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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25년 10월 25일 <사단법인 대불>, <대불련총동문회>가 주관한 인문학 강좌 "한국 고승과의 대화"에서 "도선국사, 한국풍수의 비조"라는 주제로 발표한 내용입니다.
요약문
1997년 광양 백계산 기슭 부도 아래서 도선국사로 추정되는 천년 된 유골이 발견되었다. 발굴을 주도한 순천대박물관에 의하면 발견된 유골은 도선국사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물속에 잠긴 유골의 상태는 충격이었다. 우리나라 풍수의 비조로 불리는 도선국사 부도가 자리한 곳은 일반적으로 명당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취약한 지점이다. 왕건의 훈요십조에 등장할 정도로 풍수에 정통했다는 도선의 부도가 어째서 가장 열악한 지점에 위치한 것인지를 여러 각도에서 고찰해 보았다. 그 결과 도선의 부도는 옥룡사와 운암사 절터를 비보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도선국사는 죽어서까지 두 사찰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도선의 비보사상은 현대에 와서는 환경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주제어 : 도선국사, 옥룡사, 운암사, 풍수, 부도탑, 비보풍수
1. 도선의 생애와 사상
1) 출생과 전설
도선(道詵, 827-898)은 신라 말의 고승으로 호는 연기(烟起)이며 자는 옥룡자(玉龍子)였다. 그의 출신과 배경은 주로 《삼국유사》와 《고려사》 등의 사서와 비문 등에서 전해진다.
도선은 전남 영암에서 태어난다. 그의 속성은 김씨로 태종 무열왕의 서손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어머니는 최씨로 불리지만 이 또한 확인된 바 없다. 그가 태어난 곳은 구림마을로 지금의 영암군 군서면에 속한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마을에 사는 최씨 처녀가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상류에서 오이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건져 먹었다고 한다. 그 후 처녀의 배가 불러오더니 급기야 사내아이를 낳기에 이른다. 그러자 처녀의 부모는 괴이한 일이라 여겨 아이를 마을 근처 바위 아래 버린다. 며칠이 지난 후에 처녀는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 가보니 바위 밑에 있는 아기를 비둘기 떼가 감싸 보호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범상치 않은 일이라 생각해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고 한다. 이때부터 구림(鳩林)마을로 불리게 되었고 갓난아이를 갖다 버린 바위는 국사바위로 불리게 된다.
참고로 구림마을은 월출산 자락으로 왕인박사도 이곳 출신이다. 지령인걸이라 했으니 큰 산 밑에 큰 인물이 태어난다는 풍수의 환경결정론에 걸맞는 지형을 갖춘 곳이다.
2) 출가와 입적
도선은 841년(15세) 월유산 화엄사에서 출가했으며, 846년(20세) 곡성 태안사를 찾아가 혜철선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크게 깨우친다. 불가의 입문은 화엄종으로 시작했지만, 선종으로 개종한 것이다. 참고로 화엄종은 불교의 경전 공부를 통한 수행이고 선종은 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수행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864년(38세)부터 전라남도 광양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898년 72세로 입적할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후학들을 양성했다고 한다. 그가 입적하자 신라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고려대에는 태조왕건이 국사, 현종이 대선사, 숙종은 왕사, 인종은 선각국사라는 시호를 차례로 내린다. 도선은 사후에도 왕조와 관계없이 왕실로부터 추앙받는 인물이었다.
<표 1> 도선국사 주요 연표
3) 당시의 시대상황
신라 말 도선국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정치·사회적으로 극심한 혼란과 변동의 시기였다. 당시 신라의 정치 상황은 중앙 귀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왕위가 자주 교체되면서 왕권이 약화 되던 시기였다. 이로 말미암아 후삼국 시대(후고구려·후백제·신라)가 생겼고 상호 간의 전쟁 등으로 민생이 극도로 불안하고 피폐한 시기였다.
혼란 중에도 불교는 여전히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으나 왕실이 약해지면서 종교적 권위 또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혼란한 시기에 도선은 승려로서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풍수지리를 불교와 접목해 시대를 안정시키고자 노력한다. 즉, 도선이 풍수를 접하게 된 것은 혼탁한 시대를 끝내고 불국토를 이루기 위한 사회적 처방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도선의 풍수
1) 풍수의 개요
풍수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좋은 땅, 건강한 땅을 찾기 위한 방법이다. 즉, 바람 고요하고 물 잔잔한 땅을 말한다. 그러한 지형은 인체의 건강에 유리할 뿐 아니라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바람 심하고 물 부족한 곳에서는 건강과 경제력인 면에서 불리하게 된다. 따라서 길한 곳을 찾고 흉한 곳을 피하는 방법이 풍수지리이다. 이를 추길피흉(趨吉避凶)이라 한다.
풍수는 인간의 본능적 생존방식으로부터 시작된 경험 축적에서 비롯되었다. 태초에는 비바람으로부터 추위를 피하기 위해 동굴 속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러다 차츰 자연을 이용해 집을 짓고 터를 정하면서 비바람 뿐 아니라 외부의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유리하고 살기 편한 곳을 찾는 노력이 풍수로 발전하게 된다.
한반도에서는 서기 20년 석탈해가 경주 반월성에서 명당의 집을 꾀를 써서 차지했다는 것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체계화된 풍수는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가 출현하면서 시작된다. 그 후 고려는 태조 왕건 때 훈요십조를 통해 풍수를 계승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궁궐의 선정부터 시작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된다.
훈요십조는 태조 왕건이 죽기 전 943년에 박술희에게 전한 말로 알려지고 있다. 유훈의 2조에는 ‘모든 사원은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추점하여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점정한 사찰 외에 함부로 더 창건하면 지덕을 훼손하여 왕업이 길지 못할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사찰의 난립을 억제하겠다는 목적이지만, 국운의 융성을 위해 산천의 무분별한 훼손을 걱정하고 있다.
2) 도선의 풍수 입문
도선은 20세 때(846년) 곡성 태안사를 찾아가 혜철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크게 깨우친다. 혜철은 당나라에서 선종과 풍수를 접하고 온 직후였다. 당시 당나라에는 풍수사상이 널리 퍼지던 시기였는데, 일행선사(683-727), 양균송(834-906) 등이 국사로 활동했다. 혜철이 누구에게서 풍수를 배웠는지 알 수는 없지만, 승려였던 일행선사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행선사는 선종 계열의 승려로서 당나라 현종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풍수 뿐 아니라 천문학과 수학 등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학자였다. 따라서 도선은 일행선사와 혜철선사의 영향을 받아 풍수에 입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때문인지 태안사에는 풍수의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도선국사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지리산이인(智異山異人)이 도선에게 세상을 구제하고 인간을 제도하는 법으로서 모래를 쌓아 산천순역의 형세를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대사가 환하게 깨달아 음양오행 술법을 더욱 연구하였다. 대사가 전한 음양설은 세상에 많이 있어 후일 지리를 말하는 자들은 모두 대사를 근본 으로 하였다. 비문에서 말하는 지리산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모래로 산천을 그리며 풍수를 공부했다는 대목이다.
3) 도선의 저술로 알려진 책
도선비기(道詵秘記)는 전국의 산재 된 명당들을 직접 답사하면서 명당의 이치와 효험을 밝힌 책으로 《고려사》에서 언급되고 있다. 송악명당기는 개성과 송악산 일대의 지리적 특성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선답산가는 전국의 산을 답사하며 지은 시가(詩歌)를 모아놓은 책으로 산의 형세와 지리적 특성을 시적인 언어로 표현하였다. 삼각산명당기는 지금의 북한산 일대의 지형지세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책은 전해지는 것 없으며, 구전으로 알려질 뿐이다. 근자에 들어서는 이를 빙자한 비결록이 있지만, 서지학적 고증이 된 것은 아니다. 대개 풍수를 행하는 사람들이 도선국사의 이름을 가필하여 지은 것에 불과하다.
4) 비보풍수
도선은 당시의 혼탁한 시대 상황에서 국리민복을 위해 풍수를 행하게 된다. 왕실에는 정치적 안정을 주려 했고 중생들에게는 희망을 주고자 불교에 풍수를 습합하였다. 그런 때문에 개인의 영달을 위한 풍수보다는 대중을 위한 거시적인 풍수가 주를 이룬다. 특히 비보풍수를 처음으로 시도한다. 비보란 부족하고 결함이 있는 땅을 인위적으로 보완해서 고쳐 쓴다는 것이다.
풍수가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비보에 관한 문헌은 중국 풍수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이다. 이러한 중국의 풍수가 한반도에 들어와 도선에 의해 산천비보설이 추가되면서 땅에 대한 인식이 환경결정론에서 환경가능론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획기적인 발상으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추구하는 환경적인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비보풍수는 우리나라에 정착되면서 풍수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비보의 적용은 바람이 치는 것을 막아주고, 물이 빠지는 것을 방비하고, 흉한 모습을 가려주고, 강한 기운을 제압하기 위해 쓰인다. 비보의 형태는 사탑, 숲, 조산(造山), 연못, 조형물, 글자 등 다양하며, 심리적인 면에서 소품을 이용하기도 한다.
굉연의 고려국사도선전
굉연은 고려말 나옹선사(1320-1376) 제자이며, 무학대사(1327-1405)와 함께 수행한 승려다. 그가 지은 고려국사도선전에 보면 일행선사가 도선에게 고려의 산수도를 그리게 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만약 병이 들어 위급할 경우 곧장 혈맥을 찾아 침을 놓거나 뜸을 뜨면 곧 병이 낫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천의 병도 역시 그러하니 이제 내가 점을 찍은 곳에 절을 짓거나 불상을 세우거나 탑을 세우거나 부도를 세우면 이것은 사람이 침을 놓거나 뜸을 뜨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름하여 비보라 한다. 어찌 병이 낫지 않겠는가.
이것은 일행선사와 도선의 연대 차이가 있어서 신빙성은 없으나 비보의 원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1706년에 쓰인 백운산 내운사 사적기에서는 비보의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결함이 있는 땅은 절을 지어 보완하고 기세가 과도한 곳은 불상으로 누르며, 달아나는 곳은 탑을 세움으로서 머무르게 하고 등진 땅은 당간으로서 불러들이며, 해치려 드는 것은 방지하고 다투는 것은 금지시키며, 좋은 것은 북돋아 키우고 길한 것은 선양한다.’ 하면서 실질적인 비보의 적용에 대해 말하고 있다.
3. 옥룡사지와 도선의 부도탑
1) 옥룡사지 지형지세
옥룡사지는 광양 백운산(1,222m)의 지맥인 백계산(505m) 아래 남향으로 자리했다. 원래는 작은 암자였으나 도선이 864년부터 898년 입적할 때까지 35년간 거처하면서 수백 명의 제자를 양성한 곳이다. 그런 까닭에 도선이 창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지형은 백계산을 주산으로 하여 좌청룡 우백호가 가까이서 감싼 지형으로 제비집과 같은 아늑한 곳이다. 이런 지형을 오목한 둥지와 같다고 해서 와혈(窩穴)이라 부른다. 전체적인 지형이 풍수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갖춘 곳이다. 뒤편에는 주산이 있고 좌측에는 청룡 산줄기가 감싸고 우측에는 백호 능선이 에워싸며, 앞쪽에는 안산이 있어 혈처를 사방에서 둘러준 지형이다.
그러나 풍수에서 완벽한 땅은 없듯이 이곳도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줄기가 허한 편이다. 그로 인해 사찰에 바람이 들이칠 수 있는데, 그것을 비보하고자 동백나무를 심었다. 동백나무는 옥룡사지를 에워싸듯 사방에 식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지형적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용도였음은 틀림없지만, 도선국사가 심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비보로 인해 옥룡사지는 더욱 안정된 것이 사실이다.
옥룡사는 도선의 사후 그의 제자 통진대사 등에 의해 더욱 확대되고 고려왕실의 지원까지 더해져 옥룡산문의 위상은 공고해진다. 그러나 조선 후기인 1878년(고종 15) 화재로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 1994년 순천대학교박물관에서 4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여러 유구가 발견되었고 현재는 국가지정 사적 제407호로 지정되었다.
옥룡사를 중건할 당시 도선의 나이는 38세였지만,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찾아올 정도로 사상적으로 높은 경지에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865년 옥룡사 옆에 운암사를 창건한다. 옥룡사에서 도선은 불교에 대한 전파뿐 아니라 풍수의 전수에도 공을 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로부터 옥룡사는 우리나라 풍수의 시발점이 되었고 도선의 풍수는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지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옥룡사는 풍수의 메카로서 상징성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승려에 의한 풍수의 전통은 나옹선사와 무학대사 등으로 이어지면서 불교와 풍수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2) 천년을 물에 잠긴 유골
도선국사는 옥룡사에서 72세로 입적하기 전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는데, 비문에 적힌 내용을 분석해 본다.
(사중들이 목 놓아 슬피 울고 사모함이 넋이 나간 듯하였으며, 마침내 앉아 열반하신 것을 옮겨 절의 북쪽 언덕에 탑을 세웠으니, 유언을 따른 것이다)
위 비문을 보면 도선국사는 자신의 부도 탑 위치에 대해 구체적인 장소를 미리 정해두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로부터 전남 광양군 옥룡면 추산리 백계산 옥룡사에는 오래된 비석 2기와 석탑이 전래하여 쌍비쌍탑거리라 불렸다. 마을 사람들 증언에 의하면 도선국사의 비가 1910년대까지도 있었으나 그 후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또 일본의 역사학자 ‘오가와 케이끼찌(小川敬吉)’가 1931년 조사한 ‘조선의 건축’에는 도선의 비는 자취를 감추고 통진대사의 비는 파괴되어 넘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선국사의 부도와 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 파괴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숨겨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 때 전국각지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부도 탑 약탈이 극심하였다는 말이 있는바, 신승으로 불렸던 도선의 부도 또한 일본으로 밀반출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997년 옥룡사지 좌측 산기슭에서 순천대의 발굴조사가 있었으며, 두 개의 비와 탑이 있었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부도지 밑 석관에서 도선국사로 추정된다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부도 탑 아래서 발견된 유골은 망자의 육신을 가매장해서 1차로 장사지내고 몇 년 후 다시 육탈 된 유해만을 가지런히 추려 관속에 묻은 형태였다. 이와 같은 방법을 2차장 또는 세골장(洗骨葬)이라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유골이 물에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는 점이다. 풍수에서 가장 꺼리는 것이 묘지 속에 물이 나거나 차는 것인데, 풍수의 비조로 불리는 도선국사 유해가 물에 잠겨 있는 상황은 충격이었다.
도선은 입적 후의 기록이 상세하지 않고 다만 유언에 따라 앉아서 열반하신 것을 옮겨 탑을 세웠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반면 도선의 제자였던 통진대사(863-948) 경우는 입적하자 임시로 가매장하여 육탈시킨 후, 2년 뒤 왕명에 의해 다시 석곽을 조성하고 부도 탑을 세웠다는 상세한 기록이 비문에 있다.
(다음날 신좌를 백계산 감실에 옮기고 임시로 돌을 가져다 입구를 막았다)
(시호를 통진대사라 하고 탑호를 보운이라 했으며, 나라의 석공에게 명하여 돌을 다듬었다)
(열반 후 2년이 지나서 문인들이 감실을 열어보니 형체가 살아계실 때와 같았다)
(이에 울며 유해를 봉안하여 백계산 동쪽 운암 언덕에 탑을 세웠으니, 임금의 명에 따른 것이다)
발견된 유골의 2차장 과정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발견된 유골은 도선국사가 아니라 통진대사일 가능성도 있다.
3) 부도탑 위치
발견된 유골이 도선국사인지는 차치하고, 통진대사 부도와 도선국사 부도는 이곳에 있었음이 여러 정황상 틀림없다. 그렇다면 도선께서는 어째서 자신의 육신을 이 지점에 묻으라고 유언하였는지 의문이 간다. 단순히 사찰 근처라면 얼마든지 양호한 곳이 있기 때문이다.
비문에는 도선국사 부도의 위치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비석의 받침돌을 반듯하고 튼튼한 돌로 하였고 계단의 기초도 견고하게 하였으니 실로 천만년이 지나도 기울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니 절의 동북 200보 지점에 두었다. 참으로 헌칠한 곳이다.’
실제로 그곳은 산 중턱에 있어 전망이 좋은 곳이며, 주변에는 동백나무가 울창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다. 1997년 발굴이 되기 전에는 어느 가문의 묘가 있었는데, 아마도 도선의 부도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명당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진상개지양야() 문장을 해석한 학자들의 여러 문헌 또한 ‘명당이다’ ‘헌칠하다’ ‘헌걸차다’ ‘부도 위치가 음택의 조건에 부합된다.’ 등등 일관되게 좋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아마도 도선국사가 풍수의 대가라는 선입견이 부도 터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음택의 동기감응 논리로 보면 출가한 스님에게 명당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칫하면 이러한 표현은 오히려 도선이 자신의 죽은 육신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긍정적 평가와는 달리 도선의 부도는 산의 급한 경사면이며, 움푹 파인 곳에 자리하고 있다. 부도가 있는 지점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면 사찰 근처에서 가장 취약하고 불안한 지점으로 비가 오면 금방이라도 쓸려 내려갈 듯 위험천만한 곳이다.
풍수로서 입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도선국사가 하필이면 그 넓은 산중에서 가장 비루한 땅에 자신의 육신을 묻어 달라고 한 것인데, 도선은 옥룡사와 운암사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가장 취약한 지점을 선택해 죽은 육신조차 헌신했던 것이니 절의 비보라는 분명한 목적임을 알 수 있다.
학계에서는 도선께서 비보풍수를 실천했다고 말하지만, 그가 생전에 실제로 행했다는 비보의 흔적은 어디서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이곳이 바로 도선의 비보인 것이니, 도선께서 그토록 병든 산천을 어루만져 치유하고자 했던 천년 전 비보의 현장이다.
4) 도선의 부도탑에 담긴 통합사상
불교의 교리 중에 연기설(緣起說)이 있다. 모든 존재와 현상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원인과 조건의 상호작용을 통해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하고 소멸한다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다. 즉, 세상 모든 존재는 서로 끝없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론을 근거로 이곳까지의 산줄기 흐름을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산경표에 의하면 절터가 있는 백운산과 백계산은 호남정맥 끝자락에 해당된다. 즉, 무등산-가야산-동리산-백운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의 산줄기가 멈춘 곳이 백계산이다. 나무의 꽃과 열매가 가지 끝에 열리듯 산의 혈 또한 산줄기 끝에 맺히는 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호남정맥 끝자락에 해당하는 백계산 옥룡사는 혈처가 된다. 혈처는 기맥이 응집된 곳으로 산 중에서 가장 건강한 지점을 말한다.
여기서 동리산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동리산은 도선이 태안사에서 적인선사 혜철을 스승으로 모시고 선종에 입문한 곳으로 젊은 시절 그의 사상적 기반을 다진 곳이며, 백계산은 옥룡사를 중건하고 운암사를 창건하여 독자적인 옥룡산문을 개창한 곳이다. 따라서 동리산은 나무에 해당되고 백계산은 열매에 해당되니 산줄기 흐름이 도선의 수행 여정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이곳 백계산 옥룡사는 자신이 꿈꾸던 이상세계에 대한 염원과 의지가 고스란히 투영된 곳이라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도선은 죽어서까지 옥룡사를 지키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도선의 불교는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된다는 선종이었지만, 당시 불교의 밀교적 성향을 이해해야 한다. 밀교란 어떠한 의식과 행위 등으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으로서 연등회나 팔관회 또는 팔만대장경에 담긴 불력으로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도 밀교적 의식이다.
비보사탑설도 이에 해당된다. 비록 흠결이 있고 부족한 땅일지라도 사탑과 부도를 세워 치유함으로서 지덕을 다스리면 국가와 민중이 태평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 밀교적 택지관이다. 이때 밀교에서는 의식을 행하는 장소의 선정을 중요시하는데, 여러 불보살과 제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을 택해야 자신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아무 곳에서나 의식을 행하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수행하지 않으며, 의미 없이 비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선의 부도에는 특별한 목적의식이 있는 것이다.
둘째, 당시의 혼탁한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도선은 천년을 이어온 신라왕국이 무너지고 백성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신음하는 난세에서 지리산인이 가르쳐 준 산천형세지법으로 나라를 구하고 사람을 제도하는 대보살의 도를 구현하고자 한다. 실제로 도선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목적으로 왕건을 선택하고 돕게 되는데, 이러한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 동리산 태안사 사적기에도 기술되어 있다. ‘고려 예조(왕건)는 적인(혜철선사)과 도선의 비밀스런 도참으로 삼한을 통합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칙명으로 오백선찰을 짓게 하였다.’
또 고려 말 재상을 지낸 박전지(1250-1325)가 쓴 영봉산 용암사 중창기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성모천왕으로부터 ‘세 개의 암사(巖寺)를 창건하면 삼한이 통일되며, 전쟁은 저절로 그치게 된다.’는 말을 듣고 용암사, 선암사, 운암사를 지었다는 기록도 있다. 글의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당시의 시대적 요구와 도선의 염원은 전쟁 종식과 삼한통일이 당면 과제였음을 알 수 있다.
4. 맺음말
이상의 논거를 바탕으로 글을 마무리해 본다. 밀교적 관점에서 보면 옥룡사와 운암사는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수행 여정의 종착점이며 이상세계였다. 하지만 도선은 구세도인(救世度人)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열반하게 된다. 그래서 도선은 자신이 미처 이루지 못한 전쟁 종식과 삼한통합에 대한 염원을 부도 탑에 담아 이상세계를 완성시키고자 한다. 죽어 옥룡이 되어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니, 문무대왕(626-681)이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왜구를 물리치고자 했던 애국위민 정신과 같은 것이다. 그 비장하고 결연함 때문인지 그의 제자 통진대사 대에서는 도선이 선택한 왕건에 의해 전쟁 종식과 삼한통일의 대통합을 이룰 수가 있었다. 도선의 비보풍수가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따라서 도선은 산속에서 참선하며 시대를 관조하기보다는 현실참여에 적극적인 개혁가였으며, 우리의 산하와 민중을 함께 보듬은 위대한 사상가였다.
도선국사가 창안한 비보풍수는 자연을 존중하면서 인간과 공존하는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기후 변화와 생태계 파괴로 인한 글로벌 환경 위기 상황에서 도선국사의 비보풍수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결론적으로 도선의 풍수사상은 인류의 문명사회가 자연환경과 더불어 나아가야 할 상생의 길을 제시하므로 그의 비보풍수는 이 시점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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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도선풍수의 본질에 관한 몇 가지 논고」, 응용지리 제17호, 1994.
최인선,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도선의 부도전지와 석관」, 문화사학 제6호, 1997.
황수영, 「옥룡사 도선국사비」, 영암군, 19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