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7-01 출간
| ISBN 10 - 8981630518 , ISBN 13 - 9788981630515
판형 A5 | 페이
옮긴이 후기
6월 25일은 옮긴이에게는 수많은 기념일들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감흥이나
느낌 없이 잠깐 기억하고 지나가는 날이었다.
한국 전쟁 50돌이라는 숫자의 마력도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틴 하트-랜즈버그의 이 책을 접하지 못했다면 말이다.
구한말, 일제시대, 해방, 한국전쟁, 분단,
그 이후 지금까지를 미국 외교정책과
이에 대한 한국인의 대응을 중심으로 다룬
이 책은,
우리가 90년대 들어 완전히 머리에서 지우다시피 한 사실을
다시 기억하게 한다.
한반도의 분단과 독재정권의 암흑기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의해 발생됐고 지탱되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해서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남한 사람 상당수가 80년 광주항쟁을 계기로 이 점에
눈뜨고 90년대 초 사회주의권 붕괴와 함께 이 사실을
머리속 깊은곳에 잠재우고
1997~98년 외환위기의 피로감으로 완전히 잊었다면,
저자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부터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2000년까지를
한눈에 바라보며 자신의 신념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저자는 한국 근현대사 100년을
사회변혁을 꿈꾸는 이 땅
민중과 한반도를
전세계적 패권 확보의
희생양으로 삼는 미국의
투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 모순이 가장 파괴적으로 폭발한 때는 저자가 민족통일
위한 내전으로 규정하는 한국전쟁이다.
미국이 편의에 따라 지도 위에 설정한 38선이라는
'가상의 선'을 지우려던 그 피비린내 나는 시도는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일본의 조선합병,
미국의 한반도 분단, 한국전쟁,
남한 독재정권의 탄압과 광주항쟁,
외환위기를 부른 경제구조적 문제,
북한 사회주의의 변질과 고립을 미국
외교정책 분석을 통해 일관되게
설명한다는 점일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일본의 경험을 통해 미국의 외교정책이 결코
남한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보여준다.
미국인이라는 제3자의 눈을
통해 보는 한국 근현대사는
남북한의 경험을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그렇다고 저자가 한국의 역사를 미국이라는
외세의 힘에 전적으로 의존한 역사로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구한말 의병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민중의 투쟁,
특히 일제시대 좌파의 등장에서 8, 90년대까지 이어진
사회변혁 투쟁을 강조하며,
바로 이 역사에 통일의 희망을 찾고 있다.
또 분단이라는 악몽만 사라진다면,
한국인들은 자기 모순적인 자본주의와 실패한
'우리식 사회주의'
경제체제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민주적이며 평등하며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날로 복잡한 양상을 띠는 남한의 노동자와
자본가 간 모순,
권위주의로 변질된 북한 사회주의의 모순,
여기에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대공세까지 겹치면서
50년 전 보다 훨씬 복잡해진
한반도 문제가 '가상의 선'을
지우는 것 만으로 해소될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물론 저자는 그 답을, 전쟁의 폐허를 딛고 60년대는
북쪽에서 '경제기적'을,
80년대는 남쪽에서 또 다른 '기적'을 이룬 한국인들에게
요구하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한국어판의 부족함이나 잘못은, 당대 편집진의 노력과
자료수집 및 교정의 수고를 아끼지 않은 아내 박정숙의 도움에도
깔끔하고 명쾌한 원문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한 옮긴이의 무능 탓임을
밝힌다.
2000년 6월 1일
옮긴이 신기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