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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인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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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 설화 자료실 스크랩 중국인삼설화(中國人蔘說話)
심메마니 추천 0 조회 90 11.02.25 23: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중국설화(中國說話)

1. 천년묵은 산삼먹고 신선이

천년을 묵은 산삼은 뿌리가 사람의 모양을 이루고 천년을 묵은 杓根(표근)은 그 뿌리가 개(犬)의 형을 이룬다고 한다. 그 사람이나 개는 밤중에 때때로 빠져 나와 노는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물(神物)에 용이하게 만날 수 없고 또 그것을 식별하여 채취하기도 곤란한 일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는 여도사(女道士)가 사제 두 사람과 같이 깊은 산중에서 도를 닦고 있었다.
그 제자가 하루는 나가서 물을 긷고 있을 때 우물가에 어린 아이가 어그적거리며 놀고 있음을 보고 스승에게 알리니 어서 안아오라 하여 어린 아이를 안아본 즉 한 포기의 커다란 이름모를 뿌리였다.
여도사는 이 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크게 기뻐하며 이것은 필시 천년삼이리라 이 것을 먹으면 지선(地仙)이 될 것을 믿고 당장 불을 붙여 삶기 시작하였다.
한데 아직 익기 전에 식량은 없으므로 여도사는 사제들에게 맡기고 동냥을 하러 산을 내려와 촌락으로 향하였다.

동냥하는 사이에 폭우가 쏟아져 山에 돌아올 수 없을 때 남아 있는 제자들은 굶주리며 스승이 돌아오기만을 고대하던차 솥에서 삶는 향긋한 냄새에 참지 못하여 마침내 그것을 3일간에 걸쳐 먹어버렸다.
그 후 여도사는 수일이 넘어서 개울에 물이 빠져 산에 돌아와 보니 천년인삼을 먹은 제자들은 仙人이 되어 승천하고
한 제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2. 산삼먹고 과거급제

天寶年(천보년, 742-755年 唐의 연호) 中에 趙生(조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선조는 대대로 문학으로써 출세한 집안이었다. 조생에 형제가 여럿이 있어 모두들 明經(명경)으로 진사과에 급제하고 영달하였다.

그런데 홀로 조생만은 성질이 우둔하여 독서를 하나 그 글의 뜻을 익히지 못하고 장년이 되었으나 그 고을에서는 아예 과거를 보라는 추천이 없었다. 항상 형제나 친구를 만나 술자리에서 만나면 모두들 벼슬하여 갖은 색깔의 의복을 입고 뽐을 내나 그 중 조생만이 홀로 백의를 걸치고 있으므로 자기 자신은 心中에 매우 불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 친구 중 얕보고 흉보는 자가 있어 노한 끝에 마침내 집을 버리고 진양산에 숨어 초가를 짓고 백여편의 책을 상대로 一心不亂(일심불란) 밤낮 춥고 덥고를 가리지 않고 공부에 전력하였으나 성적에는 다소의 진전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더욱 더 분발하여 면학하니 어느날 밤 子正에 돌연 갈색 옷을 입은 한 老人이 나타나 이르기를 "吾子는 깊은 山中에서 고인의 서를 읽고 벼슬하고자 하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열심히 공부는 하나 추호의 진보가 없지 않은가?" 하니 조생은 정신을 가다듬고 말하기를 "소생은 스스로 불민함을 알고 있으나 나이 들어도 세상에 쓸모가 없으므로 이와 같이 깊은 산속에서 독서하며 스스로 즐기며 그 정성이 미약하나 죽어서 선조에 욕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결코 벼슬자리에만 나가고자 함이 아니오이다" 하니 노옹이 말하기를 "그대의 뜻이 굳음에 감탄하였다. 이 노인은 별로 술법은 없으나 너를 위하여 도움될 일이 있으니 나를 한번 찾아 봄이 좋으리라"하였다.
조생은 "노인장께서는 어데 계십니까?" 부른즉 "나는 殷子(은자)의 아들로 집은 山西(산서)의 大木下(대목하)에 있노라"하자 연기와 같이 사라져 버렸다.

조생은 의심하고 요물이라 생각하였으나 결국에는 산서에 가서 찾아본 즉 有別나게 큰 나무 아래 덤풀속에 이르러보니 이태껏 보지못한 初葉(초엽)이 있어 나무 아래를 파서 큼직한 산삼을 얻었다.

자세히 보니 사람 모양의 산삼이었다.
이것을 가져다 삶아 먹으니 그후 머리가 명석하여지고 공부가 일익월장하여 마침내 명경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까지 이르렀다. (唐張讀 宣室志)



3. 산삼 신표제도(信票制度)

중국 청조(淸朝)는 그 입국 초부터 만주일대에 풍부하게 산출되는 산삼을 큰 국가재원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 자유로운 채취를 엄금하고 그 채취는 관영(官營)으로 경영함으로써 황실의 의약용 확보와 아울러 재정수입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자연생 산삼이 무진장일 수는 없고 남획으로 인하여 점차 그 수확은 감소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官許(관허)된 採蔘人(채삼인)에게 정부의 허가증인'신표(信票)'를 휴대케 하여 도채자(盜採者)와의 식별을 목적하였으나 산삼이 감소되자 드디어 이 신표를 강제 인수시키는 조치를 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이 신표는 채취인 지원자수에 응하여 발행하고 단속상에 편의코자 함에 있었으나 또한 盛京(성경), 길림(吉林), 寧古塔(영고탑) 등에 할당하여 장군이나 부도통(副都統)의 직무상 의무로 하여 소정량의 산삼을 확보함에 있었다.

채취인은 처음 이 일에 종사하면 이익이 많을 것으로 예상하고 기꺼이 지망에 응하였으나 채취 산삼의 대부분은 징수당하고 자기소득으로 되는 것은 소량의 품질 불량품 뿐만아니라 그 처분에 있어서 엄한 단속을 받는 한편 산해관에 국한하여서만 거래가 허용되고 또 세금까지 바쳐야 하였으므로 채삼량의 감소와 함께 응모를 기피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궁여지책으로 소과(燒鍋 소주 상인)에게 신표를 할당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여기 소과(燒鍋)라는것은 만주 각지에서 高梁(고량)으로 양조(釀造)한 소주를 파는 업자이다.

이 값이 싼 고량주는 추운지방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으로 만주 각지에는 이들 업자가 많았고 그들은 그 영업에 관하여 하등 公課의 부담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에 착안하여 산삼과는 아무 인연도 없는 이들에게 신표를 인수할 의무를 지웠던것이다. 이리하여 요양(遼陽) 금주(錦州) 등 15성의 燒鍋(소과)에 대하여 황주국(黃酒麴) 5천괴(塊)마다 신표 한장씩을 과하였다.
그러나 이 신표발급만으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다른데서 경비를 염출하여 보조금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본업인 소과(燒鍋)영업이 불경기로 양조량이 감소되어 폐업하는 자가 속출하게 됨에 따라 신표 할당도 점감하여 乃終(내종)에는 삼관영사업(蔘官營事業)이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또, 이때 남방에는 장발적(長髮賊)이 봉기하여 만주병사들도 한가로이 산삼 감시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형편으로 함풍 2년 드디어 만주 삼관채사업은 황제의 명으로 폐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폐지 후에도 官蔘局(관삼국)을 존속시키고 산삼은 허가제로 1인 1표, 은 90냥을 징수하고 소지자에 한하여 채취를 허용하였다.



4. 산삼이 귀신으로 둔갑하여 캐는 사람을 해치다.

이 것은 산삼이 귀신이 되어 채삼인을 해치는 이야기 한토막이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 북쪽 우수리 철도의 동쪽 동해에 임한 해안선을 따라 멀리 흑룡강구 근처까지 시오데산맥이 뻗쳐 있다. 그 중간쯤 되는 인적이 드문 대협곡간에 석탄과 금의 광맥을 찾으려고 원래 지질학자인 러시아의 옷썬드우스키 박사가 찾아갔던 때의 일이다.

그 곳은 태고시대 그대로의 울창한 대삼림, 북방과 남방의 식물세계가 착잡히 섞여 있어서 마치 녹색의 대해원(大海原)을 이룬 곳이다. 삼림 중의 오솔길은 구불구불 멀리 이어졌으나 끝은 종내 보이지 않는다.
산중에 사는 러시아 사람이나 중국인 사냥꾼들의 오막살이에 통할 뿐인 지역이다.

웃박사는 어느날 해가 저물어서 한점의 불빛을 발견하고 작은 집에 간신히 당도하였다.
코삭兵의 안내자가 문을 두드렸다. 그집은 중국 사람이 사는 집으로 주인은 산삼캐는 직업을 가진 사나이였다.
전날 마적(馬賊)에게 습격당하여 숨겨놓은 산삼을 내놓으라고 협박당했으나 끝내 내놓지 않았음으로 혀(舌)를 잘리우고 병신이 된 사람이다.

이 사나이는 내객이 타의가 없음을 알아차리고 안심하였다.
그는 잠깐 나갔다 들어오더니 사람 모양으로 잘 생긴 산삼 두 뿌리를 가지고 와서 두사람 앞에 제시하였다.

코삭兵은 "이 산삼이면 블라디보스톡이나 하바로스크에 가지고 가면 이 무게 의 2배만큼이나 되는 순금과 바꿀 수 있다. 매우 값비싼 좋은 약이다" 라고 말했다.
만약 박사가 없다면 당장 약탈이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밤중이 되어 이집 주인의 동료인 듯한 또 한 사람의 채삼인이 들어왔다.
그리고 혀가 잘려 벙어리인 집주인 중국인에게 가죽 주머니를 하나 건네주었다.

이튿날 아침 차를 마시면서 그가 하는말 " 우리들의 일이란 그야 말할 수 없이 위험하다우. 인삼은 줄기가 작고 또 깊은 풀속에 숨어있으므로 그 것을 찾아내려면 숲속과 산위를 기어다니듯 해야하오.
간신히 찾아내면 이번에는 매우 조심스럽게 그 곳 흙을 조금씩 파내야하오. 동시에 역시 산삼을 찾고 있는 황소같이 큰 호랑이나 표범들을 조심해야 한다우. 이 뿌리를 먹으면 힘도 세어지고 수명도 길어지니깐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짐승들도 찾아 먹는단 말이요. 사람이나 곰이 인삼을 가지고 있으면 호랑이놈이나 표범놈이나 마구 달겨들고 자기가 죽기까지는 그만두지 않습니다.
벌써 6년이나 지났을까. 나는 이산저산 다니면서 호랑이 아홉마리, 표범 두마리를 때려잡았지.
그때 그놈을 죽여서 놈의 염통과 간을 내가 모두 먹었지라우. 그러나 무섭다 무섭다 해도 산삼을 채취하는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소.
조그만 빨간 몸집을 한 놈이며 불빛같은 눈알을 휘둥거리는데 낮에는 산삼을 수호하여 채삼꾼의 눈에 띄지않게 하고 밤이되면 풀에 불을 붙이고 자기는 산삼캐러온 녀석의 가슴에 들어붙어 피를 빤다우" "자네 그걸 본 일이 있는가?" 라고 옷박사가 물었다.

"아니오. 그러나 늙은이 푸챵은 두번이나 만나서 가슴팍을 귀신에 긁혀 지금도 손톱 자국이 남아있다우"라고 대답하였다.
때로는 그 귀신이 산삼으로 둔갑하여 이를 캐려고 하면 어슬렁 어슬렁 뒤로 물러난다고 한다.

이상은 옷박사가 직접들은 견문기를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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