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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샬 롬
주님의 제자훈련 (계 1:9-16)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밧모섬에서 요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한 주님의 모습으로, 계시가 주어지면서 나타나셨다는 점에서 계시록 전체를 특징 짓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즉 계시록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한 신앙훈련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공부와 제자교육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것은 주님을 진실로 배우고 따를 자들을 선택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이고 체계적인 신앙훈련을 위해서 계시록을 배운다는 마음으로 하루 3시간 이상 기도생활을 약속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쁨으로 순종한다면 성령님과 동역하는 이 시대 귀한 일군이 될 것입니다. 훈련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큽니다. 훈련을 받았어도 제대로 그리고 많이 받은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훈련시키셨고, 우리들 역시 이 세상 광야에서 훈련시키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좁은 의미에서는 사역들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입니다.
제자훈련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1. 함께 하심입니다.
그 답을 12-13절의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금 촛대'는 계1:20절을 보면 신령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인자'는 육체를 입고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자기를 일컫던 명칭입니다. 그러므로 촛대 사이에 계신 인자 같은 이는 교회와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참 교회요, 참 성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목적과 같습니다. 막3:14-15에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먼저 주님과 온전히 함께 함이 훈련의 첫째 목표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심을 말씀과 이적으로 확신케 하셔서 구원 받게 하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사시며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말씀과 삶을 배워 실천하는 것이 주님과 동거 동행하는 것입니다.
2. 권능 받아 동역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 말씀은 성령의 권능을 주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권능은 초기에도 나타났지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크게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성령의 능력을 받는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과 삶의 기초를 닦지 않고 능력 받는데 치중하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되고 맙니다. 이제부터 세상 일에 분주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우리를 제자로 불러주신 주님의 마음 흡족하시도록 제자훈련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제자훈련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1. 임재훈련입니다.
12-13절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촛대는 교회일 뿐 아니라 성도 각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 계신 인자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성도와 함께 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요1:12). 이미 믿는 성도들은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임재훈련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주하시고 임재하심을 믿는 훈련입니다.
마28:20에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셨고, 요14:18-20에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고, 고전3:16에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모셨으니 경건하게 행하며 늘 기도와 찬송으로 기쁘시게 해드리고 죄를 멀리 하시기 바랍니다. 곁에 계신 것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식을 가져야 임재의 체험이 시작됩니다. 누군가 무엇이 나를 격동시켜도 내 안의 예수님 때문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슬프게 했다면 진실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아내의 말을 듣고 여종인 하갈을 첩으로 얻은 결과 13년간의 침묵이 흘렀던 것처럼(창17:1) 주님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면 그 외로운 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떠나신 것은 아닙니다. 임재는 그 약속대로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세상을 몰아내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재훈련과 아울러 기도와 찬송으로 늘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역사 속의 기독교 신비가들은 신인합일을 추구했지만, 교리적으로 보면 성도는 믿을 때 이미 예수님과 신비적 연합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합일하려고 애쓰지 말고 이미 함께 하신 하나님과 늘 교제하는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살기 때문에 임재를 느끼지 못합니다. 임재의 체험만큼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혹시 임재의 체험이 없을지라도 말씀에 서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안심하며 원인을 살펴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항구적인 임재에 대해서는 계19:6-10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배우게 됩니다.
2. 화평훈련입니다.
13절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출28:4, 8, 레16:4). 발에 끌리는 옷은 예수님이 대제사장이심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발에 끌리는 옷의 모습은 우리 죄를 덮으시는 속죄의 은혜입니다. 이 모습은 내가 너희들의 죄를 다 덮었다는 메시지입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마음의 화평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화평훈련이 왜 필요합니까? 수많은 성도들이 사탄의 참소로 양심의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화평한 마음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한 자국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히12:14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롬5:1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면서도 아버지의 용납하시는 사랑과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양심의 자유를 누릴 줄 모르면 그 마음은 지옥이요 사망이요 고통이요 사탄이 찾아옵니다. 받은 은혜 다 쏟고 심령은 사막이 되고 맙니다. 구약에 법궤를 들여다보는 자는 죽었습니다. 이처럼 반성도 좋지만 지나치게 자신의 심령상태에 치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의로움은 예수님과 그 복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히4:16에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한 것처럼 사탄의 참소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담대히 보혈의 공로에 서시기 바랍니다(롬4:5-8). 사탄의 참소가 크기에 담대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문제는 회개한 후에야 믿겠다는 생각이 양심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늘 강조하듯이 전천후 보혈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결박이 풀리는 날 한국교회는 자유의 날개를 펴고 온 세계를 뒤덮고 말 것입니다.
3. 경건훈련입니다.
13절 "가슴에 금띠를 띠고" 이 모습은 왕의 모습입니다(단10:5-6). 가슴은 마음의 중심이요, 띠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금띠였습니다. 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왕으로 삼고 변함없이 충성하고 열심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만왕의 왕이시니 그 분의 통치 앞에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내 주장 내 뜻을 내세우는 것은 주를 대적하는 일이 됩니다(마7:21).
왕에게 다할 것은 충성입니다. 딤후2:3-4에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한 것처럼 절대충성 절대복종하시기 바랍니다. 롬12:11에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했고, 계3:19에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하셨고, 계2:10에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하셨습니다. 가슴에 열심의 불을 품고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경건입니다. 딤전4:8에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로 삼고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시기 바랍니다. 여러 실천항목이 있지만 우선 하루 기도 3시간씩 해나가십시다. 경건은 그 결과가 성령충만과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교회사에 경건운동이 성령운동이었습니다. 초대교회와 같이 몸과 마음을 다해 기도의 불길 ,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게 합시다. 땅에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님처럼 안타까운 마음으로 무너진 제단 다시 쌓고 한국교회에 부흥운동을 일으키십시다.
4. 복음훈련입니다.
14절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의로우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머리털만 아니라 머리까지도 흰 양털과 흰 눈 같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지식 뿐 아니라 우리의 의식까지도 온전히 새로워지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갑각류가 껍질을 벗지 않으면 그 껍질에 갇혀 죽듯 우리의 관념과 의식이 성경적 사고와 습관으로 바꾸어지지 않으면 더 성장할 수 없고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하셨듯, 율법적 사고로는 신약의 타오르는 성령 은혜를 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진리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수십 년간 믿어온 결과가 현재라면 개혁되어야 합니다. 포도의 가지를 쳐야 새 가지가 나와 열매를 맺듯이 주님이 일러주시는 말씀으로 잘못된 사고를 깨끗하게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세속적 사고, 유교 불교 세속적사고 예수 몰랐을 때의 사고도 다 제하시기 바랍니다. 고후5:17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새 피조물에 맞게 생각도 말도 바뀌고 자화상과 타화상까지도 바뀌어야 합니다. 성도를 볼 때도 예수 안의 복 있는 사람, 하나님의 자녀, 예수 안의 새 사람, 하나님이 크게 쓸 사람으로 보고 귀하게 여기고 날마다 축복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의식만 가져도 기적의 주인공이 됩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날마다 거울 앞에서 복음적 자화상을 훈련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버지께 사랑 받는 자화상으로 날마다 행복하고, 예수 안에서 의롭고 영광스런 구원을 받았다는 자화상으로 날마다 찬송하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신다는 맏음으로 양심의 자유를 누리며, 예수 안에서 사탄도 저주도 이긴 자라는 믿음으로 담대하고, 죽음의 공포까지도 예수 안에서 이겼다는 믿음으로 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훈련이 어마어마한 능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5. 성결훈련입니다.
14절 "그의 눈은 불꽃같고" 사물의 본질과 인간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그리스도의 신적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이 불꽃같은 눈앞에 변화 받지 못한 죄나 숨은 죄가 있다면 다 드러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모습은 죄를 숨기지 말고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영원한 속죄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거짓선지자들의 말입니다. 보혈의 공로를 믿는 것은 양심의 자유와 참소를 받지 말자는 것이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는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약4:8-10에도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했습니다. 시19:12에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했듯,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고 있는 죄를 알려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행실의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영혼의 거울인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 더욱 합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6. 겸손훈련입니다.
15절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여기 주석 같은 발은 심판과 연단의 발입니다. 수10:24에 여호수아가 잡아온 왕들을 놓고 그 목을 발로 밟으라 했고, 행2:34-35에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신 것처럼 발은 심판과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발이니 연단하는 발이기도 합니다. 벧전4:12-13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한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밟아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우리의 완고하고 교만한 내 중심의 자아입니다. 나를 내려놓으면 좋으련만 우리 인간 얼마나 어리석고 완악하여 자기를 내려놓지 못하는지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완악한 것도 산산조각으로 부수시고 녹이시는 강한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내 중심의 자아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새 자아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겸손과 자아처리는 경건훈련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제자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계17:14, 마19:37-39). 자기 현명함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사55:9). 다윗처럼 매사에 하나님께 여쭈시기 바랍니다. 이 습관이 자기 부정에 좋고 놀라운 하나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는 길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이 자아처리의 핵심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길 원했던 예수님처럼 온전히 이수하시기를 바랍니다.
7. 묵상훈련입니다.
15절 하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주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물은 말씀입니다. 많은 물소리는 부정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입니다. 히12:1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했던 것과 같습니다. 말씀의 풍성함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면 오병이어로 여자와 아이 외에도 5000명이 먹고도 12광주리나 남았듯이 모두가 먹고도 남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말씀이 실상으로 다가옵니다. 무슨 일에 상처 받고 밤새토록 잠을 못 이루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묵상)하다가 마음이 지옥으로 변하고 말듯 묵상의 원리가 그런 원리입니다. 이젠 묵상의 대상과 내용을 바꿔보세요. 날마다 나를 택해 주권해주신 사랑의 하나님과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고 함께 하신 보혜사 성령님을 생각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예수와 함께 죄가 죽고 예수와 함께 의가 살고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혀져 아들의 영광과 권세와 승리를 누리게 하신 그 영광을 묵상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자기를 비운다는 무념무상 해탈 등의 그런 묵상은 이교적인 것입니다. 그런 피동적 마음에는 사탄이 틈타기 쉽습니다. 기독교적 묵상은 비움이 아니라 주님이 내 마음을 가득 차지하게 채움입니다. 시1:2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한 것처럼 사고기관이 정상으로 작동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묵상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하더라도 비움이 아니라 하나님 생각으로 채우세요.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생각하면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고 감사만 나옵니다.
바울이나 프란시스가 얼마나 예수님을 깊이 생각했든지 몸에 성은이 생겼다고 하지 않습니까? 무디 선생이 그렇게 성경을 묵상했다고 합니다. 그랬기에 위대한 부흥사가 된 것입니다. 그랬기에 감격을 전하고 그랬기에 모두가 그 감격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성경이나 요절암송이나 설교나 찬양CD나 경건서적을 보는 것도 묵상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귀해서 가만 있을 수 없을 만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묵상을 통하여 많은 물소리처럼 은혜로 감격로 넘치는 위대한 신앙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8. 기도훈련입니다.
16절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별은 주의 종들이요, 오른손은 능력과 권세의 손입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능력의 손으로 붙들고 계신다는 의미요,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과 능력의 팔에 붙들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주의 오른손에 붙들리려면 먼저, 주의 뜻을 존중해야 합니다. 내 오른손으로 주님을 붙들어 내 비전을 이루려고 하거나 성령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시123:1-2에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한 것처럼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제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이 위대한 것도 행 22장을 보면 “주님 누구시니이까”(8절) 한 후에 10절을 보면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여쭌 것입니다.
주의 오른 손에 붙들리는 두 번째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산파가 돕지만 산모가 힘을 써야 하듯이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지만 나도 힘을 써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초대교회처럼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대하16:9에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그랬고, 골1:29에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했습니다. 유다의 아사 왕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결과 적군이 아사의 손에서 벗어나고 나라에 전쟁이 있게 됩니다. 이처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시험에 들어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능력은 묵상기도보다 발성기도일 때 더 효과적입니다. 다니엘처럼 하루 3번씩 소리 내어 기도할 수 있다면 주의 손에 붙잡힌 강력한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9. 진리훈련입니다.
16절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날선 검은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제사장의 예리한 검을 연상시킵니다.(히4:12). 제물이 제사장의 검에 의해 부위별로 정리되듯 이건 이것이고 저건 저것이고 분명하고 정확한 한계를 결정 짓듯 즉 진리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와 확신을 갖게 하는 예리한 말씀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이단에 대해서 입의 검으로 싸우셨듯(계2:16) 날선 검은 거짓을 분별해 낼 수 있는 예리한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모습은 우리를 향하여 성경을 더 밝히 깨닫고 교리적으로도 더 완전해지라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바른 지도와 정확한 천국 길의 안내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신득의의 진리를 말하면서도 다원주의나 이단이나 이방종교식 영성에 기웃거리거나, 우리의 메시지가 두리뭉실하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화나실까요? 거기다 전달력마져 미흡하다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예수 안에 선택 칭의 성화 영광도 다 들어 있습니다. 그 예수를 믿음으로 영접할 뿐 아니라 사랑하고 그의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고(요14:21, 요일3:23-24) 더욱 영화롭게 해드림으로 그 모든 것이 실상으로 누려지는 신비적 연합의 비밀을 듣는 이의 마음에 정리가 되도록 꼭 찝어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신학이란 성경의 골자를 간추린 것으로 인간의 사고는 그런 과정을 거친 논리적인 것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신학화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난해한 부분 때문에 수십 년을 연구하고 기도하다가 확신을 가진 일도 있습니다. 그만큼 진리에 대한 갈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이 놓아준 정통신학의 틀 안에서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앞서간 위대한 선배들의 저서도 참고하면서 성도들이 말씀을 듣고 깨달음으로 영적으로 급성장할 수 있도록 예리한 말씀으로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10. 기쁨의 훈련입니다.
16절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발광체가 아니라 왜 달과 같은 피광체일까요? 이렇게 묘사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빛을 받아 그렇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면 한 편으로는 기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교회 걱정, 양들 걱정, 나라 걱정 너무나 어두울 일이 많습니다. 이 자체가잘못이 아니라, 예수님의 얼굴을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처럼 그러면 그럴수록, 빌립보 지하감옥에 갇혔으나 찬송하던 바울처럼 더욱 주님을 힘있게 바라보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거울을 보십시오. 표정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모신 얼굴이 맞습니까? 얼굴이 복음화되셨습니까? 어둡습니까? 절망 가운데 있습니까? 슬픔은 없는지요? 사랑 받는 사람은 얼굴에 후광이 있다고 합니다. 빌1:27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 합당하게 하나님 생각하며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웃으면서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빛나게 사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시34:5에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이처럼 마음의 행복이 넘쳐서 얼굴에 빛이 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스데반처럼 우리들의 모습만 봐도 하나님을 보는 것 같고 천국을 보는 것 같고 모두에게 부러움이 되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전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바라기처럼 주님을 바라보며 해와 같이 빛나는 훈련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아시아 일곱 교회에 10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는 우리를 향한 소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 인격과 삶에 예수로 더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은 제자훈련의 입문 중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오리엔테이션과 같은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화평훈련 충성훈련 경건훈련 복음훈련 성결훈련 겸손훈련 묵상훈련 기도훈련 진리훈련 기쁨훈련에 힘써서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온전히 함께 하시고 또 가장 사랑 받는 예수님의 수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계시록으로 본 교회개혁 (계 1:9-16)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이 시간에 “계시록으로 본 교회개혁”이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교회개혁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회개혁은 대단히 절실하고 좋은 일이지만 교회개혁은 영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에 말씀과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잘못 주장하면 오히려 교회를 어지럽히거나, 자신이 개혁대상인지도 모르고 떠드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사람 보기에 성공적일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예로 남쪽 유다의 예언적인 개혁자 요시야가 유다는 물론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의 죄까지 개혁했지만 길게 가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피상적인 개혁일 뿐 백성들의 영적부흥까지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교회개혁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본문의 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1. 오직 예수교회로 개혁하는 것입니다.
12-13절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라 했습니다. 아시는 대로 촛대는 교회요, 금은 신성이나 믿음입니다. 그리고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신령한 교회가 교회개혁의 목표입니다. 예수님이 현대교회를 보실 때 ‘이 교회는 나의 교회가 아니야’ 하신다면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인자 같은 이", 인자는 육체를 입고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 자기를 일컬으시던 명칭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교회는 죄인을 위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바로 그 예수님이 함께 하신 교회입니다. 신앙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직 그 예수, 다른 예수여서는 안 됩니다.
행4:12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한국에는 자칭 예수가 많고, 한국교회에도 다른 종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가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세례서약처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뿐이신 줄 알고 그를 믿으며 의지한다.”는 확실한 믿음이 없이는 아직 구원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교회개혁의 가장 중요한 시작이요 핵심입니다.
2. 보혈로서 개혁해야 합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모습은 13절 "발에 끌리는 옷을 입"으셨는데 이 모습은 예수님이 대제사장이심을 나타냅니다. 발에 끌리는 옷은 죄를 덮으시는 속죄의 은혜입니다.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셨을까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보혈의 공로를 모르고 사탄의 결박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의 죄를 다 덮었다. 보혈로서 양심의 자유함을 얻으라’ 하시는 메시지입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시급한 문제가 보혈신앙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보혈을 노래하면서도 한 순간도 양심의 평안을 모르고 정죄감에 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의 종들도 영이 눌려 설교가 나오지 않고 경건하다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사탄의 결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보고가 올라갑니다. '하나님, 지상의 성도들이 모두 결박당해 있습니다.' 사탄이가 전 세계 성도들을 거짓으로 결박시켜 놓고 지금 지옥의 참극을 벌이고 있습니다. 계12:10에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라고 했어요. 그 덫에 걸렸습니다. 로마서 강해 하는 건 좋은데 명확하게 꼭 찝어서 가르치는 사람 많지 않고 누리는 사람은 더더욱 드믑니다. 한 마디로 복음을 잘 모릅니다.
롬5:1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8:1-2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님께서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요8:11), 롬8:33-34에도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했습니다.
문제는 보혈공로와 이신득의를 주장하면서도 누리지를 못합니다. 원인이 뭘까요? 회개한 후에만 보혈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회개 하느라 보혈을 믿을 새가 없습니다. 보혈을 제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회개하기 전에도 믿어라.’ 이렇게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이 작은 것 하나 몰라서 모두가 결박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아버지의 용납하시는 사랑을 믿고, 이 모습 이대로, 예수 이름으로, 이신득의 믿음으로, 보혈의 공로로, 담대히, 떳떳이, 약간은 뻔뻔한 듯하면서도 밝고 건강한 얼굴로, 제 3일을 통과한 에스더와 같이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보좌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한국교회에 이 결박이 풀리는 날 한국교회는 온 세계를 뒤덮고 말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들, 건강하고 장수하시면서 한국교회를 반듯하게 세워주십시오.
3. 경건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 주님의 모습은 13절 "가슴에 금띠를 띠고" 이 모습은 왕의 모습입니다(단10:5-6). 가슴은 마음의 중심이요, 띠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금띠였습니다. 금의 의미가 여러 가지지만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왕으로 삼고 변함없이 충성하고 열심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왕이시니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마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셨는데 내 주장 내 뜻대로 그건 내가 주라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이 됩니다.
왕은 두려운 존재입니다. 눅19:27에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고전16:22에도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벧전3:15에도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했고, 롬12:11에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했습니다.
예수를 주로 삼고 우리가 육체를 가진 날 동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죄를 멀리하고 경배할 때 성령이 임합니다. 그래서 교회사에도 경건운동이 성령운동입니다. 초대교회와 같이 몸과 마음을 다해 신앙생활합시다. 땅에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님처럼 무너진 제단 다시 쌓고 한국교회에 부흥운동을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4. 복음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14절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의로우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머리털만 아니라 머리까지도 흰 양털과 눈 같았습니다. 이렇게 나타나신 것은 우리의 지식과 의식과 사상까지도 온전히 새로워지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복음의 새 시대가 왔으니 복음적인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고후5:17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도 말도 바뀌고 자화상과 타화상까지도 바뀌어야 합니다. 육신적 선입견 버려야 합니다. 성도를 볼 때도 예수 안의 복 있는 사람, 하나님의 자녀, 예수 안의 새 사람, 하나님이 크게 쓸 사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믿고 귀하게 여기고 날마다 사랑하고 축복해주면 좋은 성도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만 가져도 기적의 주인공이 됩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날마다 거울 앞에서 복음적 자화상을 훈련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아버지께 사랑 받고 예수 안에서 영광스런 구원과 성령의 권능 받은 가장 위대한 자화상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뭘 못 이긴 것 있습니까? 성도는 예수 안에서 원수사랑도 가능하고 죽음의 공포까지도 이긴 자들입니다. 이 복음에 서는 훈련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를 완전한 복음의 진리에 세우시기 바랍니다.
5. 거룩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14절 "그의 눈은 불꽃같고" 본질과 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그리스도의 신적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이 불꽃같은 눈앞에 어떤 죄도 다 드러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나도 모르는 죄가 있다면 알려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보혈로서 양심의 자유를 누리더라도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는 회개하고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약4:8-10).
한 편 예수님의 이 모습은 교회의 세속화를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강단의 세속화, 행정의 세속화, 신앙의 세속화, 사역의 세속화, 방법의 세속화, 돈 받고 판결하고, 기타 윤리문제 돈... 찬송도 복음송도 부를 만한 찬송이 몇 곡 안 됩니다. 개혁할 일이 이렇게 많습니다.
6. 나를 죽이는 개혁이어야 합니다.
15절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발은 심판의 발입니다. 풀무불에 단련했으니 연단시키는 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빛난 발이니 변화시키는 발이요, 주석 같은 발이니 강한 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항거하면 지근지근 밟아버립니다.
교회마다 나를 못 죽인 자들이 많아서 예수님 화가 나셨습니다. 교회가 왜 이리 소란합니까? 왜 다들 잘났습니까? 목사와 목사, 목사와 장로, 교육목사와 부장과의 관계도 그렇고, 그래서 '아주 지근지근 밟고 싶다. 제발 깨어지고 죽어라. 섬겨라. 사랑하라. 그렇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 그런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자아처리를 영성운동의 핵심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7. 풍성한 강단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15절 하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많은 물소리는 풍성하고 불가항력적인 말씀입니다. 이 모습은 교회가 말씀으로 풍성해지기를 바라시는 모습입니다. 교회의 영양가 없고 부실한 설교 때문에 우리 예수님 진절머리가 나셨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성경연구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고, 발음도 분명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음향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분이 누가 골프 치자는 걸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다들 재밋다고 하는데 설교보다 더 재미있으면 설교 못하기 때문에 아예 맛을 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일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없게 해주세요.' 기도한다고 합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성경해석과 설교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8. 쓰임 받는 교회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16절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별은 주의 종들이요, 예수님의 오른손은 능력과 권세의 상징입니다. 주의 종들이 하나님의 팔에 붙들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쓰임 받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내 뜻을 앞세우거나 성령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손에 붙들립니다. 10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종이 아니라 그런 일군들이 수천 수만 명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9. 진리를 지키는 교회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16절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날선 검은 계2:16에 니골라당을 허용하지 말라고 하실 때 예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이 모습은 이단과 이설을 분별하고 대적하라는 교훈도 되지만, 우리를 향하여 성경을 더 밝히 깨닫고 교리적으로도 더 완전해지라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정확히 제시하는 천국 길의 안내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이신득의 교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신득의는 주장하지만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하니 심지어 칭의는 예수로 받고 변화는 이방종교식 영성으로 받으려는 웃지 못할 일도 생겼습니다. 구원 속에는 칭의도 성화도 영광도 다 들어 있고 이것도 믿음으로 받는 그 비밀을 각인에게 적용되도록 정확히 꼭 찝어서 가르쳐 줄 순 없나요?
자유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정통신앙을 파수한다는 보수주의도 얼마나 빗나갔는지, 신약학 교수인 신성종 박사가 기도하다 방언을 체험하고 그동안 신학생들에게 잘못 가르쳤음을 사과하고 확신을 바꾸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요즘은 천국간증까지 하러 다니십니다. 은사운동한다고 무당노릇만 하던 어떤 사람이 잘못을 깨닫고 돌아섰는데 이번에는 은사부정으로 돌아섰어요. 한국교회가 이런 식입니다. 이러니 교인들이 갈팡질팡합니다.
계시록만 해도 그렇습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계시록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만 독하신 분도 계시고 출판된 책 만해도 1000권이 넘는답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 역사의 종말과 세속사의 전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계시록이 성경인데 구속사이지 어찌 세속사입니까? 계시록의 흐름을 알아야 합니다.
인재앙은 어린 양 예수로 성경이 열린다. 나팔재앙은 성경이 열렸으니 이제는 전파되는 복음의 말씀으로 변화되는 과정, 대접재앙은 대접이 고난이듯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므로 부어주시는 성령의 충만하심입니다. 음녀와 바벨론의 멸망과 구속의 찬양은 패역한 세상에서 벗어나 거룩함을 받는 성도의 모습, 이어서 나타나는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 이것은 장차도 있겠지만 성령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복된 삶입니다. 한국교회를 더욱 성숙시킬 예리한 검을 가진 자들이 많아지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10. 해처럼 밝게 개혁되시기 바랍니다.
16절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예수님의 얼굴이 해여야 맞는데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다고 뭔가 이상하죠? 그러나 이 모습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렇게 밝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혹은 무료하고 평범해서 웃을 일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해처럼 밝게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믿음이 없어 어둡게 사는 우리들을 바라보실 때 우리 하나님 얼마나 서운하시겠어요?
그래서 살전5:16-18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러시면서 뭐라 말씀하십니까?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을 받은 나의 자녀들아, 더 밝게 살아라. 행복에 겨운 모습으로 살아라.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난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과 은혜를 모르고 사는 우리들을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 열 번째 개혁에서 적용을 강조하십니다. 영광스런 자녀가 되었으니 해처럼 빛나게 살아라. 아담과 하와가 창조 받을 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그 영광을 고수하지 못했습니다. 가정의 질서로 볼 때 그들은 평소의 삶에서 잘 훈련 받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은 평소에서 시작합니다. 다윗의 승리는 양을 치는 평소의 삶에서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악한 순간에만 적용하려니까 승리로 연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밤에도 기도하고 주무시고,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해처럼 빛나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기 전에 이미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행6:15). 그랬기에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원수를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본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보고 천국을 보고 행복을 보고 주 앞에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 행복의 천국바이러스를 온 세상에 퍼뜨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개혁자는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 개혁은 시작됩니다. 주님을 믿을 뿐 아니라 더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더 높이고 더 찬양하고 더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세포까지도 다 차지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아시아 일곱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처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귀한 개혁의 일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