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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냉전시기 한미동맹의 비대칭성으로 인해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체로 순응해왔던 한국은 탈냉전시기에 들어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냉전시기에는 미국과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사실상의 후견국인
미국의 정책에 맞춰갈 수밖에 없었지만,
탈냉전시기에 접어 들면서 미국에 대해 스스로의 의견을
당당히 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탈냉전시기 한미관계는 냉전시기의 대미 순응과는 다른 본격적인 의미의
갈등과 협력관계로 변화했다.
여기서 순응의 범주는 한국의 자주적 의사결정구조의 제약으로 인해 표면적으로는
협력의 양상이 나타나나 내부적으로는 갈등의 요소가 잠재되어 있는 상태이고,
갈등-협력의 범주는 한국의 자주적 의사결정구조의 제약이 어느 정도
극복되면서 내부의 갈등-협력 양상이 그대로 밖으로 표출되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탈냉전시기 한미관계가 이렇게 변화한
원인은 무엇인가?
내용적 요인과 구조적 요인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먼저, 내용적으로는 양국의 대북정책이 분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냉전시기 한국과 미국은 북한을 고립. 봉쇄시키기는 가운데 한반도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데 대북정책에 대체로 일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북한의 고립이라는 탈냉전시기를 맞으면서,
북한에 대한 고립. 봉쇄정책은 사실상 중요한 의미를
상실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미 양국은 탈냉전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부응하는 각자의
대북정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대북정책의 분화는 한미관계에서 갈등이
부각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를 각 시기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영삼 정부의 대북 정책을 따라다닌 최고의 화두는 아마도
'한국의 주도적 역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문제의 주 당사자는 한국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가지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소외를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활'이라는 개념은 강경책이냐 유화책이냐는
구분을 떠나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을 관통하는 최대의 목표였던 것이다.
그리고 김영삼 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미국이 북한과 협상에 주력할 때에는
대북 강경책으로,
미국이 북한에 대해 군사제재를 준비할 때에는 대북 유화책으로 표출되면서
한미 갈등의 윈인이 되었다.
1994년 초 패트리어트 미사일 한국 배치와 1994년 6월
한반도 위기처럼 한반도에 군사충돌의 위기가 점증하던 시기,
한국이 미국의 대북 강경책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국과 미국이 북한에 대해 느끼는 위협인식의 차이 때문이다.
미국은 지리적으로는 북한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전쟁은 언제나 선택가능한 대안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한국은 전쟁이 일어나면 승자가 누가 되느냐에 관계없이 모든 것이
초토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전쟁을 선택의 대상으로
상정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양국의 위협인식의 차이 때문에 한반도가
무력충돌이라는 위기의 최정점에 다다르게 되면,
한미 양국은 대북정책의 방향을 놓고
갈등을 표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시기는 양국의 대북정책이 공감대를 이루면서 대북정책과
관련해
양국의 협력이 잘 이루어졌던 시기이다.부시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회의를 버리지 않았다.
클리턴 정부 당시의 관여정책과는 반대로,
부시 정부는 관여의 철회(disengagement)라는 방향으로 대북정책의 방향을
잡아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은 9.11테러로 인해
더욱 강경한 쪽으로 선회했다.
북한이 '악의 축'으로 까지 지칭되면서 잠재적인 선제공격의
대상으로까지 상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한미 양국의 대북정책이 확연히 다른 상황에서 양국 간에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냉전에서 탈냉전으로의 국제환경 변화는
한미 간에 갈등이 생겨날 수 있는
구조적 여건을 조성한다.
미국과 소련의 양극체제로 운영되던 냉전 시기,
한국에게 한미동맹은 생존을 위한 틀 그 자체였다.
북한과 중국, 소련 등 사회주의 블록의 코앞에 위치한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체제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곧 체제의 존립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미국과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국가안보를 넘어서는 가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냉전이라는 구도는 이러한 상황에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북한이 고립된 상황에서,
한국은 이제 미국에 대한 의존을 조금 낮추더라도 생존에
그다지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군사정권 시절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권위주의 정부들은 정통성을 보완하는
수단으로 미국의 지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화는 이러한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정통성에 문제가 없는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정부는
더 이상 미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
더구나 김영삼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들이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왔다는
사실에 뿌듯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한국의 민주화된 정부들은 언제든지 미국에 할 말은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상황 변화는 한미 갈등의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한국의 국력 상승은 정치 . 경제 .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한국의 자립도를 향상시킴으로써 미국의 영향력 약화를
초래하는데,
미국의 영향력 약화는 한미 갈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미국의 갈등 조정력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때문이다
한미동맹에서 한국의 이러한 위상 상승은 한미관계에 새로운 양상을
가져오게 했는데,
이는 미국이 냉전시기처럼 한국의 반발을 무시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반발이 미국의 대북정책 수행 추진력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기
때문으로, 미국의 국내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이있다.
김영삼 클리턴 정부 시기 미국은 북핵협상의 고비마다 한국의 동의를 얻거나
한국의 불만을 달래려고 노력했다.
한국의 지지가 없이는 북한과의 협상 자체를 끌고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전쟁에서 많은 미군의 묵숨을 앗아간 적대국이자 오랜 세월 스탈린주의적
폐쇄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
그러한 불량국가와 현상을 하는 데 있어 미국은 국내의 지지가 박약했고,
그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지지마저 얻지 못한다면 협상은 좌초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과의 협상에 있어 한국의 지지는 미국에게 최소한의 필요조건이었던 것이다.
미국이 북한과 군사대결을 고려했을 떼에도 한국의 동의는
필수적이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주한미군과 주한 미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면서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한반도로의 무기배치와 주한 미국민 철수가 원활히
이뤄질 수있어야 했다.
하지만 1994년 초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 논란과 1994년 6월의 한반도 위기에서
보듯, 한반도로의 무기배치와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은 한국의 반발이 있는 한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고, 주한 미국민의 철수도 한국의 전폭적인협조가 없이는
진행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미국은 북한과 협상을 하려 하든 군사대결을 하려 하든,
한국의 동의이라는 산을 넘어야 실질적인 대북정책의
수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미동맹 내에서의 한국의 이러한 위상 강화는 또한 한계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김대중-부시 정부 시기의 경험에서 보듯,
제2차 북핵 위기가 불거지는 과정에서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이라는 빅 카드를
들고 나오자, 김대중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활에는 한계가 있었다.
미국을 설득해 북한에 대한 중유 공급을 한 달 더 연장시키기는 했지만
제네바합의의 파탄을 박지는 못했고,
임동원 특사를 방북시켜 핵 문제의 돌파구를 열어보려 했지만
임 특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옴으로써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도
못했다.
한반도 안보 구도에서 한국의 독자적 역량이 어느 정도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 문제에 주도적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여전히 미국이었고,
한국의 대북정책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암묵적 지지라도 받고 있는 선상에서만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미 두 나라가 대북정책의 차이로 인해 계속해서 다른 길을 걷는다면,
두 나라가 할 수 있는 일은 상대방의 정책에 대한 비토(veto)
밖에 없다.
제1차 북핵협상 시기 미국이 한국의 의견을 중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한국이 미국의 대북정책을 비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듯이,
미국도 한국의 대북정책을 비토할 정도의 힘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김대중-부시 정부 시기 제2차 북핵 위기의 태동이 바로 그러한 실례인 것이다.
결국, 한미 두 나라는 지금 상대가 하는 일을 안되게 할 능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각자가 독자적으로 문제를 풀어갈 힘은
부족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김대중-클리턴 정부 시기의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김대중-클리턴 정부 시기 양국은 대북정책에 대한 원활한
공조를 바탕으로 그 어느 때보다 효과적인 대북정책의
성과들을 이뤄냈다.
북한은 김대중 정부 초기 한국의 포용정책 의도를 확신하지 못하고
관망 자세를 보였으나,
한국정부의 대북 포용정책 의지와 이를 뒷받침하는
미국의 의도를 어느 정도 확인하자,
미사일 문제 등에서 상당 부분 양보할 뜻을 비치며 전향적인
자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만약 북한과 미국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오고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제네바 핵합의에 이어 북미 간의 미사일 협상까지 타결되어
북미관계의 완전한 정상화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쓰는
단계로까지 발전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와 같은목표가 달성되지는 못했지만,
이 시기의 경험은 한미 양국의 대북정책 공조가 얼마나
강력한 효과를 가져오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탈냉전시기 한미관계는 대북정책에 관한 한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는 한미 비대칭 동맹구조에서 한국의 위상이 상승했기 때문으로,
한국이 미국의 지지 없이는 대북정책을 성공시킬 수 없는 것처럼,
미국도 한국의 지지 없는 대북정책을 성공시킬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만약, 두 나라가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서로의 독자노선만을
고집한다면 ,
그 결과는 서로에게 해가 될 수 밖에 없다.
한미 두나라는 상대의 대북정책을 무력화시킬 정도의 힘은 서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말기 불거진 제2차 북핵 위기는
제1차 북핵 위기 때와는 달리 6자회담이라는
다자적 메커니즘으로 이어졌다.
부시 정부가 클리턴 정부 때의 북미 양자 대화 메커니즘으로는
문제를 풀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북미 양자 대화를 주장했지만, 결국 중국의 설득에 이해 2003년 4월
북미중 3자회담을 받아들였고,
같은 해 8월에는 6자회담 방식을 수용했다.
이후 6자회담은 다섯 차례의 회의 끝에 2005년 9월 9.19공동성명을 도출해냈고,
BDA 문제와 핵실험 등으로 인한 공백 끝에 2007년 2월에는
2.13합의라는 북핵 폐기의 초기 로드맵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부시 정부가 6자회담이라는 다자적 접근 틀을 선택한 것은 관련 당사국들을
북핵 폐기과정에 동참시킴으로써 북한의 약속 이행을 강제하려는 데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여러 당사국들이 참가한 가운데 이뤄진 약속은 북한에게
강력한 구속력을 부여할 수 있고, 혹시 북한이 약속을 위반할 경우에는
6자회담의 다른 당사국들이 자연스럽게 북한에 대한 공동제재의 틀에
동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미국의 이런 선택은 북미 양자 대화 메커니즘이 북핵 폐기의 부담을 미국에게만
지우는 구조였다는 것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혼자만으로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여건을 수용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북한에 제재를 가하려 하더라도 한국이나 중국 등의 협조가 없는 제재가
실효성이 있을 리 없고,
북한과의 협상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도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 들 주변국의
협조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렇게 한국 등 주변국의 협조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이 미국의
대북정책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미국이 한국의 의사에 반한 대북정책을 실행하고자 할 때 한국이
끝까지 반대한다면,
미국은 그러한 대북정책을 독자적으로 성공시키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이러한 위상 상승은 여전히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북핵 문제 해결을 주도하는 힘은 여전히 미국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 해결에서 한국과 미국이 가지는 힘의 차이는 2006년과 2007년의
경험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2004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에 많은 양보를 하겠다고
하면서까지 남북관계의 발전을 도모했지만,
북한은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강행했다.
한국이 아무리 남북관계의 발전을 통해 한반도의 안보 현안을
풀어보려 하더라도,
북한은 한국을 그러한 협상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미국이 2006년 말 중간선거 이후 대북정책의 방향을
전환하자,
북핵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미국이 적극적로 나서기 시작하자,
2.13합의라는 틀을 통해 북핵 폐기와 북미관계 정상화의
가능성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의 결과들을 종합해보면, 탈냉전시기 한국이 대북정책과
관련해 미국과 어떤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마리가
도출된다.
한국은 미국의 대북정책을 비토시킬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한국의 의사에 반한 대북정책을 펼치려 할 경우,
한국은 강력한 반발을 통해 미국의 대북정책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의 힘은 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고 싶지 않든 현실적으로 북한 문제를 주도하는 힘은
미국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이 북핵 문제, 더 나아가 한반도의 안보 현안을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미국과의 공조를 통한 대북정책의 수행은 불가피하다.
미국을 설득해 미국과 함께 하지 않는 한 북한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은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미 공조'가 반드시 '자주'에 반하는 것인지에
대한 좀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