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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도교진주시교구 원문보기 글쓴이: 야무
서부경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43)
- 趙性家의 月皐日記를 중심으로-
김 봉 곤 * * 44) * http://dx.doi.org/10.14381/NMH.2014.41.03.30.157
<국문초록>
본고는 서부경남지역의 저명한 학자로서 동학농민혁명에 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긴 조성가의 월고일기를 통해 서부경남지역의 동학의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을 살핀 것이다. 서부경남지역은 관리들의 탐학과 혹심한 가뭄으로 자주 민란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호남지역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게 되었다. 1894년 4월 산청 덕산에서 백낙도 등의 동학교도들이 처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7월부터 호남지역의 지원을 받아 덕산의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다시 활발하게 재개되었다.
동학농민군은 8월 19일부터 곤명의 봉계와 진주의 마동 일대에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동학농민군에 비판적인 사족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9월 초 섬진강을 건너온 순천, 광양의 영호도회소나 구례 등지를 거쳐 남원 등에서 온 호남지역 농민군과 함께 하동,진주, 사천, 곤양 등지를 동학농민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폐정개혁과 왜적의 침입을 막아낸다는 명분하에 대규모로 집결하였기 때문에, 진주 병영이나 관아에서도 동학농민군의 기세를 막아 낼 수 없었다.이에 조정에서는 관군과 일본군이 합세하여 서부경남지역 동학농민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 중 가장 큰 전투는 10월 14일 전개된 하동의 고성산성 전투였다. 동학농민군은 전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무기와 전투기술에 눌려 끝내 동학농민군은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어 이곳에 관군이 진격하고 진주 우병영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종식되게 되었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맞서 경상 우병영에서는 각 지역의 사족들을 군무참모관으로 임명하고, 지역별로 성첩을 수리하고,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각 지역별로 요호(饒戶)를 대상으로 군무참모관을 뽑아 향회를 개최하고, 성첩을 수리하고, 군기를 보수하였으며, 군량을 확보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당시
사족들은 경상우병영의 대책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으나, 어쩔 수 없이 자금을 제공하고, 군무에 종사할 수 밖에 없었다.
각 마을에서는 오가작통제를 강화하고 산에 보를 축조하였다. 오가작통제는 경상감영의 지시로 실시되었는데, 각 洞에 오고가는 자를 살펴서 수상한 자취가 발견되면 통수→두령→통장→영수→관아→감영으로 보고하는 체계를 갖추었다. 보는 진주 우병영의 지시로 단성이나 옥종면 일대의 산에 많이 축조되었다. 월횡리에서 축조한 사림산 보의 경우, 보의 축조에 마을 사람 전체가 동원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산의 정상에 성문을 축조하고 보 안에는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는 집을 지었다. 그리고 식수원과 연결하는 길을 내었다. 그러나 이 보는 땅이 좁아서 마을 사람들이 거주하기 불편하였고, 동학농민군의 신속한 공격에 맞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오가작통이나 보의 축조에도 불구하고, 마을에서는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인물이 점차 늘었다. 월횡리에는 최소한 두 개 이상 동학농민군 조직이 있었으며, 10월 초 일본군이 진격해옴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동학농민군에 강제 징집되었다. 대부분 탈출하였으나, 상당수가 동학농민군을 따라 백곡,
수곡, 북평을 거쳐 이동하였으며, 고성산성 싸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고성산성에서 패배함에 따라 전투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은 죽거나 피신하였으며, 월횡리에는 도인과 속인의 조사가 시작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주제어 : 서부경남지역, 동학농민혁명, 향촌사회, 조성가, 월고일기, 사족, 향회,
오가작통, 보(堡).
南冥學硏究 제4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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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1. 머리말
2. 조성가의 월고일기
3. 서부경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확산
4. 향촌사회의 대응
5. 맺음말
1. 머리말
서부경남 지역은 조선 말기 반봉건 반제국주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
개된 지역이다. 이미 1862년 단성과 진주 일대에서 삼정의 문란으로 농민항
쟁이 일어나 변혁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지역이며, 1894년 동학농민
혁명 당시에도 지리산을 중심으로 단성이나 하동 일대에 동학농민혁명이 크
게 일어났다.
그러나 이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는 그간 연구가 소략하였다. 구
례의 梅泉 黃玹이 남긴 梧下記聞이나 단성의 丹溪 金麟燮이 남긴 端磎日
記, 吳宖黙의 固城府叢瑣錄, 진주 백곡의 栢谷誌, 기타 국내, 외의 진
압기록 등에 이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기록이 적지 않지만, 호남 지역
과는 달리 이 지역의 보수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
가 진척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경상대학교의 김준형 교수가 국내
외의 자료나 고문서, 문집 자료 등을 엄밀하게 검토하여 1992년 10월 慶尙
史學7,8집에서「서부경남지역의 동학군 봉기와 지배층의 대응」을 발표함으
로서 향후 이 방면 연구의 중요한 표준과 틀을 세웠다. 김교수의 이 논문에
의해 1894년 당시 서부 경남지역의 동학농민군의 조직과 활동, 동학농민혁
명의 전개 과정과 재지 사족층의 대응 양상이 대부분 밝혀지게 되었다.1) 이
어 1993년 표영삼 선생에 의해 서부경남지역의 동학의 포교나 1894년 동학
농민군의 분포, 그해 10월 금오산과 고승당산에서 전개된 일본군과의 전투
1) 김준형(1992. 10), 「서부경남지역의 동학군 봉기와 지배층의 대응」, 慶尙史
學7,8집.
서부경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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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등이 기존 자료 외에 천도교측 자료나 구술자료 등을 통해 보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결과에도 불구하고, 김준형 교수가 논문의 결론에서
지적한, 동학농민혁명이 진행된 각 지역의 특징적 현상이나 지역적 조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미진한 채로 남아 있다. 사족의 분포가 다양한 지역별 특
성을 고려하여 지역별로 동학농민혁명이 확산되어가는 과정이나 향촌사회
의 대책과 조직, 방어 시설물, 사족들의 견해 등을 좀 더 적극적으로 추구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김준형 교수가 문제점으로 남겨둔 부
분을 좀 더 보완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특별히 1894년 하동 옥종의 월횡리에 거주하였던 조성가가
남긴 月皐日記를 주목하고자 한다. 조성가는 1893년 당시 진주의 도약정
으로 향촌교화활동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많은 선비들을 모아 진주, 산청,
삼가 등지에서 강학을 하였던 당대의 유학자로서 지방관들로부터 반드시 문
안인사를 받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는데,2) 그는 1894년 당시에 동
학농민군이나 향촌사회의 대응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남기고 있다. 당시 서
부경남지역의 동학은 산청의 덕산을 중심으로 사월, 백곡, 수곡, 옥종 등에
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영호 도회소 등 호남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였던 하동, 진주 등이 조성가가 살고 있는 옥종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따라서 오하기문이나 백곡지, 관군이나 일본군측 기록 등을 통
해 연구되어 왔던 결과와 조성가가 남긴 일기자료를 상세히 검토하면 이 지
역 일대의 동학농민혁명의 진행과정과 향촌사회의 동향 등에 대해서 좀 더
다양하고 폭넓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서부경남지역 동학농
민혁명의 연구가 더 이상 진척되고 있지 않는 상황에서 기존의 연구를 일기
자료를 통해 좀 더 세밀하게 진척시키고, 향촌사회의 동향을 분석한다는 점
2) 趙性家, 月皐集卷20, 附錄, 「行狀」(權載奎撰), “癸巳州牧 因方伯指揮設講約敦
請先生爲都約長 選州內之有學行者 授以講規 分敎各里 以春秋合講於州學 而使都
約長主之 又以多士之請庠塾臨講者多 丹城之新安社 三嘉之觀善堂最盛 侯伯來莅
必先遣吏存問 饋以酒肉 或躬訪諏以政事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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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2. 조성가의 월고일기3)
조성가는 咸安人이며, 자는 直敎, 호는 月皐이다. 1824년 匡植(1804-
1879)과 金海金氏 錫信의 딸 사이에서 당시 진주 소속이었던 하동군 옥종면
회신리에서 태어났다.4) 그의 가문은 10대조인 益道가 이괄을 토벌한 공로
를 인정받아 공신에 책훈된 이래 함안과 진주 일대에서 줄곧 사족의 지위를
유지해왔다. 조성가 가문이 옥종면에 들어오게 된 것은 조성가의 증조 繼鎭
때이다. 계진은 晉陽鄭氏 德輿의 딸을 초배, 南平文氏 以明의 딸을 계배로
하였는데, 계진이 병으로 타계하자 문이명의 딸이 곧바로 순절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녀의 순절을 기리며 정려를 내렸으며,5) 이후 조성가 가문은
옥종의 월횡리와 인근의 회신리 일대에 세거하였다.
그러나 조성가 가문은 오랫동안 과거에 급제하거나 사환의 길에 나아간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였다. 이에 조성가의 부친 匡植(1804-1879)이 옥종,
3) 월고일기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권오영
교수로부터 자료의 안내를 받았다. 이후 서부경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에 관해
김준형, 배항섭, 전병철 교수로부터 기존 자료 외에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보라는
가르침을 받고, 월고일기중 甲午日記를 상세히 검토하여 본고를 작성하게
되었다. 일기에 나오는 지명 고증은 하동문화원 강만기 사무국장의 안내로 옥종
면 정수리의 한충영 선생을 소개받아 큰 도움을 받았다. 한 선생은 일기에 나오
는 지명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며, 필자와 함께 여러 차례 옥종면 일대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함께 답사했다. 또한 한 선생은 월횡리의 고무릉에 거주
하고 있는 정문영 선생을 소개해 주었으며, 정문영 선생을 통해 甲午日記에 나
오는 사림산 일대의 유적에 대해서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이 기회에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를 드린다.
4) 하동군 옥종면 일대는 1906년 진주에서 하동군으로 편입되었다. 이 때 사월, 삼
장 등은 산청군, 청암, 종화 등 하동군, 문선, 남양 등은 사천군으로 이속되었다.
(玉宗面誌編纂委員會編(2000), 玉宗面誌, 回想社, 163쪽)
5) 玉宗面誌編纂委員會編(2000), 玉宗面誌, 回想社, 514-516쪽.
서부경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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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 일대에 천석군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경제적 기반을 축적함에 따라, 자
손들의 학문성취에 힘을 쏟았다. 조성가는 부친의 적극적인 보살핌 아래 당
대 서부경남지역의 큰 학자였던 河達弘 등과 학문적으로 교유하면서 1853
년에는 하달홍이 사는 월횡으로 이주하였다.6) 월횡은 산간 마을인 회신에
비해 비교적 평야가 넓고 안계나 두양, 옥종, 북천 등의 사족들과 왕래하기
가 용이한 곳이었다. 또한 자신의 조부, 조모 등의 거주처로서 조모의 정려
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조성가의 가문으로서는 유서가 깊은 곳이기도 하
였다. 조성가는 이곳에 이주하면서 하달홍 등에 의해서 결성된 시단에 참여
하였다.
당시 이곳에서는 당시 지리산과 덕천강의 아름다움, 그 속에서 隱逸自適
하는 선비들의 日常을 노래하는 기풍이 사족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였다. 하
달홍은 옥종의 월횡과 안계 등지의 진양하씨, 북천의 인천과 두양의 전주최
씨, 옥종의 남원양씨, 수곡의 해주정씨 등 당색을 가리지 않고 교유하면서
시단을 이끌어갔다. 조성가 역시 하달홍이 이끄는 시단에 참여하면서 노론
이나 남인에 구애하지 않고 교유하면서 많은 시작품을 남기게 되었다.
또한 조성가는 부친의 명에 따라 본격적인 학문 성취를 위해 27세인 1852
년에 호남의 名儒였던 奇正鎭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7) 이후 그는 기정진 문
인으로서 호남과 영남의 많은 학자들과 사귀게 되었다. 호남지역 인물로는
장성의 기양연이나 기우만이나 기양연, 기기진 등 기정진의 친족, 김인후의
후손으로서 송시열이나 정여창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던 선공감감역
金祿休(1827-1883), 담양의 양녕대군의 후손으로서 경제력과 학문 모두 높
6) 月皐集 卷20, 附錄, 「家狀」, “壬子陪敎官公自檜山返月里定省外恒處塾舍冠帶
終日以延賓友書卷之傍”
7) 조성가는 자신의 부친인 匡植(1804-1879)이 赤手空拳으로 가업을 일으켰으며,
학문을 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자신의 동생과 자식들에게 그 성취를 기대하였
다고 하였다. 또한 조성가는 자신과 막내 동생인 性宙가 기정진을 스승으로 모신
것은 부친의 命이었다고 회고하였다(月皐集 卷18, 「先考贈童蒙敎官府君行
狀」) ; 이후 조성가의 행적은 月皐集 卷20, 附錄, 「家狀」과 「行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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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던 진사 李最善, 19세기에 보성의 천석군으로서 유명하였던 李志容(1825-
1891)과 자주 왕래하였다.
그의 명성은 영남에서도 높아 많은 학자들이 찾아왔으며, 향촌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치었다. 1877년에는 당대의 학자였던 寒洲 李震相(1818-1886)이
서부 경남의 많은 학자들과 함께 조성가를 방문하여 단성 사월리의 향음례에
참여하고 남해의 금산을 함께 유람하였다. 또한 조성가는 1893년에 진주 지
역 향약의 도약정이 되어 향약을 주관하였으며, 1896년에는 함양의 남계서
원 원장이 되어 강규를 새롭게 정하였다. 이처럼 그는 당대 서부경남을 대표
하는 학자이자 명망가였다. 그리고 그의 가문 역시 서부경남의 함양의 정여
창 가문이나 산청의 안동권씨 권준 가문, 진주의 해주정씨 정문부 가문 등 당
대 서부경남을 대표하는 노론가문과 혼인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진주 관아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성가는 부유했기 때문
에 진주 관아에 많은 조세를 부담하였고, 흉년이 들 때는 진휼에 필요한 곡
식을 자주 바쳤다. 예컨대 1876년 진주에 가뭄이 들자 조성가는 곡식 3백석
을 마련하여 관아에 바치기도 하였다.8) 조성가는 이러한 학문적인 명성과
덕망으로 1883년 선공감감역에 제수되었으며,9) 1890년부터는 경상도 관
찰사로 부임한 李憲永이나 李容稷, 진주목사로 부임한 成箕鎬, 李恒儀 등과
교유하면서 향촌 문제에 조언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서부경남이나 호
남 지역의 많은 학자나 관리 등을 사귀었기 때문에, 가까이는 옥종이나 수
곡, 단성, 산청, 고성, 하동, 멀리는 호남의 장성이나 영남의 함양에까지 동
학농민혁명에 관한 폭넓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8) 趙性家, 「丙子日記」6월 11일조, “官令執穀見督 余參百石送季豪入納” ; 1876년
진주 일대는 1804년 이래 가장 큰 한발을 겪었다(같은 책, 윤5월 7일, “九十老人
云 今年旱災 與甲戌年同 而未秧過之 嗷嗷之情 不可形言”). 이에 관에서는 백성
들에게 관령으로 곡식을 거두어들였는데, 조성가는 동생 季豪 즉 趙性宙을 통해
서 3백석을 바쳤다. 1876년 가뭄은 12월에 들어서야 비가 내려 해갈되었다(같
은 책, 12월 11일, ”夜雨快浥塵 自六月十六日後 始聞簽鈴有聲).
9) 日省錄 高宗 2년(1883) 2월 17일조.
서부경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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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고일기는 월고 조성가가 81세로 타계하기 한 달 전 1904년 4월 28까
지 기록하였던 개인일기이다.10) 매년 기록하였을 것이나, 현존하는 것은
1855년, 1857년, 1866년, 1867년, 1870년, 1871년, 1873년,1876년,
1877년, 1882년, 1884년, 1887년부터 1894년까지의 8년, 1896년부터
1904년까지의 8년 등 도합 27년 분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1855년, 1857
년, 1867년, 1870년, 1873년 일기는 앞 부분만 일부 남아있고, 그 밖의 연
도의 일기는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월고일기에는 매일 날씨와 조성가가 읽었던 책, 내방객의 이름과 숙박
여부, 그날그날 보고 들었던 이야기나 중요한 사항이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
다. 본고와 관련된 甲午日記는 1894년 1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의 기
록인데, 9월 10일부터 30일까지는 내용이 결락되어 있다.11) 이 갑오일
기에는 월횡과 회신 등 조성가가 거주하였던 지역을 중심으로 정수, 용동,
북평 등 옥종이나 하동, 진주의 수곡, 단성의 사월, 진주관아, 멀리로는 산청
이나 함양, 노사학맥의 호남 지역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조성가는
이러한 폭 넓은 교유를 통하여 수많은 정보를 입수하여 기록하고 있기 때문
에, 조성가 일기는 약간의 결락 부분을 제외하고 1894년 서부경남지역 동학
농민혁명의 지역적 특성과 구체적 상황을 조명할 수 있는 최적의 자료가 된
다고 할 수 있다. 동학혁명농민혁명과 관련하여 일기에서 비교적 자주 언급
되는 옥종면 부근의 하동과 산청, 진주 일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0) 월고 조성가는 조성가는 1904년 6월 6일 별세하였다( 月皐集 卷20, 附錄,
「家狀」).
11) 이후 월고일기 중 조성가가 갑오년에 작성한 일기는 甲午日記로 명칭을 통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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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 옥종면의 위치
그가 거주하였던 옥종면 일대는 현재는 하동군에 속하지만, 당시까지는
대평, 수곡, 시천, 삼장, 청암 등과 함께 모두 진주목 관할이었다. 이들 지역
은 서쪽의 하동부의 횡천이나 적량, 북쪽의 산청이나 함양, 남쪽의 사천의
곤명과 함께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그가 거주하였던 월횡리는 <도2>에서 알 수 있듯이 북쪽으로는 안
개, 종화, 두양, 백곡, 사월, 동쪽으로는 수곡, 남쪽으로는 용동, 정수, 북방
등의 여러 마을과 이웃하고 있으며, 서쪽은 지리산 자락에 해당된다. 이들
지역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한 덕천강이 지나고 있으며, 덕천강 서쪽의
여러 마을들은 지리산 자락인 우방산, 정개산, 사림산, 옥산, 고성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이들 마을과 산은 조성가의 갑오일기에 자주 언급되는 지
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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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 월횡리 주변의 마을과 산
다만, 조성가가 남긴 1894년 동학농민혁명 기록은 사실과 달리 소문을 적
은 것도 많아 자료이용에 상세한 검토를 요하기도 한다. 예컨대 3월 16일 기
록에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나 청군이 15명이 살해되었으며,12) 5월 6일 기
록에 동학농민군의 활동 때문에 장성의 김녹휴가 함양 개평에 피신했고,13)
5월 8일 기록에 4월 29일 원세개의 동생이 전주에 화약을 묻어두어 동학군
12) 甲午日記 3월 16일, “聞古阜民亂 殺其官 胡兵見殺者 十五名 七邑合聚不散云”
13) 甲午日記 5월 6일, “莘兄被創躱避于介坪” : 莘兄은 莘湖 金祿休(1827-
1899)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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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뿌리를 뽑았다는 것14) 등은 조성가가 일기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한 국내, 국제관계에 대해서도 사실과 다른 측면
이 있다. 즉 5월 9일 북쪽 지방에서 소요가 일어나 이미 北道 7읍은 러시아
가 할양하여 지키고 있는데 곧 철로를 놓을 것이라던가15) 원세개가 兵隊 8
천 명과 步卒 2만 여 명을 이끌고 전주에 내려갔으며, 관북의 9개 읍을 청나
라에서 빼앗고 고을 수령을 모두 쫓아냈다는 것16) 등은 사실과 다른 소식을
전하고 있어서 자료에 대한 상세한 검토를 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직접 목격하였거나 그가 거주하고 있었던 옥종이나 진주, 단
성, 사천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사실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비교적 정확
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따라서 서부경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확산이나
향촌사회의 대응을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3. 서부경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확산
서부경남지역은 동학농민혁명이 호남지역보다 뒤늦게 시작된 곳으로서, 1차 봉기 때나 집강소 기간 동안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타 지역보다 미약했고, 여러 가지로 진주 관아나 경상 우병영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지역에도 동학혁명이 발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지역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수년 전부터 여러 차례 자연 재해를 입고 있었으며, 1894년에 들어와서는 가뭄이 극심하였다. 그 중에서도 진주일대의 피해가 가장 극심하였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었다.17) 뿐만 아니
14) 甲午日記 5월 8일, “袁師世凱弟 去卄九日戌時 埋火藥全州城根 燒賊湖敵 而
未可信也”
15) 甲午日記 5월 9일, “北騷 已割北道七邑 使阿羅來戍 方治鐵路云”
16) 甲午日記 5월 11일, “袁大人率兵隊八千人步卒二萬 來全州……關北九邑爲淸
國所奪 官長皆爲所逐”
17) 黃玹, 梧下記聞2筆, “五日政府啓曰卽見嶺伯, 嶠南一省 荐被歉荒 民命阽危 百
弊日滋 全省繹騷 接濟奠安之策 ”
라 이러한 재해에도 불구하고 수령과 향리, 향임등의 수탈로 영세상인과 농민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18) 이에 이 지역 농민들 역시 이러한 사회, 경제적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혁명이 일어나기를 고대하였다. 그러한 정황에 대해 황현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 무렵 호남의 난리는 날마다 위급해졌다. 그러나 영남우도 일대는 아직 난이 일어나지 않아 관청의 명령이 먹혀들었으므로 군사권을 가진 관리와 지방수령들의 탐욕스러움과 포학함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백성들의 한은 점점 깊어져 날마다 적이 오기만을 고대하였다. 이런 까닭에 김인배가 진주를 침범하였어도 병졸과 백성들은 막는 사람이 없었고, 도리어 적을 인도하여 약탈하게 하였다.19)
수령의 탐학과 포악함 때문에 백성들의 한이 깊어져 호남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당시 서부경남지역에서는 호남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여러 가지 경로로 전해 듣고 있었다.
예컨대 조성가는 1894년 3월 16일 河哨官과 李海朝의 방문을 받고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나 관리를 살해하고 오랑캐 병사가 15명 살해당했으며, 7개 읍에서 모여서 흩어지지 않았다는 놀라운 소식이었다.20) 그날 다시 산청 대포에서 거주하였던 義禁莩事를 지낸 민치완의 둘째 아들의 방문을 받고 고부군수는 의금부에서 의금부에서 죄상을 조사하고 있으며, 오랑캐 병사는 15명이 아니라 2명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놀라움은 컸다.21)
18) 김준형, 앞의 글, 3-5쪽.
19) 黃玹, 梧下記聞2筆, “時湖警日急 而嶺右未亂 官令猶行 梱鎭守宰 貪虐不少 懲
民恨甚 日望賊來 故仁培之犯晉州 民無禦者 反導之使掠”
20) 甲午日記 3월 16일, “聞古阜民亂 殺其官 胡兵見殺者 十五名 七邑合聚不散云”
21) 甲午日記 3월 16일, “閔都事放還二十餘日 其次胤來訪 古阜守 只就理 胡兵之
見殺二名云 前聞過矣”
南冥學硏究 제4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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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호남지역에서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의 영향으로 서부경남지역에서도 그해 4월부터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서부경남지역에서 전개된 주요 사건을 표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표1>서부경남지역 동학농민혁명
구분 일시 주요 사건22) 갑오일기
1차 봉기
4월 중순
• 영장 박희방의 토포활동, 백낙도 처형.
• 9-16일, 덕산의 동학농민군 동향, 토포활동 집강 소기
6월 26일경
• 동학농민군의 함양, 안의 진출, 안의현감의 동학농민군 격퇴
• 5월 6일 동학농민군이 운봉을 넘음
• 6월 27일 함양에서 동학농민군의 진주목사의 신영마 탈취.
7월 7일 • 7일 하동광평에 嶺南義所 설치(박정주 접주)
15일 • 단성현 단계리 등 동학 농민군 출몰
• 17일 옥종, 덕산지역 동학농민군 활동
• 18일 하동에서 동학농민군 활동
• 7월 말 동학농민군 하동 집결
8월
• 5일 함양 개평지역 피해 극심
• 8일 하동의 민보군과 동학농민군 전투
• 19일 이후 동학농민군 활동 증대 : 鳳溪(19), 수곡(20), 마동(21)
2차봉기
9월1일
• 동학농민군(영호도호소, 하동동학군)과 민포군의 하동전투
2일
• 동학농민군의 하동 점령
• 진주 동학농민군榜文
• 동학농민군이 하동 일대에 집결하여 민포를 삼겹, 사겹으로 에워쌓음.
• 5일 砲軍이 모두 죽고, 시장 등 여러 건물이 불에 탐.
8일
• 평거 광탄진에 동학농민군 집결
• 6일 진주 영장의 동학농민군 회유 실패, 봉계에서 철수
1 1 일
-17일
• 동학농민군의 남해(11일), 사천(13일), 곤양(15일), 고성 점령
18일 동학농민군의 진주점령
29일 일본군의 하동 광평동전투
10월
9일 금오산 전투
14일 고성산성 전투
• 14일 고성산성 전투
• 15일 동학군 사망자 320명- 270명
22일
동학농민군의 하동 전투 패배→ 광양
• 17일 대구중군과 일본군의 국동포 도륙
• 20일-22일 하동전투
첫째 1차 동학농민봉기 때에는 덕산 일대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했다. 서부경남지역은 1892년 삼장에 거주하고 있었던 백낙도가 전라도 장수군 출신의 柳海龍으로부터 도를 배워 점차 동학을 퍼뜨렸으며,23) 1893년 보은집회에 하동, 진주접 소속의 동학도가 참여하였다. 이후 1894년 호남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덕산 일대에서 白樂道(道弘)를 정점으로 하여 孫殷錫을 중심으로 高萬俊, 朴正龍, 林末龍 등이 三莊, 矢川, 沙月, 靑巖面 등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 활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24)
이에 경상우병영에서는 4월 초 營將 朴熙房을 덕산에 파견하여 백낙도 등 동학의 우두머리를 추포하고, 15일 효시하였다.25) 갑오일기에 의하면 박희방이 이끄는 우병영군이 동학 魁帥 10명을 추포하자 동학도들이 덕산의협곡에 피한 뒤 다시 4백명의 동학도를 모아 박희방에게 항의하자 박희방은 군사 5백 명으로 위엄을 보인 뒤 해산시켰다. 그리고 백낙도와 우두머리 2명을 15일 효시하였다.26) 이후로도 백낙도를 처형한 것에 항의하여 수 많은 들어와 항의를 함으로써 여전히 그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22) 김준형과 표영삼의 앞의 글 참조.
23) 吳圭煥(2005), 山淸鄕土史(山淸鄕土史編纂委員會篇), 394쪽.
24) 김준형, 앞의 글, 8-9쪽.
25) 김준형, 같은 글, 9쪽.
26) 甲午日記4월 9일, “樸學黨逃躱入峽 朝令捕戮 而營長出市 禽之云” ; 4월11일“匪類之據閒察者 四百餘名 營長率五百名出來 示以剿滅之威 而實以背師歸正 曉喩解送云” ; 4월 16일, “閒察匪類三漢梟示云”
조성가 역시 4월 16일에 고부지역에서 관군 90명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며칠 간 독서를 할 수 없었으며,27) 5월 2일에는 동학농민군의 나주, 강진이 함락되었으며,28) 5월 6일에는 장성의 月坪, 莘村 등 촌락이 약탈되고,29) 동학농민군이 운봉을 넘어 함양 介坪으로 넘어가려고 한다는30)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놀라고 있었다.
둘째, 호남지역에 집강소가 설치된 이후 서부경남지역에서도 점차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었다. 먼저 서부경남지역 동학농민군 활동이 활발해 진 것은 하동이나 호남지역 동학농민군이 순회하면서 각 지역의 민폐를 교정하며, 동학농민봉기를 촉구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호남의 금구에 사는 동학도인 韓憲敎는 동학의 교리가 보국안민에 있으며, 수령의 잘잘못과 무단토호를 징치하면서 각 지역에 기포하였다고 하였으며,31) 하동의 崔鶴鳳과 金炳斗 역시 전봉준의 지시로 서부 경남지역의 각 고을을 순회하였던 것이다.32)
조성가 일기에도 이러한 정황이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6월 27일에는 진주목사로 부임하였던 柳𤫓이 함양에서 동학농민군에게 新迎馬 20필을 빼앗겼다거나,33) 하동시장에서 7월 18일 동학도가 5, 6백명이 진출하여 선악에 대한 상벌을 시행하여 2명을 살해하였으며, 요호층에게 재물을 요구하였다 는 것 등 그 활동이 점차 증대되고 있었던 점이 기록되어 있다.34)
27) 甲午日記 4월 16일, “數日未看書 四方聽聞 駭然故也 古阜屯賊三千餘人 襲殺官九千餘名云 ”
28) 甲午日記 5월 2일, “湖南之亂 陷羅州江津云”
29) 甲午日記 5월 6일, “湖賊入月坪莘村兩村 奪取財物”
30) 甲午日記 5월 6일, “且賊黨踰雲峰 將入介坪 一村驚怯”
31) 吳宖黙, 慶尙道固城叢瑣錄2, 甲午 8월 16일, “大凡 我道人 方以輔國安民爲己任 而守令得失及武斷土豪之糾察懲治 亦在其中 近聞此州有民鬧之事 不容不探採實狀 矯革弊端 一邊起包”
32) 김준형, 앞의 글, 13쪽.
33) 甲午日記 6월 27일, “本官新迎馬二十匹 爲湖匪所奪於咸陽境界云”
이후 서부경남 지역에서는 곳곳에 민란이 일어나면서 7월 말 이후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예컨대 조성가는 그 무렵 옥종의 청수에 거주하였던 정처중으로부터 경주 부근의 20 여 읍을 비롯해서 옥종과 가까운 고성과 진해에 민란이 일어났으며, 3월 이후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서 쌀 1되에 무려 4냥 5전으로 폭등하였다는 것 등을 전해 들었다.35) 당시 서부경남을 비롯한 영남 지역은 7월 중순 이후 민란이 급증하였는데, 이를 표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표2> 영남지역의 민란36)
1월에 2회, 3월에 1회 간헐적으로 일어났던 것에 비해 7월 중순 6회에 이어 매주 최소한 1회 이상 민란이 일어나고 있다. 민란이 일어나는 지역도 경남 대부분에 걸쳐 있다. 이러한 민란과 맞물려 7월 중순 이후부터는 사천, 고성, 진주, 단성 일대에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먼저 백낙도 등이 활동했던 덕
34) 甲午日記 7월 18일, “河東市 東徒五六百名入來 賞善罰惡 殺二人云 四方見攘奪者 村村有之云”
35) 甲午日記 8월 4일, “淸水鄭處中 日前自慶州鎭營還 ; 같은 책, 8월 5일, ”淸水書慶州近地二十餘邑 民變起 自三月以後 元無一點雨 米一升價 四兩五錢云 固城鎭海民變 亦起云“
36) 김준형, 앞의 글, 4-6쪽.
일시 민란발생지역 비고(횟수)
1월12일 함안 1 16,17일 사천 1
3월 말 김해 1
7월 중순 영해, 영덕, 경주, 연일, 영천, 고령 6 21일 고성 1 28일 하동 1
8월 초순 산청(2일), 울산 2 20일 언양, 김해 2 27일 기장, 의령 2
9월 3일 진해, 新寧2 14일 밀양 1
산 쪽의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7월 16일 옥종의 부호들에게 재물을 요구하는 등 덕산을 벗어나 그 활동반경을 점차 넓혀갔다. 조성가 일기에 따르면 7월 17일에 동학농민군 16명이 옥종 용동을 거쳐 월횡으로 들어왔는데, 조성가는 이들 12명의 아침밥을 차려줄 수 밖에 없었다. 이중 4명은 이미 옥종 용동에서 아침식사를 하였다. 조성가는 이들에게 또 술1 동이, 돈 20냥, 마포 1필과 풀신 2건, 남포 1줌을 더 내 주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輔卿도 이들에게 마구와 안장을 빼앗겼다.37) 이들은 3일 뒤인 7월 20일 덕산출신의 동학농민군으로 드러났다. 덕산인들이 草輩를 모아 동학농민군에게 물건을 빼앗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자 월횡에 사는 조철규도 7월 20일 노비를 보내어 안마를 찾아옴으로서 확인된 것이다. 당시 덕산쪽의 동학농민군들은 백낙도가 처형된 이후로도 여전히 흩어지지 않고 활동하고 있었으며, 단성과 수곡을 거쳐 옥종에까지 나타났던 것이다.
이후 7월 말 이후 하동에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났다. 조성가의 일기에도 8월 1일자 기사에서 하동읍에서 동학농민군이 대규모로 집결한 사실을 전하였고,38) 8월 4일자 기사에서도 花開의 砲軍 천 여명이 하동읍에 모여있는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여 수백 명을 죽이자 동학농민군이 강을 건너 광양으로 되돌아갔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8월 19일 사천 곤명의 鳳溪에서 대규모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진주영장 박희방이 동학농민군의 위세에 눌려 관인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경상우병사 민준호가 8월 19일 장계를 올려 박희방이 도주한 사실을 조정에 알린 사실에서 확인된다. 법무아문에서 는 박희방의 죄상을 묻기 위해 경상감사로 하여금 압송할 것을 지시하였다.39) 조성가 역시 그날 봉계에서 다시 동학농민군이 都會하니, 꺼지고 있
37) 甲午日記 7월 17일, “東徒十六名放砲 直入吾家 給朝湌十二盂 四名得喫龍洞云
沽酒一盆 錢四十兩 麻布一匹 草履貳件 南草一把 好言致辭而去 輔卿馬具鞍見奪”
38) 甲午日記 8월 1일, “致和出蘭洞 東徒大聚河邑云
39) 日省錄 高宗 31년(1894년) 8월 19일, “綱)命晉州營將 朴熙房派員押上 目)法
務衙門啓言慶尙右兵使 閔俊鎬狀啓內投印逃難之晉州營將 朴熙房罪狀令攸司稟處
서부경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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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 재가 다시 불타게 되어 두렵다고 하였다.40)동학농민군은 8월 20일 이후에는 진주의 마동 일대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조성가의 일기에 따르면 동학농민군은 8월 20일 수곡장터를 거쳐 21일 마동에 모였는데, 산에서 온 자도 4,5십명에 달했다.41) 이들은 곳곳에서 비협조적인 사족을 체포하였다.42) 단성 사월리의 하겸락이나 정청송 등 여러명의 사족이 마동의 동학농민군의 도회소에 붙잡혀갔고, 경상 우병영에서 도회소에 편지를 보내 석방되기도 하였다.43) 이처럼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진주 마동 등지에서 점차 활발해지자, 병사 민준호는 8월 28일 동학농민군을 방어하기 위한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조성가를 초청하기도 하였다.44) 이
미 진주일대는 경상 우병영에서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커져 버렸던 것이다.
셋째, 서부경남지역에서도 9월 이후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가 일어났다.
이 때 일어난 봉기는 주로 영호도호소에서 서부경남지역을 장악하여 동학농민군의 활동의 폭을 넓히고 일본군의 침략을 격퇴하는데 주안점이 두어졌다. 먼저 9월 1일 영호도호소 측에서 광양, 순천포의 동학농민군이 하동지역 동학농민군의 안내를 받아 섬진강을 건너 진격해왔다. 이미 하동부사 이채연은 도망갔고, 대신 主簿를 지낸 金鎭玉이 민포대장이 되어 하동읍을 방어하였다. 하동의 민포는 통영에서 가져온 대완포 12문을 강안에 설치하고 관아의 뒷산인 鞍峯에 진을 쳤다. 동학농민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 한 갈래는 섬진강을 건너 하동부의 북쪽에 진을 치고, 다른 한 갈래는 망덕진에서 배다리를 이어놓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부 남쪽에 진을 쳤다.
事啓下矣請令該道臣派員押上允之”
40) 甲午日記 8월 19일, “東徒今日鳳溪大會 旣息之灰 更燃可怖”
41) 甲午日記 8월 20일, “東徒會水市 自山中出者四五十名云”
42) 甲午日記 8월 21일, “四方來者會馬洞而往 丹城伻來言 河江界見執而去 而已
台石來 曰朝起未捲衿枕 五名突入傳令 讀未了 五十餘名闌門而入 卽驅迫 不暇着
屨着網 而捉去連格兩令 及子一孫一隨之 鄭靑松亦捉來”
43) 甲午日記 8월 22일, “兵本各一日三書于東會 江界淸松具見放”
44) 甲午日記 8월 28일, “兵使謂有緊商 致書家兒請來 答以亟往”
南冥學硏究 제4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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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9월 1일 저녁에 시작되었다. 동학농민군이 쳐들어오자 하동민포는 대완포 사용방법을 몰라 발사가 지체되고 포탄이 모두 공중에 날라갔다. 이에 겁을 먹고 하동민포가 도망치기 시작하였으며, 김진옥 역시 화개포군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중과부적으로 하동부 서쪽으로 피하였다. 하동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하동부에 都所를 설치하고, 민포군의 집을 불지르고, 화개에 올라가 보복하였다. 하동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5,6일을 더 머물고 광양으로 되돌아가고, 일부는 영호도호소의 대접주 김인배를 따라 진주로 향하였다.45)
이 전투에 대해 조성가는 9월 2일 하동부에 구례 등지에서도 수 많은 동학농민군이 몰려와서 동학농민군이 하동과 적량 사이인 錦岡, 牛嶺 등지에 수천명이 진을 쳤으며,46)하동의 민포가 동학농민군에 의해 삼겹, 사겹 포위되어 중과부적으로 대적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였다.47) 당시 하동전투에는 하동, 광양, 순천포 등의 영호도호소 외에 구례나 남원 등지에서도 동학농민군이 참여하였으며, 동학농민군에 의해 민포 뿐만 아니라 하동 외각이 겹겹이 포위되었던 것이다. 이어 조성가는 4일에 멀리 하동에서 곳곳에 연기가 사방에 솟구치는 것을 목격하였다.48) 이는 다음날 피난민을 통해 하동읍에서 동학농민군이 사방을 포위, 방화하여 생긴 연기인데, 모두 죽었으며, 문묘와 객사, 관묘 외에 위, 아래 장터에 있는 집이 모두 불탔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또한 조성가는 하동지역에는 9월 5일 무렵 동학농민군이 8곳에 진을 치고 있으며, 매 진에는 2천여 명 이상이 주둔하고 있고, 49) 7일에는 악양과 화개에까지 동학농민군이 진출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50)
45) 梧下記聞第2筆, 9월 1일 ; 김준형, 앞의 글, 18쪽.
46) 甲午日記 9월 3일, “朝前檜報 曰東徒昨日河市 自求禮來者數萬 越兎嶺來者亦
同 自尋芳村上來 數千陳於錦岡及牛嶺”
47) 甲午日記 9월 3일, “民砲在邑內 爲東徒三匝四圍 困在垓心 衆寡相懸 雖合戰
必不敵 而將入晋云 洶洶不可狀”
48) 甲午日記 9월 4일, “夕陽望見河東烟焰 四處漲天”
49) 甲午日記 9월 5일, “砲軍皆沒 蓋四圍而放火 未知幾名得脫 而文廟客舍關廟外
上下市家舍 盡入燒中 男女老弱 免者全無 邑內各家産什物 船載而去 八處設陣 每
陣似不下二千餘名”
서부경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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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이 하동에 진출하자, 남해, 사천, 고성 등지에서도 동학농민군이 잇달아 봉기하기 시작하였다.51) 남해에서는 9월 11일 호남지역 동학 농민군의 지원을 받아 장악하였고, 사천에서도 9월 13일 동학농민군이 관아를 점거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고성에서도 동학농민군 600 명이 읍내에 머물면서 부민들을 징치하였다.52) 조성가 일기에서도 진주영장이 하동의 동학 농민군을 효유하기 위하여 사천의 봉계에 이르렀으나, 동학농민군이 결코 흩어지지 않겠음을 깨닫고 돌아왔다고 함으로써, 사실상 하동이나 사천, 진주, 단성 일대의 동학농민군을 해산할 방도가 없음을 전하고 있다.53)
진주지역은 9월 8일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이 전개되었다. 9월 8일 平居 廣灘津에 진주 일대의 73개 면의 주민들이 면마다 100명 씩 죽창을 들고 모였고, 10일에는 진주에 충경대도소를 설치하여 진주를 장악하였다.54) 진주 지역의 폐정개혁과 왜적의 침입을 막아내고자 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동학농민군은 각 里洞의 里任, 洞掌들이 자기지역의 민폐를 교정할 것과 동학농민군이나 왜적의 방어에 호의적인 민준호가 갈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며, 大都所가 기준한 표준이 없이 사사로이 토색한 자도 널리 신고하도록 함으로써 진주지역 동학농민혁명의 목표가 폐정개혁과 외세를 물리치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55)
50) 甲午日記 9월 7일, “彼魁留河 而彼黨往花岳將陷之 而先放火云”
51) 梧下記聞第2筆, 甲午 9月
52) 김준형, 앞의 글, 20-21쪽.
53) 甲午日記 9월 6일, “爻象聞益罔測 營將始以曉喩彼黨 往河東而至鳳溪 聞其爻
象 萬無曉喩可散之道 而且生怯故還來云” ; 당시 경상 우병영은 더 이상 동학농
민군의 활동을 저지할 힘이 되지 못하였다. 전술하였듯이 진주영장이 8월 중순
도주하였으며, 경상우병사 민준호는 겁을 먹고 하동에서 급한 형편을 보고하였
는데도 군사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고 하였다(高宗實錄卷32, 고종31년(1894)
12월 27일).
54) 김준형, 앞의 글, 19쪽
55)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南站發甲第152號 「東學黨의 檄文通報 및 情報通知要
請」, 139-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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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9월 14일에는 진주 대여촌 민인들이 읍폐를 교정하기 위해 각면에 통문을 보내 읍내에서 취회하고 동헌에 들어가 죄수를 석방하였으며, 9월 17일에는 하동에서 진주로 수천명의 동학농민군이 들어와 각 공해에 접소를 설치하였다. 이 때 참여한 동학농민군은 진주를 비롯해서 단성, 하동,사천 등 서부경남 지역에서 주축을 이루었으며, 남원, 구례 등지의 호남 동학농민군도 적지 않았다. 이어 18일에는 영호대접주 김인배가 순천 광양의 동학농민군 1,000여명을 이끌고 입성하였다. 김인배는 목사와 병사의 회유를 받아들여 진주를 퇴거하고 삼가지역으로 옮겨갔으나, 진주일대는 관속들이 모두 도망쳐서 병사와 목사 등이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56)
이처럼 동학농민군이 서부경남 전역을 점령해가자, 조정과 감영에서는 대구판관 지석영을 토포사로 내정하여 군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합동하여 토벌하도록 지시하였다. 경상감사 조병호의 건의로 조정에서 9월 25일 지석영을 討捕使로, 안의현감 趙元植을 助防將으로 임명하자,57) 지석영이 토포사로 하동, 진주 지역에 파견된 것이다. 일본측에서도 서부경남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9월 25일 부산에서 일본군 3개 소대 150명을 비롯해서監理署 書記 2명과 署隷 15명, 幕丁 153명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배편으로 창원 마산포에 도착한 후 먼저 藤坂 소위가 이끄는 부대가 29일 하동에 진출하여 하동 광평동에서 동학농민군을 패주시켰다.
이어 10월 7일에는 곤양에 도착한 스즈키(鈴木) 부대와 지석영의 관군과 합류가 이루어졌다. 전투는 10월 10일 금오산과 10월 14일 고성산성에서 벌어졌다. 10월 10일 스즈키 부대는 곤양 서쪽 10리 떨어진 금오산에 동학농민군이 집결하는 것을 보고, 세 방향에서 공격하여 5명을 살해하고 28명을 생포하였다. 58)
56) 김준형, 앞의 논문, 21쪽
57) 承政院日記고종 31년(1894) 9월 25일.
58)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 157-158쪽. “1894년 10월 9일 경상 스즈키, 부산병
참사령부에 보고 ”
서부경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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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일본군과 동학농민군은 14일 북평의 고시랑보 즉 고성산성에서 향후 승패를 가르는 결전을 치루게 되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백곡과 수곡을 거쳐 병력이 크게 불어났으며,59) 일본군과의 결전을 위해 북평의 고성산성으로 옮겨갔다. 이 뒤를 일본군이 추격해 옴에 따라 고성산성 일대에서 전투가 발발한 것이다.60) 고성산성은 남쪽이 가파른 경사로 되어 있어서 천험적인 요새지를 이루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산꼭대기 疊壁
에 의지하여 방어하는 한편, 일부 북쪽으로 퇴거한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의 우측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무기나 전투기술에서 월등한 일본군의 화력이 눌리어 동학농민군은 얼마 안가서 패배하고 수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주하였다. 일본군은 186명의 동학농민군 사체를 수습하였고, 2명을 생포하였으며, 총, 칼, 화약, 승마, 화폐, 쌀 등을 다수 노획하였다고 한다.
조성가의 일기에서도 14일 진시 즉 8시경부터 미시와 신시 사이인 오후 3시까지 고성산성에서 포성이 땅을 흔들고 흙 먼지가 공중에 넘쳤으며, 동학농민군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사망자도 얼마나 되는지 파악할 수 없다고 하였다.61) 조성가는 15일이 되서야 비로소 전투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일본군 4,50명이 밥을 먹고 북평촌 앞의 물을 건너 고성산보를 향해 총을 발사하기 시작하였는데, 총의 성능이 뛰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자도 총알에 맞은 자는 곧바로 쓰러졌다. 고성산성에 들어가지 못한 자는 사방으로 도망쳤으며, 산성에 들어간 자는 모두 피하지 못하고 죽었다. 죽은 자는 적간장교가 수급을 헤아려 보니, 모두 3백 20명 또는 2백 70명으로 달하였다.62)
59) 조성가 일기에는 12일에 백곡에 모인 동학도의 숫자가 1,000 여명이 넘는데 계속 모여들고 있었고, 13일에는 수곡장터에 만여 명이 집결하였다고 하였다
(甲午日記 10월 12일, “兒輩登士林頂上 望見栢谷前萍 聚者似過千餘名 而來者
相續” ; 甲午日記 10월 14일, “樸徒水市結陣者 萬餘人”).
60) 고성산성 전투는 김준형, 앞의 글, 25쪽 참조
61) 甲午日記 10월 14일, “與立夫諸人 登枾洞後峯 辰刻砲聲 起於北坪古時良堂
山堡 倭兵與東徒合戰 砲聲沸地 煙埃漲空 未申之交 烟消山寂 故下山 自戰場逃去
者四散 東徒敗沒 死者姑未料幾許”
62) 甲午日記 10월 15일, “聞倭兵四五十人 昨日飡後 渡北坪村前水 望山堡而發
銃 相距近十里而中者輒僵 後至未入城者 皆逃散 立於城中者 皆沒死者 或云三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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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조성가는 16일에는 자신이 머물고 있었던 옥종의 회신리에서도 동학농민군에 가담하였으나 모두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았다.63)이어 10월 17일에는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대구 중군이 왜병대 5백명을 이끌고 동학농민군의 중심지였던 덕산의 국동포를 도륙하였으며,64)18일에는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추격하면서 하동에 이르렀다. 19일에는 일본군이 섬진강 건너편의 광양의 귀등산에 집결해 있는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으며, 22일에는 섬진강을 건너 하동부쪽으로 진격해왔던 동학농민군을 관군과 일본군이 합세하여 결정적으로 패배시킴으로서 서부 경남지역의 동학농민군의 항전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65) 이후 지석영과 일본군은 10월 24일 하동을 떠나 11월 1일 부산에 도착하여 동학농민군의 토벌작전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66)
4. 향촌사회의 대응
당시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은 진주에 있었던 경상우병영의 관할하에 방어체제가 구축되어 있었다. 경상우병영은 경상도의 오른쪽 즉 상주진관, 진주진관, 김해진관, 선산진관 등 4개의 巨鎭을 두어 관할하고 있었고, 각 진에 많은 諸鎭을 배속하였다. 각 진에는 행정 수령을 맡은 수령이 있었으며, 상주, 진주, 김해에는 군사훈련을 전담하는 營將이 배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은 종2품의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정점으로 종3품의 진주 영장(虞侯)을 비롯한 다수의 군관과 영리들에 의해서 관할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67)
二十 或云二百七十餘 摘奸將校出來計級 如是云”
63) 甲午日記 10월 16일, “檜包逃去云”
64) 甲午日記 10월 17일, “大邱中軍率胡倭兵隊五百爲屠戮菊洞包入去云”
65) 표영삼( 1993.4), 「경상도 남서부지역의 동학혁명」, 新人間515호, 38-39쪽.
66) 김준형, 앞의 글, 26-27쪽.
67) 우인수(2007), 「朝鮮後期 慶尙右兵營 文書包裝과 呈家式」, 歷史敎育論集39,
서부경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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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부경남지역은 4월초 봉기가 시작되었고, 5월 전주화약 이후 호남지역 동학농민군이 각 지역으로 흩어짐에 따라 호남지역 동학농민군이 영남에 진출할 우려가 있었다. 이에 경상 우병영에서는 각 지역에 동학농민군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각 지역의 사족들을 군무참모관으로 배정하고, 지역별로 성첩을 수리하고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갑오일기에 의하면 6월 7일 경상우병영에서 군무참모관으로 朝官 7인, 진사 13인, 선달 22인을 뽑았다. 각 지역의 사족들을 동원하고자 한 것이었다. 월횡에서는 조성가의 족질인 조철규가 선발되었다.68) 이어 6월 8일에는 경상우병영에서 각 지역별로 전령을 보내, 군무첩을 보내고, 城堞의 수리와 軍器 보수, 將士의 糧料 및 軍務官의 給料를 마련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향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알려왔다.69)
6월 16일에는 조성가의 아들 趙宗奎도 군무참모관으로 차출되었다. 이에 대해 조성가는 군무참모관을 차출하는 것은 군량미를 구획하기 위함인데, 병사가 조정의 명령이 내리기 전에 마음대로 차출하는 것은 세상의 변고이며, 이는 고을의 弊流들이 부추겨서 이러한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70) 그러나 6월 20일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던 아들 조종규가 조철규와 함께 진주 읍에 들어가 향회에 참가하였으며,71) 6월 21일 饒戶는 군량미 부담을 면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해왔다.72)
連山令226-227쪽.
68) 甲午日記 6월 7일, “兵使以軍務參謀官 選朝官七人 進士三人 先達二十二人
此村景岡以朝官與焉” ; 景岡은 趙轍奎(1843-1900)의 字이다. 조철규는 본관은
함안이며, 호는 雪樵이다. 그는 월횡리 출신으로서 학행이 뛰어나서 永懷園守奉
官을 지냈으며, 그의 동생 東奎 역시 도사를 지냈다(權載奎, 而堂集卷42, 墓碣
銘, 「雪樵趙公墓碣銘」).
69) 甲午日記 6월 8일, “午後 兒也往龍洞還 軍務帖將續出四方 而傳令選員會中
以修城堞繕軍器區劃壯士糧料及軍務官料四件商議事 將爲大鄕會運”
70) 甲午日記 6월 16일, “兵使 以家兒名差出軍務參謀官 公帖出來 此鄕四十餘人
也 區劃軍糧之策也 兵使擅差朝士於朝令未出之前 世變也 鄕內弊類 慫慂使然也”
71) 甲午日記 6월 20일, “兒也入邑 三夫轎 致和擔輔卿 同行”
72) 甲午日記 6월 21일, “三夫出來 兒書鄕會裏許 姑未知 而饒戶無一可免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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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조성가는 6월 22일 등 인근 사족에게 진주우병영에게 청원하여 자신에게 할당된 배분을 줄여줄 것과 노친을 모시기 때문에 아들이 番을 서는 것을 면하게 해 달라는 글을 보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연산령 역시 兵使가 음직을 받은 자나 진사를 군무참모관에 차출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나 한 사람도 분을 씻을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통탄스럽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답하여왔다.73) 이러한 사실을 통해 당시 경상 우병영에서는 사족을 동원하여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는데, 사족들이 동학농민군에 대해 적극적으로 맞서고자 하지 않았으며, 특히 군량미 부담은 더더욱 원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상 우병영의 강압에 의해 조성가는 어쩔 수 없이 군량미를 부담해야 했다. 당시 옥종면의 사족들은 형편에 따라 5백냥과 150냥 등이 부과되었으며,74) 조성가 역시 아들 조종규를 통해 500냥을 부담해야 했다.75)
또한 이 무렵 서부경남 지역은 마을마다 五家作統이 강화되고 있었다. 오가작통은 6월 초 경상감영의 甘結에 의해 영남의 각 고을별로 실시되었다.경상감영에서는 호남의 동학농민군이 淸軍에 몰려 도망치면 반드시 영남으로 갈 것이기 때문에 미리 단속해야 하는데, 이는 五家作統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서 공문을 각 고을에 보내 5가작통을 실시하라고 지시하였던 것이다.76) 이에 영남의 각 고을에서는 5家에 1統을 두고 통에는 統首를 두며, 5통에는 頭領, 10통에는 統長을 두며, 1洞에는 領首를 두어, 각 洞에서는 오고가는 자를 살펴서 수상한 자취가 발견되면 통수→두령→통장→영수→관아→감영으로 보고하는 체계를 갖추었다.77)
73) 甲午日記 6월 22일, “柬沙令 使連山令 耑書於矗閫 以蕩産減分排等 以老侍免
守番 答以蔭進 差出軍務參謀官 此是往帖所無之例 而無一人出雪憤洗之言者 大段
寒心 此豈連山令之所可挽回者耶云云”
74) 甲午日記 6월 26일, “全敬叔邑回 兒書云鄕會參 五百兩伯溫景郊同 輔卿一百
五十兩”; 당시 옥종에서 5백냥을 부담한 인물은 조성가 외에, 백온과 京敎임을
알 수 있는데, 백온은 崔孝淑(1830-1903)의 자이다. 그는 1876년 진사에 합격
하였으며, 옥종면 청룡에 거주하였다(옥종군지편찬위원회( 2000), 玉宗面誌,
735쪽)
75) 甲午日記 6월 28일, “兒也暮還 排等條 未改五百兩”
76) 경상도고성총쇄록甲午 6월 3일, “匪類逃散 則似必向往嶺南 秘飭各邑 預爲團束”
서부경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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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옥종과 이웃하고 있는 고성지역에서도 이미 6월 10일부터 오가작통을 만들었으며,78) 후술하는 바와
같이 조성가가 거주하였던 월횡리에도 5가 작통이 실시되었다. 이어 마을마다 산에 堡를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서부경남지역에 보가 축조된 것은 진주영장 박희방이 산성을 축조한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희방은 1883년 9월 초에 부평부사로서 衆心城을 축조하였는데, 박희방은 해안경비의 필요에 따라 계양산 서쪽의 고개인 경명현에 부평 요호들의 자금 염출을 받아 주민들을 동원하여 1달 만에 중심성을 축성하였으며, 군기를 수리하고 병정을 훈련하는 곳으로 삼았다.79)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박희방은 동학농민군이 쳐들어왔을 때 마을 사람들이 주변의 험준한 산세에 의지하여 적을 막아내도록 산에 보의 축조를 명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80) 당시 서부경남 지역에는 곳곳에 보가 축조되었다. 산청 신등면의 雙明菴 이나81) 차황면의 傅巖,82) 사월의 尼丘山, 옥종면의 우방산, 정개산, 사림산,옥산, 고성산 등 곳곳에 보가 축조되었다. 조성가 일기에 의하면 단성의 사월리 餘沙에 거주하였던 河兼洛이 5월 23일 조성가가 소지하고 있
었던 民堡의 卷軸을 빌려갔고,83)
77) 같은 글, 갑오 6월 3일, “五家一統 統有統首 五統置頭領 十統置統長 一洞置領
首 凡係洞中人 出入行止 外處人往來容接者 各別糾察 殊常之跡 詳細探得 統首告
頭領 頭領告統長 統長告領首 領首告于官 官報于營 探報之節 自下達上”
78) 같은 글, 갑오 6월 11일, “向因巡甘 令民作統 是日各洞首 面承分付次 一齊來到”
79) 김상태(2007), 「중심성(衆心城) 축조」, 부평사 1(부평사편찬위원회), 242쪽
-246쪽
80) 조성가, 月皐集卷14, 祝文, 「佳士山民堡開基祝文」, “據險設堡 往牒攸程 矧有
官令 曲循民情”
81) 金麟燮, 丹溪日記 甲午年 8월 14일, “(梁)通瑞約人 築民堡雙明菴舊基”
82) 金麟燮, 丹溪日記 甲午年 8월 17일, “寅時 門議築堡傅岩 題給告山神文 食後
同從弟 行中房 午後上傅岩”
83) 甲午日記 5월 25일, “學叟以河江界請 借吾民堡卷 袖去”: 학수는 옥종의 두양
에 거주하였던 姜柄周 (1839~1909)이며, 강계는 단성의 사월리 여사에 거주하였던 河兼洛(1825~1904)이다. 하겸락은 1894년 마을에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자를 집을 허물고 쫓아 내자, 동학농민군이 쳐들어와 하겸락이 대대로 살았던 집과 서적을 모두 불에 태워버렸다. 하겸락은 이후 巴山에 옮겨 거주하였다(河兼洛, 思軒遺集卷四, 附錄, 「事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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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리에서는 尼丘山에 보를 축조하고 7월 19일 철수하였다.84) 옥종면에서도 여러 곳에 보가 축조되었다. 조성가의 일기에서도 7월 20일 아들 조종규가 淸水와 龍洞에서 玉山에 보를 설치하였다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85) 7월 22일 이방견의 아들이 鼎蓋山堡의 開基祝文을 청하였기 때문에 지어주었으며,86) 7월 28일 아들과 숙질이 牛芳堡에 다녀왔다고 함으로서 이 일대에 거의 마을마다 보를 축조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조성가 역시 민보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사림산이나 정개산 보의 開基 祝文을 지어주기도 하였는데, 마을사람 전체가 힘을 합쳐 산 정상에 성을 쌓고 샘을 파서 일정기간 동안 머무를 수 있도록 한 뒤, 적이 물러가면 다시 내려와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심산이었다.87)
조성가가 거주하였던 월횡리에도 士林山에 堡가 축조되었다. 먼저 위치 선정을 위해 촌락민 6,7명이 士林山에 올라 수맥을 살피면서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는 넓은 분지가 있어서 5백 명 정도를 용납할 만한 하였.
88) 이어 7월 20일에는 조성가를 찾아온 산청의 閔東赫, 월횡의 趙轍奎 등 7,8명이 사림산에 올라가 堡를 세울 곳을 살피고 돌아왔다.89)
84) 甲午日記 7월 16일, “且堡事 沙月合一村 設于尼丘山上 以十九日撤還云”
85) 甲午日記 7월 20일, “兒也 淸水回入龍洞 兩村堡于玉山云”
86) 甲午日記 7월 22일, “鼎蓋山堡開基祝文 李芳見之胤來請 故製而與之”
87) 조성가, 月皐集卷14, 祝文, 「佳士山民堡開基祝文」,“隣比姻友 僉議允協 扶老
携幼 遹圖安戢 聿胥玆山 築城濬泉 戮力禦賊 律出中權 上山而處 下山而農 不稼不
穡 曷救喁喁” ; 佳士山은 士林山의 별칭이다(옥종군지편찬위원회, 玉宗面誌,
2000, 169쪽)
88) 甲午日記 7월 16일, “一村六七人 偕登士林山 覘水脈三處而不足 且頂凹地可
容五百餘人” : 현재에도 사림산에 그 터가 남아 있다. 테뫼식 산성으로, 정상부분
에서 성곽 사이의 1,500 평 되는 면적에 대략 30채 정도의 집터가 남아 있다. 일
제 시대에 작성된 임야대장에도 월횡리 산 125번지, 0.5 ha로 명기되어 있다.
89) 甲午日記 7월 21일, “啓明與景岡等八九人 上士林山 胥堡處 大贊云” : 啓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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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에는 보를 축조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사림산에 올라갔고,90) 26일에는 조성가에 의해 堡案이 작성되었다.보의 공사는 먼저 성을 쌓고 보안에 일정기간 머무를 수 있는 집을 짓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먼저 7월 27일에는 堡案에 들어있는 사람 100 여 명이 사림산에 올라 성을 쌓았다. 그리고 산허리에 길을 내어 安息洞의 물을 길러오자고 하였다. 이어 8월 3일에는 성문을 축조하였다.91) 8월 6일에는 마을사람들이 사림산에 올라가서 집터 자리를 평평하게 골랐다.92) 그리고 14일에는 산 위에 중, 하동의 집을 짓기 위한 회의가 열었다.93) 이에 17일에는 마을 사람 전체가 참여하여 집을 짓기로 결정하고94) 19일부터 마을 사람들이 집을 지을 큰 재목을 옮기기 시작하였다.95) 그리고 27일에는 다시 마을 사람 모두 참여하여 下洞의 집터를 닦았는데, 성 밖에 새로이 水源을 발견하기도 하였다.96)
조성가 집에서도 8월 8일부터 집을 짓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사림산에 지어질 집의 목재를 구하기 위해 사림산 밑에 있는 무릉마을의 헌 집의 목재를 사고,97) 11일에는 집 지을 날짜를 택일하였다.98) 이에 12일에는 조성가의 아들 조종규가 사림산에 올라가 집터를 확인하였으며, 8월 13일에는 조종규와 조종규의 아들 조용숙이 工匠을 거느리고 산에 올라가서,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렸다.99) 조성가 역시 8월 15일 사림산에 올라갔다. 집이 들어설 곳이 무척 비좁았다는 사실을 알았으나,100)
閔東赫의 字, 景岡은 월횡에 거주하였던 조철규의 字이다.
90) 甲午日記 7월 25일, “一村齊登士林山”
91) 甲午日記 8월 3일, “ 是日一村登士林山 設城門”
92) 甲午日記 8월 6일, “一村上士林 鑿平家基”
93) 甲午日記 8월 14일, “一村爲開基 中下洞屋基 會議”
94) 甲午日記 8월 17일, “堡役大同 依約而商偏利 出岐論者多云
95) 甲午日記 8월 19일, “一村運雄木 午前畢”
96) 甲午日記 8월 27일, “山堡大同役 一村齊發 治下洞屋基畢, 水源稍出於城外云”
97) 甲午日記 8월 8일, “往武陵買置三間弊屋之材”
98) 甲午日記 8월 11일, “宅堡宅 成造日用前擇”
99) 甲午日記 8월 13일, “兒也 以今日堡宅立柱上樑 率工匠上山 孫兒亦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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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는 그대로 진행되어 9월 5일 집에 시렁을 엮고 온돌을 두는 일을 다 마치었다. 9월 5일 공사에는 조성가의 손자 조용숙과 멀리 담양에서 피난 온 이승학의 아들 李光秀도 함께 감독하였다.101) 사림산에 설치된 보에는 마을 사람 외에도 피난왔던 타지역 사족들도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월횡리에서는 사림산에 보를 축조하면서 동학농민군이 쳐들어 올 것에 대비하는 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미 7월 21일 진주우병영에서 동학농민군을 섬멸하라는 官令이 내렸다. 동학농민군이 인근의 仁溪를 약탈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월횡리의 8명의 統首가 오전에 月亭에서 모였다. 월횡리에서는 진주관아의 지침대로 동학농민군을 막아내기 위해 5가작통제가 실시되었던 것이다. 이어 통수들은 오후에 마을 사람을 동원하여 大樹亭에 모여 인원을 점고하였으며, 모인 사람들과 함께 일제히 동도를 방어하자고 결의하였다.102)
이어 8월 3일에는 월횡의 젊은이 두 사람이 대수정에서 총을 쏘자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호각을 불고 빠짐없이 모였다. 이웃 안계리에서도 里首가 53인을 거느리고 왔고, 월횡리 바로 옆 마을인 賓洞과 場基, 僧坊에서도 참여하였다.103) 당시 안계리에서도 里首 즉 洞首의 존재를 통해서 5가 작통이 실시되고 있으며, 마을 인구가 비교적 적은 賓洞과 場基, 僧坊에서도 공동훈련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몇 개 마을이 합하여 동학농민군에 맞서
100) 甲午日記 8월 15일, “汝元拉我上山堡 地甚窄 而吾家所建尤然”
101) 甲午日記 9월 5일, “堡役 長孫與美中 往董而還 構架置突 垂畢” ; 미중은 동
학농민군을 피해 담양에서 8월 22일 월횡으로 피난온 李承鶴의 아들 李光秀를
가리킨다.
102) 甲午日記 7월 29일, “東徒就仁溪云 午前八統首會月亭 午後各率統內 會大
樹亭點考 納齊發放東徒”
103) 甲午日記 8월 3일, “村少二人爲試一村防賊實心與否 放砲於大樹亭 一村吹
角 齊發無一人漏者 里首率安溪五十三人下來 貧洞場基僧房亦來 沽酒飮而送之 是
日一村齊登士林山 設城門而午時聞昆陽東徒來 故走急足 告士林役丁下來 而夜有
此虛驚” ; 빈동은 오늘날 손오골, 장기는 장터, 승방은 심방골로 불리는 지역이
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안계리에 속한다.
서부경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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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으로 방어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오후에는 곤양에서 동학농민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심부름꾼을 보내, 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사림산에 올라가 있는 役丁들을 내려오게 하기도 하였다.104)
그러나 이 보는 동학농민군을 격퇴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산 정상에 축조된 보가 땅이 좁아서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거주하기가 좋지 못하였으며,105) 동학농민군의 신속한 공격에 맞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더욱 문제가 되었던 것은 마을 사람들 중에도 9월 이후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인물이 급속히 늘었기 때문에 보가 더 이상 구실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먼저 월횡리에는 사림산에 보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동학농민군이 진격해왔다. 전술하였듯이 7월 중순 이후 덕산과 하동에서 동학농민활동이 재개됨에 따라 월횡리에서도 동학농민군들이 출몰하였다. 더욱기 7월 말부터는 조성가가 거주하는 월횡에서도 동학농민군에 동조하는 인물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예컨대 조성가 일기에 의하면 洪福집에서 동도에게 의탁하여 大小宅을 모함하였으며, 壽文에게 총을 빌리자고 하였다. 수문이 없다고 하자 돈을 50냥 빌리자고 하였으나 돈이 없다고 하자 위협하는 말을 하고 가기도 했다는 것이다.106)
이후 10월에는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결전을 치루게 되자 마을별로 젊은 사람들을 전장에 징집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월횡리의 젊은이들도 징집되었는데, 이 징집은 10월 14일 고성산성에서 일본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이 일본
104) 甲午日記 8월 3일, “午時聞昆陽東徒來 故走急足 告士林役丁下來 而夜有此
虛驚”
105) 甲午日記 8월 28일. “立夫子和上山堡來 立夫曰堡長不能損上益下 以致地窄
屋稠 不可云” ; 입부는 기재는 조성가의 스승인 기정진의 삼종손이며, 子和는 李
承鶴으로 조성가와 동문인 이최선의 아들이다. 이들은 동학난을 피해 장성과 담
양에서 이곳으로 피난하였던 것이다(甲午日記8월 22일, “夕後 聞奇立夫李子
和避東徒亂 率內眷 徒步而來”).
106) 甲午日記 7월 28일, “洪福家自言托於東徒 謀陷大小宅 乞銃於壽文曰無 乞
代錢五十兩曰無 以危語恐之而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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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패퇴할 때까지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조성가의 일기에는 조성가가 10월 3일 사림산 밑 깊은 산중인 武陵 마을에 들어가서 숙박하였는데, 다음날 4일 새벽에 그의 아들과 숙질, 여러 아이들이 동학농민군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 들어왔다고 하였다.107) 이어 10월 5일에는 동학농민군 300 명이 월횡리에서 會市하여 저녁 밥을 마을 주민들에게 요구하여 먹고 나서, 월횡의 동학교도 중 孫殷錫 포에 속한 자들을 덕산의 菊洞으로 데리고 갔다고 하였다. 진주의 上坪接에 속하는 자는 가지 않았지만, 마을의 동학도들이 징집되면서 마을이 매우 소란하였던 것이다.108) 이러한 사실을 통해 이 무렵 월횡리에는 동학교도들이 크게 늘어서, 동학 포교자를 중심으로 최소한 두 개 이상의 포접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0월 8일에는 동학농민군이 都所를 栢谷에 열기 위해 12포를 일제히 동원하면서 109) 평민들을 몰아서 선봉에 세운다고 하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성가의 두 손자와 조카들이 징집을 피하기 위해 산중 마을인 무릉으로들어왔다.110) 이때 10일 회신리에서는 박극록 포에서 평민을 모집하기 시작하여 미쳐 징집을 피하지 못한 50여인이 고개를 넘어갔다.111)
107) 甲午日記 10월 3일 , “往武陵宿” : 같은 글, 10월 4일 “曉 兒也叔姪及兒輩
避東徒勒入而來”
108) 甲午日記 10월 5일, “夕東徒三百餘會市 而使月橫具飡 而吾家與輔卿免焉
彼以兩家多費 今番闕之云 夜半 本村匪類 屬於孫叔可舖中者 皆入菊洞 屬於上坪
接者 不去云 村中甚擾” ; 이후 월횡에서 덕산 국동으로 간 동학농민군은 모두 중
간에 도망쳐왔다(甲午日記 10월 7일, “東徒入德山者 中路皆逃還云”).
109) 柏谷誌에는 10월 백곡평에 모인 동학농민군이 18개 포에 십만명에 달하였
는데, 이들은 3일 동안 백곡평에 머물렀으며, 마을이 텅 비게 되었다고 하였다
(柏谷誌卷3, 兵荒, “十月會于柏谷坪 凡十八包衆十餘萬 饕虐生民 無所不至 凡
三日留連村閻 一皆空虛”)
110) 甲午日記 10월 8일, “彼黨將開都所於柏谷 十二包齊會 勒驅平民爲前鋒 大
可畏也 不可避 故兩孫及星姪 夜入武陵”
111) 甲午日記 10월 10일, “朴克祿黨 方勒募平民 無不避云…… 外檜村前砲聲一
發 五十餘向克祿去…… 厥徒四度越專磴去 合五十餘名”
서부경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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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1일에는 월횡리에 동학농민군 200명이 들어와 술과 식량을 요구하여 표를 받아갔으며,112) 13일에는 동학농민군이 수곡으로 진격하면서 월횡리 전체가 약탈되었다.113)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고성산성에서 패배하면서 월횡리나 회신리에는 더이상 동학농민군의 징집이 없었다. 동학농민군이 모두 마을을 떠나갔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성가는 16일에 옥종 회신리의 동학농민군이 모두 도망갔다고 하였다.114) 이어 17일에는 진주의 병교가 군졸 1백여 명을 이끌고 월횡에 들어와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도인을 색출하기 시작하였다. 마을사람들은 이제 동학농민군 대신 관군에게 식사를 제공하였다.115) 또 이튿날에는 회신리에 일본군이 지나갔고, 월횡리에서는 里首가 마을 구성원을 士家, 農家로 구분하여 동학농민군에 가담하였는가의 여부를 파악하였다.116) 이제월횡리에서는 동학농민군의 기세가 완전히 꺽이고 활동이 종식됨에 따라, 월횡리에서는 더 이상 동학농민군에 징집되지 않았던 것이다.
5. 맺음말
본고는 하동 옥종면 월횡리의 저명한 학자로서 동학농민혁명에 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긴 조성가의 월고일기를 통해 서부경남지역의 동학의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을 살핀 것이다. 서부경남지역은 관리들의 탐학과 혹심한 가뭄으로 자주 민란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호남지역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게 되었다. 1894년 덕산에서 백낙도 등의 동학교도들이 처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7월 초부터 하동과 덕산의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게 재개되었다.
112) 甲午日記 10월 11일, “夕 厥徒二百餘入月橫討酒 又討糧次 受標去”.
113) 甲午日記 10월 13일, “樸徒下去水市結陣者萬餘人 是夜月橫一村 皆被勒奪”
114) 甲午日記 10월 16일, “檜包逃去云”
115) 甲午日記 10월 17일, “本州兵校率兵丁百餘入月橫 區別道俗而一村分餉 吾
家四十床”
116) 甲午日記 10월 19일, “倭兵過檜者 無弊 月橫里首成冊俗人家 以士家農家入
標云 勒募之說稍息 彼氣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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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민란이 일어나고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조성가가 살고 있는 옥종의 월횡리에서도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인물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동학농민군은 8월 19일 곤명의 鳳溪과 8월 20일 이후 진주의 마동에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동학농민군에 비판적인 사족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9월 초 섬진강을 건너온 영호도회소나 구례 등지를 거쳐 남원 등에서 온 호남지역 농민군의 지원을 받아 하동,진주, 사천, 곤양 등지를 동학농민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폐정개혁과 왜적의 침입을 막아 낸다는 명분하에 집결하였는데, 진주 병영이나 관아 등에서도 동학농민군의 기세를 막아 낼 수 없었다. 이처럼 동학농민군이 서부경남 지역을 점령하자 관군과 일본군이 합세하여 동학농민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 가장 큰 전투는 하동의 고성산성 전투였다. 당시 백곡에 집결하였던 동학농민군은 수곡, 북평으로 옮겨 10 월 14일 고성산성에서 결전하였는데, 일본군의 무기와 전투기술에 눌려 끝내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어 관군이 진격하고 진주 우병영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종식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맞서 당시 경상 우병영에서는 각 지역의 사족들을 군무참모관으로 배정하고, 지역별로 성첩을 수리하고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요호를 중심으로 40명의 군무참모관을 뽑아 향회를 개최하고 城堞의 수리와 軍器 보수, 將士의 糧料 및 軍務官의 給料를 마련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조성가의 아들의 경우도 군역을 피하고자 하였으나, 어쩔수 없이 5백냥의 돈을 내었으며, 군무에 종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상우병영의 대책에 대해서 사족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서부경남 지역은 경상감영의 지시로 오가작통을 강화하여 주민들의 결속을 꾀하였다. 각 洞에 오고가는 자를 살펴서 수상한 자취가 발견되면 통수→두령→통장→영수→관아→감영으로 보고하는 체계를 갖추었다. 또한 산청이나 단성, 옥종면 일대에는 많은 보가 축조되었다. 보의 축조는 1883년 부평부사를 지내면서 중심성을 축조하였던 진주영장 박희방 등 진주우병영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단성의 니구산을 비롯하여 우방산,정개산, 사림산, 옥산, 고성산 등에 보가 축조되었다. 마을사람 전체가 힘을 합쳐 산 정상에 성을 쌓고 샘을 파서 일정기간 동안 머무를 수 있도록 한 뒤, 적이 물러가면 다시 산에서 내려와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보의 축조에는 마을 전체가 동원되었다. 성문을 축조하고 마을 사람들이 보에 머무를 수 있는 집을 짓고 식수원과 연결하는 길을 내었다. 그러나 이 보는 땅이 좁아서 마을 사람들이 거주하기가 좋지 못하였고, 동학농민군의 신속한 공격에 맞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 중에도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인물이 급속히 늘어감에 따라 보가 더 이상 구실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최소한 두 개 이상 동학농민군 조직으로 분열되었다. 월횡리 사람들은 10월 초 일본군이 진격해옴에 따라 결전을 하기 위해 동학농민군에 의해 강제 징집되었다. 대부분 탈출하였으나, 상당수가 동학농민군을 따라 백곡, 수곡, 북평을 거쳐 이동하였으며, 고성산성 싸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고성산성에서 패배함에 따라 전투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은 죽거나 피신하였으며, 월횡리에는 도인과 속인의 조사가 시작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투 고 일 : 2014년 02월 10일
심사기일 : 2014년 02월 22일~03월 10일
게재확정 : 2014년 0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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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경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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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Proliferation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the Western
Gyeongnam Region and the Contingency Measures of the Rural
Society - Based on Cho Seong-Ga's Wolgoilgi
Kim Bong-Gon
<HK Research Professor at Suncheon University>
In this study, proliferation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the
western Gyeongnam region and the contingency measures of the rural
society is examined through Wolgoilgiby Cho Seong-Ga, a celebrated
scholar in the western Gyeongnam region, who kept detailed records of
the events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estern Gyeongnam
region saw a number of insurrections as a result of corrupt government
officials and severe droughts. In time,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of Honam eventually sparked a revolt in the region. Despite the fact
that the Donghak zealots such as Baek Nak-Do had been executed in
Deoksan of Sancheong in April of 1894, around July Donghak peasant
forces in the Deoksan area began to resume operations. Starting from
19th of August, Donghak peasants begin to gather around Bonggye of
Gonmyeong and Madong of Jinju and set about rounding up local
gentries who were critical of the Donghak movement. Later in early
September, with the support from Suncheon and Gwangyang's Yeongho
chapter, who came crossing the Seomjingang river, and the Honam
peasant troops, who came from Nawon via Gurye, the peasant forces
南冥學硏究 제4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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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re able to control Hadong, Jinju, Sacheon, and Gonyang region.
Donghak peasants assembled under the banner of "reform abusive
systems," and "banish Japanese invaders." Jinju army and even the
government authorities were unable to fend off advances made by the
peasant troops.
When the Donghak forces took over the western Gyeongnam region
a three way battle between government troops, the Japanese, and the
Donghak peasants ensued. The biggest clash of them all was the
battle of Goseong fortress in Hadong. On the day of October 14, they
took to battle in Goseong fortress. Routed by the advanced weaponry
and combat skill of the Japanese, Donghak peasant forces had no
choice but to suffer defeat. Subsequently, as the government troops
made military gains and as the activities of the Jinju regiment began
to resume full operation, campaign of the Donghak peasants was
stamped out altogether.
To ward off advances of the Donghak peasant forces Gyeongsang
military headquarters appointed the local gentry as military staff
officers, while repairing local fortresses and stocking up on military
provisions. From the landed families 40 men were singled out to be
appointed as military staff officers and were ordered to hold the
hyanghoe in which plans for mending fortress walls, weaponry repair,
and military wages were drawn up. There was widespread discontent
among the local gentry at the countermeasures of the Gyeongsang
military headquarters. However despite trying to dodge enlistment,
had no choice but to serve in the military on top of paying a lot of
money.
Moreover, by the order of the Gyeongsangkamsa, western Gyeong서부경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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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 region tried to solidify its inhabitants by reinforcing the Ogajaktong
network which was basically a centralized reporting system.
Once suspicious person or activity is detected, it would be reported to
the chain of command in the order of Tongsu→Duryeong→Tongjang→
Yeongsu→Gwan-a→Gamyeong.
Furthermore, by the order of the Gyeongsang military headquarters,
Okjong and other Danseong region saw an increase in the mountain
fortress wall. In case of the Sarimsan fortress constructed by
Wolhoengri, the whole villages would be deployed when constructing
mountain fortress walls. Fortress gates would be raised and a
dwelling place for the villagers would settle near mountain fortress
walls as well as ducts layed out to channel water resources. However
cramped space along the mountain fortress wall made it unfit for
habitation and made it difficult to respond to the swift attack of the
Donghak peasant troops.
Also, as propagation of Donghak became more active, the number of
villagers joining the Donghak cause went up. In Wolhoengri alone,
there were at least two or more Donghak organizations. When the
Japanese army made an advance in early October, villagers were
forced into joining the Donghak troops. Although many were able to
escape, considerable number followed Donghak peasant troops into
Beakgok and Sugok, all the way onto Bukpyeong, finally ending up in
Goseong fortress taking part in the battle. Nevertheless, after the
Donghak forces' defeat at Goseong fortress those that had engaged in
battle either perished or fled. Thereafter in Wolhoengri inquiries to
track down the ascetics began and that would mark the end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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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 words : Western Gyeongnam Region, Donghak Peasant Revolution,
Rural Society, Cho Seong-Ga, Wolgoilgi, local gentry, hyanghoe,
Ogajaktong, mountain fortress w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