삶을 살게 되는 거죠.
예수님의 말씀을 너희는 이 길의 증인이다. 우리가 증인이 되는 길 나의 삶의 모든 것들이 하느님으로부터 하고 하느님께서 베푸신 것이고 하느님의 아름다운 것에서 나온 것이기에 나는 진정으로 진정한 아름다움이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증언하는 삶으로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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