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장(逆葬)이란 조상 묘 위에 후손의 묘를 쓰는 것을 말한다. 즉 조상 묘보다 높은 곳에 후손이 묘를 쓰면 유교적 관점에서 불효 막급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묘는 능선을 기준했을 때 맨 위쪽과 높은 곳에 선대를 모시고 족보상 순서대로 묘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선산에서도 한정된 범위 내에서만 묘를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넓은 선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유교적 관념이 성행했던 조선 시대에도 역장의 사례는 많았다. 그 이유는 좋은 땅은 나무의 열매처럼 능선 끝에서 이루어지는데, 그곳에 부모님 묘를 쓰고 자신은 그 곁에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야 후손들의 관리도 편하기 때문이다.
13명의 정승을 배출한 정난종 묘역
군포 수리산 아래는 동래정씨 정난종 묘역이 있으며, 하나의 능선에 묘가 상하 4단으로 자리하고 있다.
정난종 묘가 가장 밑에 있으며, 그 위에 아들과 손자 묘가 자리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산의 혈은 산 끝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최초에 가장 좋은 곳에 정난종 묘를 쓴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난종 묘 아래는 산의 기운이 소멸된 곳이기 때문에 묘를 쓸 수 없고 부득이 위쪽에 자식과 손주 묘가 들어선 것이다.
혹자들은 역장으로 묘를 쓰면 집안이 망하는 패륜이라 말하지만, 정난종 묘 이후 13명의 정승을 배출한다. 조선 시대 단일가문에서 가장 많은 정승을 배출한 것인데, 과연 누가 이 가문을 무례하고 무식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 화폐의 주인공이 된 신사임당과 이율곡
조선 시대 최고의 학자로 불리던 율곡 선생 가족묘는 파주 자운서원에 자리했다. 율곡 선생은 1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곳에 묘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율곡 이이 묘는 어머니 신사임당 묘보다 높은 곳에 자리했다. 안내판 설명에 따르면 자식이 현달하거나 입신양명했을 경우 부모보다 높은 곳에 묘를 쓰기도 한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자식이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율곡 선생은 단순히 효심 차원에서 부모님 곁에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세종대왕은 아버지 태종의 헌릉 곁에 묻히기를 원했다. 이때 한 말이 "다른 곳에서 명당을 얻는 것이 부모님 묘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운서원에 묘를 쓴 율곡 이이는 어머니와 함께 우리나라 화폐의 주인공이 되었다. 오천원권 지폐에는 율곡 선생이 그려져 있고 오만원권 지폐에는 신사임당이 들어가면서 모자가 화폐의 주인공이 되는 세계 유일의 사례가 되었다.
유학의 거두 사계 김장생 묘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은 유학의 거두였다. 그의 묘는 논산 고정리에 있다.
묘역에서 가장 오래된 묘가 김장생의 7대조할머니 묘인데, 김장생은 7대조 할머니 묘 위에 자리했다. 마치 할머니가 손주를 등에 업은 것 같은 모습이다. 가장 후대인 김장생이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한 것이다. 만약 조상의 혼백이 있다면 손주가 할아버지 할머니 머리 위에서 재롱부리는 것을 싫어하겠는가?
이곳에 묘를 쓰고 난 후 가문은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면서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자리 잡게 된다.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배출한 연안이씨 묘역
연안이씨는 조선 시대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배출한다. 이정구, 이명한, 이일상으로 이어지는데, 아버지, 아들, 손자가 연속으로 대제학에 오르면서 연안이씨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대제학의 품계는 판서와 동등한 정2품이지만, 열 정승이 대제학 한 명만 못하다는 말이 의미하듯 문치주의를 표방한 조선 시대에는 최고의 영예로운 벼슬이었다.
가장 아래 월사 이정구 묘가 있으며, 뒤에는 손자, 맨 뒤에는 아들 묘가 자리했다. 얼핏 보면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있다.
조선의 대문장가 택당 이식 묘역
택당은 부친이 돌아가시자 장사를 미뤄가며 3개월 동안 땅을 찾은 끝에 양평 쌍학리에 묘를 쓴다. 택당은 선영에서 가장 좋은 곳을 정해 부친을 장사지낸다. 실제로 그곳은 통통하게 생겨서 기운이 뭉친 곳이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조부의 묘를 이장해 오는데, 그 당시 조선 최고의 풍수로 불리던 이의신, 박상의, 두사충, 오세준 등을 불러 자리를 감평받는다.
택당 자신의 묘는 부친 묘보다 위쪽에 자리했으며, 조부의 묘에 비해서는 지대가 높은 곳이다. 그래서 조부 묘가 발아래 한참 낮은 곳이다. 역장을 따지는 사람들은 선대 묘보다 위쪽은 물론이고 지대가 높은 곳도 불가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장임에도 불구하고 택당의 후손 중에서 정승 3, 판서 6, 문과급제자 22, 무과급제자 18명이 나오면서 가문이 크게 번창한다.
경주 최부자집 시조 최진립 장군 묘
최부자집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무신으로 활약한 최진립부터 시작한다. 그의 묘는 울산 언양에 있으며, 아들 동량 묘가 위쪽에 있다. 능선 중에서 가장 좋은 곳에 최진립 묘를 쓴 것이다. 그런 까닭에 풍수계에서는 이곳을 12대 만석군을 일군 명당으로 부르기도 한다. 실제로 최진립 묘는 능선 끝에서 커다란 열매처럼 생겼는데, 마치 넉넉한 창고와 같은 모습이기 때문에 부가 큰 땅이라고 한다.
이때 최진립 장군 묘가 화살의 정중앙 과녁 10포인트 지점이라면 그의 아들 묘는 8포인트 정도 된다. 그러므로 아들 묘 또한 준명당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결국 두 묘의 시너지 효과로 12대까지 이어지는 영향을 준 것이다. 최동량은 욕심내지 않고 준명당에 만족한 것이 가문을 지키는 묘수가 되었던 것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아이러니하게도 역장으로 묘를 쓴 가문이 모두 크게 성공했다. 그 이유는 부모님 묘를 선영에서 가장 좋은 곳에 쓰고 아래쪽은 묘를 쓸 곳이 없어 뒤쪽으로 간 것이다. 이것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산천정기의 영향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역장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좋은 곳을 골라 문중의 가족묘를 조성하면 명문가로 발돋움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그와 반대로 아무리 좋은 자리가 있어도 역장이란 이유로 방치된다면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https://youtu.be/7ULWHjaOA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