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은 살리는 복음 (계 1:17-20)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계시록 수여의 배경>
계시록의 기록자인 요한은 자기 앞에 현현하신 예수님 앞에서 그 압도적인 영광에 견딜 수 없어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출33:20, 23, 단8:17, 27:10, 마17:6, 행26:14). 출33:20에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심을 연상시킵니다.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예수님의 영광은 아버지의 영광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앞의 10-16절에 교회를 위해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영광 앞에 압도 당하는 건 당연한 것입니다. 더구나 앞의 10-16절의 예수님의 모습은 교회를 완전하게 하시기 위한 혹은 완전을 요구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른손을 얹어 능력으로 살려주시면서 자기 이름을 들어 견고한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요한이 담당해야 할 임무에 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명에 대한 해석까지 해주심에서 요한이 안돈을 되찾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상심한 베드로를 위로하시며 양떼를 맡기시고 그의 미래를 예언하시던 주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의 시종 두려운 모습과는 아주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계시록 수여의 배경을 통해서 계시록에 대한 고정관념부터 깨뜨리고 본론에 들어가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계시록에 대한 두려움의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할 이유는?
1. 살리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17절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나타나실 때 그 압도적인 영광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고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이나, 유대인들이 두려워 숨었던 제자들, 그리고 승천하시기 전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지만 그렇지 않았고 위로와 평강을 얻었습니다. 도리어 주님의 영광은 살리는 영광입니다. 고후3:18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했습니다. 그의 음성만 들어도 죽은 영혼들이 살아납니다(요5:25). 요1:14에도 많은 이들이 그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한 편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주님이 자기를 나타내시기 전에는 주님이신 줄도 알지 못했고, 반대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해보다 밝은 빛 때문에 쓰러져 기도로 구해주기 전까지는 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자기 영광을 조절하시지만 때로는 필요에 따라 나타내시기도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일곱교회에 보낼 편지 등 계시록을 수여하시기 전에 요한에게 나타나신 압도적인 그리스도의 영광은 이것을 통해서 뭔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메시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처음 계시록을 접하는 자가 받을 느낌이기도 합니다. 계시록을 처음 대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두려운 기록 앞에 떨 수밖에 없지만, 깨달아감에따라 그 내용이 예수와 함께 죄는 죽고 예수와 함께 의가 사는 성결의 복음임을 깨달을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진행되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두려움과 부담은 평안과 기쁨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계시록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계시록에 대한 편견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2. 두려움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17절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오른손은 보호와 능력과 구원의 오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손을 얹으시고 능력으로 살려내시며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하실 때와 아주 다른 모습입니다. 히12:19-21에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계시록은 죄와 사망과 음부의 두려움에서 해방하고 살려내는 책이지 두려운 책이 아닙니다. 비유와 상징으로 기록된 계시록의 그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문자적으로만 접근하면 해석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알듯말듯한 부분만 대충대충 해석함으로 가감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재앙의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계22:18-19). 계시록 전체에서 그 정체성이 녹아져 있지만 한 부분만 예를 든다면 계22:19에 주신 힌트처럼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하는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3. 영생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17-18절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처음이요 마지막”이란 한 번 죽은 것이 처음이었고 마지막이라는 뜻으로 이제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곧 살아 있는 자라 - 세세토록 살아 있어” 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영생의 주님이시므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고전15:45에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사망과 음부"는 비슷한 동의어로 음부가 무덤이나 지옥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여기서는 영육 혹은 영적인 사망의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망과 음부의 열쇠는 아담 안에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려주시는 예수님이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걸 보여주시기 위해 나인성의 과부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 살리셨고, 운명하실 때 많은 이들이 살아나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마27:53). 이처럼 계시록은 구원의 복음이요 영생의 복음입니다(요3:16).
4. 모든 시대의 살리는 복음입니다.
18절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세세토록”의 헬라어 원문은 “아이온”으로 “항상, 처음부터, 계속적인, 영원히”를 의미하는“아에이”에서 유래한 영원하다는 뜻이면서도 모든 세대를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세토록 살아계실 하나님이십니다. 계시록을 주시기 전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계시록은 요한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게 주신 영생의 복음임을 시사합니다. 계시록 역시 다른 성경과 같이 살리는 복음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19절의 “장차 될 일”을 특정한 말세에 한정될 세속사의 전개로 봐서는 안 될 이유이기도 합니다.
5. 계시록적 해석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19절의 “네가 본 것”은 1장의 과거적 사건을, “지금 있는 일”은 아시아 일곱 교회의 사건을, 그리고 “장차 될 일”은 4장 이하의 사건으로 봅니다. 그런데 주님은 20절에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하시면서 계시록 해석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계시록은 상당 부분은 상징과 비유로 기록되었는데 그러므로 해석이 필요한 책입니다.
계시록의 해석의 원리는 다음 약 2가지 이상의 전재 하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과 정통교리의 틀을 벗어나지 않아야 하며, 상징적인 묘사 역시 이미 성경에서 용례를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기에 성경 배경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아는 자라면 그리 어려운 해석이 아닙니다. 그 뿐 아니라 사이사이 영적인 교훈들을 삽입하여 무엇을 의미하는지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속사의 전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인간의 완악함으로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고후3:14-16에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한 것처럼 계시록을 포함하여 모든 성경을 예수와 그 복음으로 해석하면 성경이 열리고 보입니다. 계시록을 다른 복음이나 어느 교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비약의 알레고리는 배척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쓰는 거룩한 알레고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알레고리 민족입니다. 알레고리는 그들의 삶에 깊이 뿌리내려 그들의 일상이요, 의식구조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숫자 하나까지도 의미를 부여했고 그것이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성경 기자들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접근하시기 바랍니다.
6. 온전한 자로 양육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19절 하반 절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장차 될 일은 문맥상으로는 계시록 4장 이하의 사건입니다. 장차 될 일에 대한 견해를 보면 세속사나 교회사의 전개 특히 역사의 종말에 일어날 사건으로 보는 견해와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의 완성 및 그 나라의 도래로 보는 등으로 대별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부르신 자녀들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시켜 가는 구원론적인 성격이 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1:1-3절의 서론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취급했지만, 해석을 통해서 얻어진 내용을 보면 왜 계시록을 신령한 관점에서 보아야 할지 알게 됩니다.
그 중 일부만 소개하면 먼저 일곱 인재앙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경이 열리는 장면입니다. 이어 나타나는 일곱 나팔재앙은 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면서 변화 받는 심령들을 묘사한 것이요, 대접재앙은 대접이 고난이듯 고난 가운데 받는 성령의 은혜, 혹은 그리스도를 따라 이웃을 섬기는 중에 부어지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마음의 변화를 묘사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계시록은 성도들을 하늘의 사람 만들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과 그리스도의 신부로 키우는 것입니다. 이처럼 계시록을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그 흐름의 연계성에 있어서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반드시 다루어야 할 모든 신령한 주제들이라는 점에서 온전케 하시는 복음임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계시록은 단순히 역사 속에 전개될 세속사의 서술이 아닙니다. 성경이 복음이듯 성경인 계시록도 역시 복음입니다. 계시록을 배워 감에 따라 우리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계시록에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장성하여 영원히 주님의 사랑 받는 신부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비밀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계시록을 잘 배우시고 이 말씀으로 열심히 훈련 받아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