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 모현면 능안리에는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 묘가 있다. 정몽주는 후일 태종이 되는 이방원의 부하가 휘두른 철퇴에 맞아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한다. 당시 선죽교 밑에 버려진 시신을 스님들이 수습해 개성 인근의 개풍군에 안장한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후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을 하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포은선생을 모신 상여가 용인 땅을 지날 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들고 있던 명정이 날아간다. 그리하여 운구를 멈추고 명정을 찾기 위해 따라가는데, 한참을 날아간 명정이 어느 야산의 언덕에 떨어지는 것이다. 괴이하게 여긴 사람들이 이곳의 산세를 살펴보니 영천의 땅보다 훨씬 좋은 명당이었다. 그리하여 이것은 망자의 뜻이라 생각해 이곳에 묘를 쓰기로 하고 광중을 파보니 토질과 토색이 명당에나 나오는 오색토였다.
가족과 지관 등은 기막힌 명당 터를 선생께서 스스로 골랐다고 감탄을 하면서 날이 저물었으니 다음 날 아침에 하관을 하기로 한다. 이때 묘지 조성하는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니 포은의 증손녀였다. 그녀는 연안이씨 이석형에게 시집간 처지였으나 이곳의 묘터가 탐이 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몰래 그곳 광중에 밤새도록 물을 갖다 부었다.
다음 날 아침 하관하려고 보니 광중 속에 물이 흥건히 고인 것을 보고 다들 깜짝 놀란다. 풍수에서 가장 꺼리는 것이 묘터에서 물이 나는 것인데, 하루밤 사이에 물이 가득하니 당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난감해 하던 차에 지관이 말하기를 바로 이웃 능선도 이곳 못지 않은 명당이니 그곳에 쓸 것을 권한다. 그리하여 최초에 명정이 떨어진 장소에서 30m 떨어진 우측 능선에 묘를 쓰게 된다.
그곳은 명정이 떨어진 땅과 주산도 같고 청룡·백호도 같으며, 안산과 좌향도 모두 같았다. 모든 것이 최초의 땅과 같았기에 명당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명정이 떨어졌던 땅은 증손녀 차지가 되고 후일 이석형 선생과 합장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위 전설은 사실과 다른 면이 있다. 연안이씨 족보를 보면 포은선생 묘를 이장할 당시에(1406년) 증손녀는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 묘를 쓰게 된 동기는 부인께서 1445년 친정에서 아들(渾)을 낳고 산후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러자 포은선생의 손자이신 정보(鄭保)선생이 자신의 신후지지에 딸의 묘를 쓰게 한 것이다. 그 후 1477년에 이석형 선생이 돌아가시자 합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곳은 두 묘가 여인의 젖가슴처럼 나란히 있어 쌍유혈로 불린다. 그리하여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지순례 코스와 같은 곳이다. 풍수를 모르는 일반인들도 잘 가꾸어진 묘역으로 자녀를 데리고 소풍을 오는데, 명당으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기 때문에 좋은 기운을 받기 위해 오는 것이다.
필자는 이곳에 오면 어김없이 질문을 받는다.
“두 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고서에서 말하기를 명당은 털끝만 한 차이로도 좋고 나쁨이 극과 극으로 갈린다고 했다. (毫釐之差 禍福千里)
두 묘는 능선으로 이어진 산줄기 끝에 자리하고 있다. 산줄기 능선을 용맥이라 하는데, 인체로 비유하면 혈관과 같은 역할이다. 혈관이 좋아야 혈액순환이 순조로워 건강하듯이 용맥의 상태가 좋아야 산천정기를 제대로 받을 수 있어 명당이 된다.
자세히 보면 포은선생 묘까지 오는 산줄기는 약 100m가 곧고 길게 이루어졌다. 이를 직룡이라 하는데 좋은 상태가 아니다. 풍수에서는 산줄기 능선이 용처럼 크게 꿈틀거려야 생룡으로 좋게 평가하는 법이다.
상대적으로 이석형 묘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미세한 변화를 하면서 묵직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포은선생 묘로 이어지는 산줄기보다 이석형 묘로 연결되는 용맥이 올바른 것이란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포은선생 산줄기는 방룡(傍龍)이고 이석형 묘로 이어지는 것이 정룡(正龍)이 된다.
혈은 산천정기가 뭉친 곳으로 산 중에서 가장 건강한 지점을 말하는데, 이석형 묘가 올바른 진혈인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보면 포은선생 묘가 약간 높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연못까지 이어지는데, 이석형 묘를 감싸주는 내백호 역할이다. 내백호란 터의 우측을 감싸면서 보필하는 최측근과 같은 것이다.
이쯤에서 이곳의 산세를 보면 묘를 중심으로 청룡·백호가 빈틈없이 감싸주었고 멀리 안산과 조산 또한 단아한 모습이다.
이석형 직계후손에서는 부원군3, 정승8, 대제학6, 판서42, 공신4, 청백리2, 문과급제자 120명을 배출하였다. 특히 손자 6명이 모두 대호군(대장군) 벼슬을 하는데,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장수하고 있다.
참고로 묘의 발응은 묘를 쓰고 태어난 인물이 가장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손자 때부터 시작된다. 묘가 좋으면 좋은 영향을 받고 묘가 나쁘면 나쁜 영향을 받게 되니 이를 동기감응이라 한다.
그리고 고손 때에는 대제학 월사 이정구와 이귀(李龜) 등을 배출하면서 연안이씨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묘 하나의 후손 중에서 이토록 많은 인물이 배출되기는 드문 일로서 명혈의 소응을 말해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러니 누가 명당의 응험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묘 하나가 가문을 명문가로 키운 것이다. 그런 관계로 예로부터 명당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이곳 묘역을 가면 이석형 묘 앞에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이곳이 신비한 에너지가 나오는 파워스팟이니 모든 만물을 이롭게 할 뿐 아니라 아픈 몸도 치유할 수 있다.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양지바르고 공기 맑은 곳에서 고요한 힐링이니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곳이다.
一個山頭 下十墳 一墳富貴 九墳貧, 共山共向 共流水 只看穴情 眞不眞
(하나의 산 밑에 10개의 묘가 있다면 하나는 부귀하지만 9개는 가난하다. 산도 같고 좌향도 같고 물도 같지만, 단지 살필 것은 혈의 情이니 참됨과 거짓됨을 볼 것이다)
https://youtu.be/ZZskFx8EJyQ
첫댓글 월사는 이순장의 손자죠?
저라면 저헌 묘소 뒤에 앉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