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상가] 42. 백파긍선
지혜참구의 일체법 아우른 깨달음 전하다
백파긍선(白坡亘璇)은 1767년(영조43) 4월11일 전북 고창 무장현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전주 이씨이며 부친은 송계 이종환으로 선조(宣祖)의 부친인 덕흥대원군의 10세 손이며 모친은 김해 김씨이다.
스님은 1784년(정조8) 18세 되던 4월8일에 시헌장로를 은사로 출가하여 연곡화상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24세 때 1790년(정조15) 9월 그믐에 지리산 영원사에서 당시에 선.교.율을 겸비한 화엄종장인 설파상언선사(1707~1791)의 수계산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선배스님들과 함께 참여하여 설파선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직접 화엄경을 배우고 서래종지를 지도 받게 된다. 그러나 법통은 설파의 법손인 설봉의 뒤를 이었다.
백파스님은 26세의 나이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학인들을 가르쳤다. 사진은 백양사승가대학 스님들의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설파선사는 휴정서산대사의 정맥을 이은 조계종문의 적손으로 화엄경에 있어서는 타에 추종을 불허한 1인자였다. 이러한 선지식의 만남은 얼마 지속되지 못하고 백파 25세 때 설파선사는 85세를 일기로 입적한다. 못내 아쉬웠지만 도반들과 영원사에 남아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수행하고 있을 때 백양사 조실스님으로부터 청장을 받게 된다. 이 때 백파스님의 나이 26세 1792년(정조16)에 강사로써 운문암에서 100명의 학인을 가르치게 된다.
30세 되던 해 구암사에서 행자에게 사미계를 설해 주므로 율사로도 첫 발을 딛게 된다. 이러한 스님의 강중생활은 계속 이어지고 49세가 되던 1815년(순조15) 가을에 법의 진실한 뜻이 문자에 있음이 아니고 지혜 오득하는데 있음을 깨닫고 강중을 떠나 초산(정읍의 고칭) 용문동에 들어가 8년간 습정균혜(習定均慧)하였다. 스님께서는 다시 55세에 금강산 오대산 등 명산을 찾아 선림을 참방하여 명안종사를 찾고자 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56세인 1822년(순조22)에 옛집(古廬) 운문암에 돌아와 여러 법려(도반)와 함께 수선을 위한 결사체를 조직하고 수선결사(修禪結社)를 결행한다.
그리고 수선결사하신 조선 후기 유교사회는 유생들의 불교 탄압이 극심하여 도시 인가주변의 사찰과 재산은 모두 빼앗기고 산중에 은거한 수행자들은 자기위상에 안주하여 선의방향을 잃은 시절 이때 수행은 상근기자 만의 수행이 이어지고 중, 하근기자는 수행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수선결사 후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저술하였다. 삼종선은 한 세기에 걸친 논쟁으로 수행 처에는 삼종선의 새로운 선풍이 일게 되는데 백파스님은 1852년(철종3) 4월24일 백암산 뒷자락 구암사 화장대에서 세수는 86세 법랍은 68세로 입적하신다.
이러한 삼종선(三種禪)은 임제의현선사의 삼구설을 인용한 백파의 선사상인데 의리선의 교학적 의미는 임제시대부터 대두되어 청허휴정선사의 <선가귀감>과 환성지안선사(1664~1729)의 <선문5종강요>가 먼저 인용되었다. 특히 환성선사의 <선문5종강요>를 근본으로 삼아 저술 하였다고 <선문수경> 서문에 적고 있는데 삼종선의 선리는 선의 실체를 알리고자 한 새로운 해석으로 조사선을 우위에 둔 선의 방법이다. 의리선에 원리는 상근기자는 필요치 않으며 중.하근기자는 반드시 이해되어야 함을 설하고 있다.
그러나 백파스님 입적 후 추사가 쓴 백파선사의 비문과 신헌(申櫶)이 쓴 초의의순선사의 비문은 극렬한 논박과는 달리, 두 선사의 선지를 극찬한 비문의 기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둘 다 선리를 바르게 알리고자 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백파스님의 선사상은 운문암 선풍으로 이어지는데 법손으로 설두유형, 경담서관이 있으며 경담선사의 뒤를 이어 환응탄영선사로 이어지는데 환응선사의 공이 컸다고 본다.
선운사 백파율사비. 추사 김정희가 비문을 짓고, 비의 명칭을 썼다. 추사의 글씨체와 백파스님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사진제공=문화재청
바로 환응선사의 지도를 받은 동시대에 석전한영, 학명개종, 만암종헌, 용성진종선사 등이 운문암에 수행이 있었다. 백파스님과 추사의 또 다른 기연이 있다. 추사의 집에 중국의 설봉노인이 보낸 달마대사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추사의 집을 다녀온 사람들이 달마대사의 초상화를 보고 모두 백파의 초상과 같다고 하자 백파의 문인들이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 추사를 찾아보고 그 사연을 말하자 추사도 그렇게 여기어 달마대사 초상화를 구암사에 보내어 백파스님의 진영으로 삼았는데 추사는 이 진영에 상찬을 쓰기를 “멀리서 보면 달마인데 가까이 보면 백파로다. 달마와 백파가 서로 다르다 하지만 본디 둘이 아닌 법에 들어감이로다. 흐르는 물은 오늘이지만 밝은 달은 전생의 몸이로다.”
이처럼 스님을 봉찬하고 근대 불교 중흥의 사상가로 보는 데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스님은 명리에 굴하지 않고 사위의에 걸림이 없는 일관된 수행자였다. 둘째 자신 앞에 처한 침체된 선문에 시대적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역대조사의 선리를 분석하고 규합하여 삼종선으로 근기별 수행을 정의하고 선교의 덕행을 이룸이 그것이다. 백파스님의 사상에는 이 두 가지 뜻이 그의 저서에 내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스님의 강중 생활에는 저술이 없다. 56세~60세까지 운문암 수선결사시대에 <수선결사문>, <선문염송사기>, <선문5종강요사기>, <대승기신론소필삭기>, <작법구감>을 저술하였고 64세부터 73세까지 구암사 선교결사시대 <사중청규>, <선문수경>, <금강8해경>, <고봉화상선요사기>를 저술 하였으며 79세~84세까지 백양사 청류암에서 관심수행시대에 <육조대사법보단경요해>, <해동초조태고화상 태고암가입과>, <식지변설>을 지었다.
스님의 삼종선은 선입문자에 있어서 의리선의 교학적인 해설은 최선의 방편임을 주장하였을 뿐 반야 무분별지는 선참구자의 스스로의 문제라고 하였다.
이것의 해답은 “직지인심이 견성성불로 봄이 옳다"고 하였으며 마음의 체용에 상당하는 용어들을 불변수연(不變隨緣)에 리(理)와 사(事)로 인명(人名)과 법(法)을 삼처전심, 삼구, 삼현, 삼종선 으로 아우르는 선의 입문에서 증득에 이르기까지 근기별 수행을 정의 한 것은 <인천안목(人天眼目)> <오종강요(五宗綱要)> <선문강요(禪門綱要)>를 추궁하는데 삼구의 의지(義旨)로써 서로대조하여 의심이 없는 연후에 마음의 눈에 비추어 저울추를 올려놓고 그 치수의 눈금이 중심을 벗어날 수 없는 듯하다고 하심은 <선문염송>등과 같은 방대한 선의 어록을 총체적으로 이해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화엄종장 설파선사로부터 구족계 수계
삼종성 근기별 수행등 근대불교 이끌어
선수행 실천자로 후학교육에 평생 바쳐
그러므로 본래 마음이 깨끗하고 번뇌가 없는 이치를 알고 이 의리를 선리로 전환하여 깨어 있음과 고요함을 고르게 유지하는 중에 돈오점수 해 간다는 삼종선의 구조를 밝혔다. 그리고 스님은 <선문수경>의 ‘무자간병론(無字揀病論)’에서 조주의 무자(無字)는 유(有)에 상대되는 무(無)가 아니며 유무를 초월한 중간적 입장도 아니다. 무자는 불입문자(不立文字) 내지는 사유(思惟)를 깨트림으로 심식분별(心識分別)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 즉 번뇌가 완전히 끊어져 마음의 경계에 열반의 고요하고 편안함을 얻었다는 생각까지도 장애로 본다. 여기서 스님은 무자를 이치로 따지거나 사량 분별한다면 이는 화두공안과 거리가 멀어지므로 선병(禪病)이라고 했다.
그리고 수행의 실천으로 화두 드는 법에서 무념삼매에 의한 선수행이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비춰보라는 혜능조사의 계율관으로 오분향 법신수행을 선참구의 정도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백파스님은 근기별 방편 수행에서 임제선사의 삼현문과 보조국사의 삼문과 스님이 해석한 삼종삼매를 각각 체중현, 원돈신해문, 몽환삼매와 구중현, 간화경절문, 무념삼매 그리고 현중현, 성적등지문, 진여삼매로 일치시켜 수행의 근거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백파스님은 <식지변설>에서 식의 분별에 대한 바른 지해를 통해 오직 선정에서 지혜 참구해야함을 설하셨는데 모든 법은 마음의 집착과 분별이 일으킨 환상과 그림자라고 하였다. 이는 생각하는 마음이 지각을 하였을 때와 미혹하여 전도될 때에도 환상의 그림자라고 하였다. 이러한 꿈과 환상을 바로 지해(知解)하면 본래 마음이 깨끗하고 번뇌가 공함을 알게 되지만 식이 일으키는 알음알이는 오히려 장애가 되어서 적정(寂靜)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고 하였다.
또한 계율관에 대해서 형식이나 외형적인 계상(戒相)보다는 집착과 분별을 일으키는 식을 바르게 지해하는 계율정신을 더 중요시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정토관에 대해 자리적인 칭념염불 발원으로 왕생정토하기 보다 천상과 인간을 위한 자리리타적인 육바라밀의 실천수행을 즐겨 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반야지혜가 없는 오바라밀만의 수행인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활동으로 자기를 돋보이고자 하는 현상에 잡착하고 자리만을 위한 수행은 무공덕으로 마침내 유루업보에 그물을 면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또한 스님께서는 더럽고 깨끗함을 가리고 아름답고 깨끗한 곳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마음이 미타불이고 오직 마음의 바탕이 깨끗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백파스님의 <작법구감>은 오늘날 모든 불교의식 의례집의 근간이며 사위의에 의한 하루일과 수행이 무념화두로 지혜 참구할 것을 밝히고 있다.
이 <작법구감>은 불교의 재 반의식 법에서 정요를 뽑아 백파스님의 선사상에 근거하여 재편하였음을 볼 수 있는데 3단의 예를 갖추고 육바라밀의 이치를 포괄한 소리의 울림에 따른 표기에 유의해 소리의 울림에 의한 차이를 예시했다.
<작법구감> 하권에 있는 ‘간당론’의 간당의식은 선문의 입장에서 입선과 방선으로 해석했고 <선문수경>의 ‘간당십통설’에서는 진공묘유의 개념을 도입하여 해설했다.
백파스님의 삶 전체가 지혜참구의 일체 법을 아우르는 깨달음의 정로를 열어간 불교사상가이며 선수행의 실천자로서 후학교육에 일관한 분이었다.
성 관 스님
여래구봉선원장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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