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7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락방 강화를 마치시고 이제 기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의 백성들을 통해 사실화 되어야 합니다.
말씀은 진리의 성령에 의해 체화(embody)가 되어야 진리라고 말할 수 있죠.
진리(truth)는 참(true)이 되어야만 진화의 종국인 사랑에 이르게 됩니다.
말씀이 지식으로만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복음을 전파하고는
반드시 그 내용 곧 복음이 사실화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하는 겁니다.
바울은 이미 복음이 전해져서 믿고 있는 로마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자신이 가야만 로마교회가 신령한 은사를 받아 견고하게 된답니다(롬1:11)
따라서 로마서를 1장부터 11장까지 편집하지 말고 그대로 왜 인간이 구원이 필요한가?
어떤 과정을 거쳐 구원을 받는가? 구원 받은 결과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방송국에서 시청률이 안 나오는 장면은 편집을 해버리듯 기독교도 시청률이 저조한
말씀은 편집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롬12장 이후의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는 방법이 감추어져 그로 말미암아 영적 삶의 제사를 어려워하게 되는 겁니다.
진정한 성경공부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만 설교가 토크쇼로 향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증거하는 유형에는 설교(케르크마)가 있고 그 다음에 가르침(디다케)이 있고
그리고 권면(mentor)이 있습니다. 다 진리의 성령과 함께 사역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과연 진리의 성령과 함께 하는 설교와 가르침과 멘토의 사역을 하고 계시는지 묻습니다.
17장은 예수님의 총체적인 기도이며 일명 대 제사장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기도 중에는 1) 주님이 가르쳐주신 우리의 기도가 있습니다. 사실은
주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이며 우리가 해야 할 기도입니다(마6:9-13절)
2) 주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요17장의 기도는 진짜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두 기도가 내용이 같습니다. 다만 주님은 주님의 입장에서 기도를 하시고,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기도를 하는 차이가 있을 뿐 엄밀히 따지면 그 내용이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탄식하시며 주님의 뜻대로 기도를 하도록 도우시며
간구하시는 것입니다(롬8:27절) 따라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는데
누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는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의 내용만을 보면
1) 먼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마6:9)
‘주의 이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의 이름에 의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인해 거룩히 여김을 받습니다.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므로
우리가 거룩해 진 것입니다. 주의 이름이란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은 존재의 표시입니다. 주의 이름은 이미 우리 속에 스며들어 와서 우리의
속성으로 변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으며 그리스도란 이름을 담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소화시키면 말씀의 구절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데
우리 속에는 그리스도의 성분이 스며들어 와서 그리스도의 냄새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일과 같습니다. 반석과 똑 같은 성분과
조직이 되어 상천하지에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집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를 통해 거룩하게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는 당연히 기도하는 자기 자신이 포함이 되어야 합니다.
2) 그 다음은 나라입니다. 우리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마6:10a) 라고 기도합니다.
이 말은 주님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나의 주인이 결정되는 것
결국 내 안에서 정권이 바뀌는 혁명이 매 순간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일반 사람도 부를 수 있는 창조주시지만 주님이라는 소리는 함부로 부르지 못합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부르지 못합니다(고전12:3절)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므로 하나님과 부자지간의 관계가 되어 이제 소속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이 주어지게 되기에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주로 부르는 것은 그 분의 뜻을 복종하는 사역적인 의무를 말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권리와 의무를 같이 갖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는 영광과 감사를 드리고, 주님이라고 할 때는 충성과
봉사를 다짐하게 되는 것이므로 매 순간 정신을 차리고 호칭을 불러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선출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 안이라는 영토 곧 새 땅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 나라가 임하시길 우리는 기도합니다.
3) 그 다음은 하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건설되고(마6:10b)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도를 하므로 그 일에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영의 세계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동의를 하지
않으면 터치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내게도
이루소서 하고 기도해야만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충성을 맹세하는 기도입니다.
마25장을 보면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신랑을 영접하고 나면, 달란트를 남기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됩니다. 그리고 난 다음 오른 편의 양의 자리에 앉는 의인의 삶이 됩니다.
신앙이 생활화되기 위해서는 하늘의 뜻이 땅(나)에서 이루어지길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충성하는 것 등의
일만 하는 존재들의 총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하늘들입니다.
4) 그 다음은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마6:11)
양식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의 일을 하려면 일꾼이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성경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성전의 성소 안에 들어간 제사장들은
일을 하기 위해서 진설병의 떡을 먹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식을 주세요 일할게요’
날마다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나 육신의 필요가 일용할 양식이라 말하면 할 말이 없지요?
5) 그리고 죄(빚)를 사해주시고(마6:12) 라고 기도를 합니다.
여기서 ‘오펠레이마타’는 의무에 가까운 말입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내가 그에게 보응하지 않게 해 주세요’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일한 만큼 양식을 주시는데 우리는 늘 그 만큼 하지 못하므로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양식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후하게
주시고 또 구한다고 꾸짖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을 긍휼히
여기는 일을 하려면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양식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의 빚을 탕감해 주기 전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6)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마6:13a)하고 꼭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끊임없이 사탄의 미혹이 다가 옵니다. 마지막 때일수록
우는 사자와 같이 광명한 천사와 같이 믿는 자들을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기도하므로 내게 시험을 허락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고전10:13절을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하십니다. 시험은 다 육체의 것들이기 때문에 그 시험을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7) 악에서 곧 악한 자에게서 구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하는데 사단은
우리의 상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8)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찬양으로 주기도는 끝이 납니다.
그런데 타락한 아담의 자손들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막혀 있어 선악간의 율법에
대한 의무만 있고 양식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간들의 문제입니다.
모든 종교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딴 길이 없습니다.
양식을 먹지 않으면 시험에 들도록 그냥 둡니다. 아니 사단의 수중에서 종으로 삽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양식을 먹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넘어지게 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체질이 아니기 때문에 아말렉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순전히 의무로만 들렸습니다. 그러므로 잘못을 지적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회개가 되지 않고 핑계만 대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과 사울의 미세한 차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의 1)에서 4) 번까지가 되어야 비로소 5)에서 7)번이 보장됩니다.
다윗을 보세요.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항상 여호와를 앞에 모시므로 자신에게
그 말씀을 이루어 양식이 되므로 시험과 고난과 환난을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기도의 앞부분의 1)에서 4)번이 안 되면 5) 6) 7)의 문제가 닥쳐옵니다.
다른 사람의 일로 항상 속이 상해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사단에게 항상 지고 맙니다.
마음이 강퍅해지고 미움이나 원망 등의 마음의 병이 들어 사람이 점점 쇠약해져 갑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데 그 내용이 요17장입니다.
우리를 위한 대표기도를 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우리의 기도를
항상 해야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보물이 되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며 자원하여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구원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가 이렇게 중요한데 이 기도가 순교를 당한다니 안타깝지요?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좋은 성경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