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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한 번에 설교하기
본문 : 9:11-15절
제목 : 이러한 대제사장을 우리가 모셨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강론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는 “신약성경”을 통해서 “구약성경”을 해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은 예표와 그림자로 말씀하신 것이요 신약성경은 구약에 감추어졌던 것이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골 1:26)한 밝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히브리서는 구약성경 레위기의 해설서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바 대로 레위기의 중심주제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추방을 당한 자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해지는 가를 모형을 통해서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대속제물”과 이를 드려줄 “대제사장”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9:11-12)는 점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형과 그림자로 계시하신 것이 실체(實體)로 성취하여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部分)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1:1-2)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여러 부분(部分)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것이 구약성경이요, 우리가 배운 레위기도 그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를 모르고는 제사제도를 명하신 레위기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① 앞부분(1-10장)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것이 구약시대에 모형과 그림자로 계시하신 것에 대한 성취라는 점을 증언하는 내용이고, ② 뒷부분(11-13장)은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10:39)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11:1)하고 오직 “믿음”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11장에서는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을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히브리서를 기록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첫째로,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5:12)고 신앙이 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의 한국교회 상황이기도 합니다. 양적(量的)으로는 성장하였으나 영적 수준은 아직도 어린 아이와 같은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히브리서는 우리에게도 적실성이 있는 것입니다.
㉡ 둘째로 10:39절에서는,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합니다. 이로 보건대 믿음이 자라지 않은 것만이 아니라 퇴보(退步)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던 유대인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과, 제물”이 구약의 제사장과 제물에 비해 얼마나 확실하고 영광스러운가를 증언하여 견고하게 세워주려는 것입니다.
8:1절을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要點)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합니다. 이를 개역본에서는 “이제 하는 말의 중요(重要)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모든 말씀이 중요하고, 성경전체가 중요한 말씀입니다만 그런 중에서도 자신을 대속제물로 드려주신, “이러한 대제사장을 우리가 모셨다”는 것은 중요한 말씀 중에 중요한 요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대제사장, 제사장”이라는 말이 무려 31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어떤 분이신가? 히브리서도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주제(主題), 즉 “예수가 누구신가?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행해주셨는가”를 증언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복음”이요, 이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① 1장에서는 “예수가 누구신가”하는 점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모든 세계를 지으신(2) 창조자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3), 즉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1:4)하고 천사보다” 우월하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② 2장에서는 창조자시오,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어찌하여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9), 즉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행해주셨는가를 증언합니다. ㉠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17)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이 “속량”을 2:9절에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합니다. 왜냐하면 죄 값은 사망(死亡)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속량”, 즉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이루어주셨는가? 2:14-15절을 보겠습니다. ㉡ 첫째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다고 증언합니다. ㉢ 둘째는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기”(14-15)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이점에서 확고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약시대의 죄만을 속량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9:15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첫 언약 때에 범한 죄”, 즉 구약시대에 범한 죄까지 짊어지셨다는 점에 분명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했을 때도 모세의 탄원을 들으시고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 하시니라”(출 32:14)했고, 민수기에서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반역했을 때에도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민14:4, 20)하셨습니다.
우리는 “화를 내리지 아니 하셨다, 사하노라”하신 것으로 그들의 죄가 완결(完決)이 된 줄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그냥 사하신다는 것이 공의가 용납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황소와 염소의 피로 대속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10:4절은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10:4)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의 죄를 어떻게 처리하셨는가? 이점을 로마서 3:25-26절에서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구약시대란 죄를 보시고도 “길이 참으시는”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참으셨습니까? “곧 이 때에”, 즉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세우신,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의로움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공의(公義)를 나타내셨다는 뜻인데 구약시대에 범한 모든 죄에 대한 진노를 자기 아들에게 쏟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첫 언약 때에 범한 죄”, 즉 구약시대에 범한 죄도 비로소 완결(完決)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속죄제”를 드리라 명하신 의도가 무엇인가 하고 묻게 됩니다. 이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에 대한 예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 제사제도는,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9:10)합니다. 이처럼 자기 아들로 대속을 하시고 우리들을 “의롭다”고 여겨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행사는 “자기도 의로우시며”(롬 3:26), 즉 하나님의 공의에 손상함이 없이 정정당당히 행해주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③ 3장에서는 출애굽에 쓰임을 받은 “모세와, 그리스도”를 대비해서 증언을 합니다.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섬겼으나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모세는 무슨 일에 쓰임을 받은 “종”이었는가? “장래(將來)에 말할 것”(3:5-6),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세움을 입은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를 들어 기록하게 하신 모세5경의 중심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서 기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세의 사명 중 가장 위대한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받은 고난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11:26)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구약을 막론하고 구주(救主)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④ 4장에서는 가나안을 정복하는데 쓰임을 받은 “여호수아와, 그리스도”를 대비해서 증언을 합니다. 여호수아가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하면서,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4:8-9)합니다. 그러면 누가 “안식”을 준단 말입니까?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8)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⑤ 5장 이하에서는 본격적으로 우리의 대제사장과 그가 드려준 제물이 “아론”(5:4), 즉 구약의 “제사장들과 제물”보다 얼마나 위대하시고 완전한가를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 아론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맹세로 되신 것이라”(7:21)합니다. 시편 110:4절에서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하시면서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하신 예언의 성취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 구약의 제사장은 자신도 죄인이기 때문에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으나 우리 대제사장은 그럴 필요가 없는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7:27, 28)합니다.
㉢ 구약의 제사장들은 죽음 때문에 “그들의 수효가 많았고 직분이 갈리었으나”, 우리의 대제사장은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 하느니라”(7:23-24)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7:25)합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을 우리가 모셨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는 것입니다.
㉣ 구약의 제사장들은 “송아지나 양”같은 생축으로 제사하였으나 우리 대제사장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9:12)합니다.
㉤ 구약의 제사장들은 “매일 서서, 같은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기”(10:11)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제사장은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10:12)고 말씀합니다. “서서와, 앉으셨다”는 차이를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서 있다는 것은 일이 끝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앉았다는 것은 완결(完決)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여러분은 구약성경의 말씀 중에서 신약성경이 가장 많이 인용하여 담대히 증언하고 있는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하신 시편 110:1절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이점을 히브리서에서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 1:3절에서는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합니다.
㉡ 1:13절에서는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합니다.
㉢ 8:1절에서는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합니다.
㉣ 10:12-13절에서는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합니다.
㉤ 12:2절에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합니다.
어찌하여 우리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점을 이처럼 강조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첫째는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사기에는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는 말이 4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왕이 없는 것 같이 자기 멋대로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둘째는,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9:28)는 재림(再臨)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왕이 계신다는 점과 그 분이 시판주로 오신 다는 두 가지만 명심해도 교회는 개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제사장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7: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만큼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하신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붙잡고 간구하시기 때문이라는 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9장에는 3번의 “나타나심”이 있는데 그 의미를 인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점이 됩니다.
㉠ 첫 번 “나타나심”은 9:26절에 있습니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합니다. 이는 우리의 대속물이 되시기 위해서 말씀이 육신 되어 나타나신 초림(初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미 이루어진 과거(過去)사역입니다.
㉡ 두 번째 “나타나심”이 24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합니다. 이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4)한 현재적(現在的)인 사역입니다.
㉢ 세 번째 나타나심이 28절에 있습니다.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합니다. 이는 다시 오실 재림(再臨)을 가리키는 것으로 미래(未來)에 되어 질 일입니다. “죄와 상관없이”란 또다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영접하러 오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히브리서에는 “들어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들어감”은 “추방”과 성막을 “휘장으로 막으라”하심과 대조되는 요점입니다. 구약시대는 어떠한 상태였습니까?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구약시대)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9:8)합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많은 제물이 드려졌어도 막힌 휘장이 “열려지지 않았기”때문입니다.
그런데 10:19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합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간 것처럼 우리도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 곧 보좌 앞에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들어감이 어떻게 해서 가능해졌습니까?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시자,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된 것”(마 27:51)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들어가는”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내가 문이니(요 10:9), 내가 곧 길이다”(요 14:6)하신 “문과 길”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1500년 동안 막혔던 휘장이 열려지자 제 1차로 들어간 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6:20절을 보겠습니다.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문이 열리자 “들어가는” 첫 테이프를 끊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만 들어가시고 휘장이 다시 닫혀졌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0:22)합니다.
그러면 들어가는 일이 언제 되어 집니까? 지금 예배를 드릴 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기도를 드릴 때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휘장 밖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열어놓으신 휘장을 통과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들어간다는 점을 확신하시 바랍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고난, 부활, 승천”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서 주권적으로 행해주신 은혜요, 복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행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1:6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주신 구속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오직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점에서 출애굽 1세대들이 어찌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가를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3:18-19)합니다.
그리고 경계하기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만일 “들은 바 그 말씀을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는다면”(4:2) 우리도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2:1)합니다.
히브리서 마지막 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13:8)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울은 달려갈 길을 마치고 구속사의 무대를 떠났으나 바울과 함께 하셨던 주님은 형제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13:7)하신 바울에게 있던 믿음이 나 자신에게도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마지막 결론은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12:28)한 “은혜를 받아 기쁘게 섬기는 일”입니다. 이것이 “이러한 대제사장을 우리가 모셨다”는 히브리서입니다. -아멘-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15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