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에 있는 준경묘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5대조부 이양무의 묘소다. 이양무는(李陽茂, ? ~ 1231년) 시조 때부터 대대로 전주에 살았으며, 고려에서의 벼슬은 종4품 장군이었다. 그의 아들은 이안사(? ~ 1274)였는데, 관아의 기생을 두고 전주의 고위관리와 다툼이 벌어진다. 그러자 하급관리인 이안사는 처벌이 두려워 부친과 식솔을 데리고 삼척으로 도피하게 된다. 이때 전주에서 동행한 사람이 170호에 이른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척으로 온지 1년 만에 부친이 죽자 아들 이안사는 묘자리를 찾아다니는데, 우연히 두타산 기슭에서 어느 도승이 혼자 말하는 것을 엿듣게 된다.
도승은 한 곳을 한참 둘러보더니
참으로 명당 중의 명당이구나. 이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이르러 큰 인물이 태어나 기울어가는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다. 그러나 대명당인 이곳에 묘를 쓰려면 소 100마리를 바쳐 제사를 지내고 장사지낼 때는 금관을 써야 발복할 것이니 인연이 닿는 사람만 쓸 수 있을 것이다.하는 것이다. 도승의 말을 엿들은 이안사는 집에 와서 고민하다가 소 백마리와 금관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편법을 쓰기로 한다. 즉, 소 백마리(百牛)는 흰소(白牛)로 대체하고 금관은 금빛의 볏집으로 만들어 장사를 지내는 것이다.
그 후 이안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곳과 4km 떨어진 곳에 묘를 쓰고 함경도 의주(宜州)로 또 한 번 이주한다. 전주에서 갈등을 빚었던 관리가 삼척으로 부임하자 재차 도피한 것이다. 이때가 1253년 경이었다.
그때부터 두 묘는 관리가 어려워지면서 실전되고 만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씨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묘를 찾으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선조 대에는 강원도 관찰사 송강 정철이 현재의 묘를 보고 찾았다고 했으나 고증이 어렵다고 했고 그 후 삼척부사 허목 또한 이곳을 지목했으나 묘비 등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다 조선 말 고종 때에 이르러 더 이상 찾는 것을 포기하고 두 묘를 공인하였고 각각의 묘를 준경묘와 영경묘로 부르게 된다.
무려 600년 동안 실전되었던 묘를 조선 조정에서 인정한 것이지만, 어떤 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묘가 실제인지는 알 수 없는 문제다.
아무튼 5대 후에 이성계가 태어나 조선을 건국하면서 백우금관 전설과 함께 준경묘는 풍수계에서 대명당으로 불리게 된다. 그래서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지순례 코스와 같은 곳이 되었다. 묘는 신좌을향(辛坐乙向)이니 동향이다.
준경묘는 주차장에서부터 도보로 산길을 40분 정도 올라야 한다. 인근이 오래된 금강송 군락지이기 때문에 산림보호 차원에서 차량 출입을 규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게 뻗은 소나무 군락지를 걸으며 멋진 풍광을 감상할 수 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나면 불현듯 넓은 터가 눈앞에 나타난다. 명품숲이라는 표석 뒤로 준경묘의 실체가 보이는데, 잘 정비된 모습을 보면 힘든 여정의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지는 느낌이다. 마치 도연명 시에 나오는 무릉도원 같은 분위기를 연상하는 곳이다.
묘 앞에는 진응수(眞應水)란 표지판이 있고 용의 입에서 물을 뿜는 형상이다. 진응수란 명당의 기운이 왕성하여 혈을 맺고 남은 기운이 지상으로 분출하여 생기는 샘물이라는 설명이다. 더불어 이 물을 마시면 활력이 넘칠 뿐 아니라 자손이 번창한다고 하니 누구라도 마시지 않을 수 없다.
묘 측면에서 보면 준경묘는 산 끝에 이르러 여인의 젖가슴처럼 생겼기 때문에 유혈로 불린다. 묘 주변 곳곳에는 암석이 박혀 있는데, 혈의 기운이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의 貴石이라 한다. 당판의 모습은 예쁘게 화장한 미인의 얼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누구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묘 좌우에는 높은 산들이 우뚝 서있는 모습이니 대혈에 걸맞은 유유상종이라고 또 한 번 감탄한다.
이쯤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준경묘에 서린 전설과 잘 관리된 묘역의 상태를 보고 대명당의 표본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게 된다. 준경묘는 뭇사람을 유혹하고 또 유혹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겉모습이 화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묘의 상태는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속마음을 알아야 한다. 겉모습은 껍데기일 뿐이니 잘 포장하면 속게 된다. 혈처까지 오는 속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묘 뒤편의 용세에 진정성이 나타나게 되니 묘까지 이르는 산줄기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묘 뒤편에서 산줄기를 타고 오르면 묵직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약 100m가 곧고 길게만 이어질 뿐 상하좌우 변화가 전혀 없다. 아무리 작은 혈일지라도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변화를 보이면서 진행해야 하건만, 준경묘에는 그런 증거가 없는 것이다.
다소 의문이 가지만 용맥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비로소 작은 봉우리 A가 나타나고 뒤편에는 과협을 이룬 상태다. 이곳의 상태는 꽤 양호한 편이다. 그리고 봉우리 A 아래에는 묘를 쓴 흔적이 있으며, 이 산줄기는 C로 진행하면서 마감하고 있다.
산줄기(용맥) 상태는 뒤편이 양호하면 앞쪽도 양호하고 뒤편이 불량하면 앞쪽도 불량한 것이니 산에서의 인과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은 B에서부터 준경묘까지는 A지점 인근과 크게 다른 상태를 보이고 있다.
A에서 C까지가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는 좌선룡이기 때문에 B에서 이어진 산줄기는 원심력으로부터 이를 지탱해주는 역할의 요도(橈棹)인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준경묘는 허명뿐인 가화(假花)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예쁘게 단장한 겉모습에 유혹당했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오래전 이곳을 처음 보았을 때 유혹에 빠져 오판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몇 차례 더 답사한 후에야 비로소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
풍수는 냉정해야 한다. 어떠한 선입견에 의해 판단하는 것은 오류를 범하기 일쑤다. 오로지 원리원칙과 확고한 기준에 의해 산을 바라보아야 하니 법안의 안목을 키워야 한다.
https://youtu.be/sEfjaOMkn9s
첫댓글 풍수사가 얼마나 많은 경험과 냉정함으로 산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새삼 느끼게 해주시는 글입니다
명당은 역시 주위에 눈을 속이며 제몸을 감춘다고 들었습니다
좋은글 너무 감사합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야 비로소 위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풍수하는 분들이 좀 더 진지해지기를 바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