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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1,3-7.17.20-27.33ㄴ-45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인천방에서 오셨네요.
여러분 사는 동네가 여기보다 더 따뜻할 겁니다.
이렇게 보면 산이 양쪽에 있는데 햇빛이 잘 드는 데가 있고 안 드는 데가 있죠.
햇볕이 잘 드는 데는 확실히 꽃이 빨리 피어요.
안 드는 데는 꽃망울이 올라온 채로 있다가 겨울 되면 딱 떨어지잖아요.
그리고 꽃들도 보면 피는 시기가 다르죠.
산수유가 아마 제일 먼저 피는 꽃일 거예요.
그다음에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 등등
가만히 보면 산수유, 개나리 같은 노란색이 제일 먼저 피고 그다음 복숭아 살구꽃 같은 분홍색 꽃이 피고, 그다음 흰색이 피어요.
그래서 배꽃이랑 사과꽃이 제일 늦게 펴요.
여기 있으면 다 알게 돼요.
4월 중순에 서울방이 예약되어있군요.
아마 오면서 감곡 전체에 복숭아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햇볕을 많이 받는 데는 빛이 따뜻하기에 꽃을 피우고, 안 받는 데는 안 피워요.
아주 단순한 이치지만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서 사는 사람은 은총의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게 되겠죠.
하지만 은총 가운데 안 사는 사람은 늘 추워요.
그리고 어둡고 햇빛 안 드는 데 보면 대낮에도 보면 깜깜해요.
그리고 또 발견한 재미난 것은 햇빛이 안 드는 곳에는 야생 짐승들이 살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햇빛 안 드는데 저녁에 햇빛 조금 한 조각 걸리는데,
한 조각이 걸려도 산 전체가 응달이래도 거기 있는 꽃이 먼저 피어요.
그러니 하느님의 그 은총도 그렇지 않겠느냐 이거지.
축복을 많이 받는 사람은 은총의 열매를 피지만, 응달진 산처럼 컴컴하면 사람도 안 가죠.
나는 피정 때 가끔 시작이나 졸린 시간에 해주는 이야기가 있어요.
팔십이 넘은 어느 은퇴 사제에게 본당 신부님이 주일에 미사 한 대만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얼마나 반가운 소리입니까?
사실 은퇴 신부님이 자기 동네 있어도 별로 신경 안 쓰거든요.
요즘 세상이 그런데 그것이 서운하면 우울증 오죠.
그나마 예전에는 전 본당 신자들이 1년은 찾아왔는데, 요즘은 6개월도 안 간다고 해요.
가끔 선배 신부님에게 전화하여 뭐 하냐 물으면 설거지 한 대요.
저도 작년 8월부터 혼자 살았으니까 같은 처지죠.
처음에는 몇 달 갈까 했는데 괜찮아요.
그리고 동정 점수가 있어서 그런지 가끔 반찬도 좀 갖다주어요.
혼자 사니까 어떠냐 물으시는데, 정말 너무 편해요.
밥해 먹는 것이 불편할 따름이지 그에 비해 얻는 자유로움이 너무 커요.
인간이 묘한 게 처음에 겸손하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있어.
사제관 문턱만 높여놓고.
내가 만날 사람 안 만날 사람을 자기가 다 가려서 결정해요.
아무튼 80이 넘은 신부님께 근처 본당 신부님이 주일 미사 한 대를 부탁드리니 고맙다고 하면서 매주 오셨죠.
신부님은 연로하시어 눈도 침침하고 안 보셨지만, 열심히 미사를 드리셨죠.
그런데 성작, 이것이 꽤 무거워요.
또 예전에는 항상 높이 들어 올렸죠.
할배 신부님도 정성을 다해 높이 들어 올리다 힘을 주었어요.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방귀를 뀐 거야.
방귀도 보면 종류가 무지하게 많죠.
‘뽕’하는 방귀는 청각적으로는 좀 깜짝 놀라도 후각적으로는 아주 상쾌해요.
근데 거의 화생방경보 수준의 방귀는 거의 소리가 안 나요. 그냥 픽~
할배 신부님이 그 방귀를 뀐 거죠.
처음에는 냄새가 제의에 가득 머물다, 제의 밑으로 빠져나왔겠죠.
그러니 그 옆에 무릎 꿇고 있던 복사 아이 중 하나가 뒤로 발랑 넘어갔어요.
그러더니 조금 있다 대리석 제대로 ‘땡그랑’하고 뭐가 떨어져.
아주 큰 대못이 데구르 굴러가는 거야.
어디서 떨어졌나 살펴보니, 세상에!
예수님이 코 막으시느냐 한 손에 있던 못이 빠진 거야.
사람의 몸에서 소화되어 밖으로 나가는 냄새도 이렇게 지독한데 사람이 죽으면 얼마나 냄새가 날까요.
오늘 라자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예수님이 찾아왔잖아요.
지금처럼 무슨 냉동실에 넣는 시절도 아니고 거기도 더운 나라예요.
송장 하나 썩으면 냄새가 대단해요.
온 산천지를 덮지요.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를 소생시키는 기적 이야기가 오늘 나오죠.
예수님이 사람을 대상으로 한 기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요.
첫 번째 구마, 강아지가 마귀 들린 거 예수님이 떼어낸 적 있어요? 오로지 사람이에요.
두 번째가 치유.
세 번째가 소생. 다른 말로 부활.
그 외에도 자연을 대상으로 한 기적도 있었죠.
성난 갈릴리 호수를 잠재웠잖아요.
그리고 지나가다가 무슨 나무 보고 ‘죽어라’ 하니 나무가 죽어버렸죠.
그런 자연을 대상으로 한 기적이에요.
마귀 쫓아내고 치유하는 것은 그때 당시에 마술사들도 가끔은 아다리가 맞아 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어느 마술사도 할 수 없었던 것이 딱 한 가지예요.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
이 소생 기적은 성경에 딱 세 번 나와요.
첫 번째 루카 복음 7장 11절에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는 얘기가 나옵니다.
두 번째는 마태복음 5장 21절에 야이로의 딸을 살려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대로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가 나오죠.
이것은 꾸며낸 소설이 아니겠죠.
오늘 복음은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라 하는 예수님이 극진히 사랑했던 가족 이야기죠.
얼마나 이 세 사람을 사랑했는지 라자로가 죽고 난 다음에 찾아가서 ‘가슴이 복받쳐 올랐다’ 하는 표현이 두 번 나와요.
그리고 눈물을 흘렸어요.
성경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렸다.’ 이것은 대단한 표현이거든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약한 모습을 안 보이기 위해서 그런 것을 적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복음사가들의 입장이에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인간적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할 정도니, 얼마나 마르타와 마리아 라자로를 사랑했는가.
그러니까 수난받으러 올라가시기 전 힘들으셨을 때 찾아간 집이 누구 집이에요?
마르타와 마리아 집 찾아갔잖아요.
그랬더니 마르타는 음식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니까 뭔가 심상치가 않아
‘지금 주님은 음식을 드시러 오시러 우리 집에 오신 것이 아니라 쉬러 오셨구나’ 하면서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가만히 ‘한 말씀만 하소서’ 하면서 말씀을 들었죠.
마르타는 부엌에서 마리아가 아주 우아스럽게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자기 도와주지 않는 걸 보고 보고
쟤 좀 혼 좀 내 달라고 했죠.
그러니까 예수님 뭐라고 그래요?
‘내버려 둬, 마리아는 자기 좋은 몫을 택했어. 지금 이 순간은 너도 들어와서 내 옆에 앉아서 그냥 내 얘기 듣는 거야.
나는 너희랑 얘기하러 왔어, 먹으러 온 것이 아니라.’
이 정도로 성경에서 가장 예수님이 인간적인 감성을 표현하는 가족은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가 사는 이 가정밖에 없었어요.
오늘 몇 가지 이 긴 복음을 제가 요약해 드려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라자로가 죽어가고 있다고 알려줬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냐면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빨리 가지 않고 뭉그적거리죠.
가자고 그래도 자꾸만 그냥 뭉그적거리다 나중에야 유다로 돌아가자 하십니다.
이미 유다로 돌아가자 했을 때는 라자로는 숨이 끊어졌을까요? 살아있었을까요?
끊어진 거예요.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을 예수님은 그전에도 많이 살리셨죠.
그런데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또 차원이 달라 만약 실패해버리면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죠.
예수님의 명성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수많은 안티들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일부러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처음에 가자고 할 때는 안 가시더니 나중에야 유다로 돌아가자 말씀하시죠.
한마디로 예수님은 죽음을 각오하고 유다로 돌아가자고 하는 겁니다.
라자로가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고, 그것이 잘못되었을 때 어떤 영향이 올 줄도 알고 계셨죠.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에서 우리는 뭘 깨우쳐야 하느냐?
우리도 누군가를 살리려는 마음이 있으면 자신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내 새끼 살릴 각오 하면 내가 죽을 각오하고, 그런 마음이 있으면 내 새끼 살려요.
그러나 누구나 입으로만 ‘아이고 안 됐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죠.
자신은 부서지지 않으면서 시간과 노력과 물질은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없어요.
옆집에 누가 배가 고파서 굶어 죽어가는데 묵주신공 열심히 해요.
‘주님 저 사람이 굶어 죽어간답니다.’
그러면서 저는 고기 밥상을 차려 먹고 있어
어떻게 응답이 올까요?
성모님이 나타나서 그냥 귀퉁배기 한 대 치시며, ‘이놈아 네가 먹으려 한 것 빨리 들고 저 사람 갖다 먹여 살려.’
희생도 안 하면서 어떻게 저 사람이 살아, 나를 통해서 저 사람을 살리려고 예비하고 계신 건데요.
어떤 사람이 아프다고 그래요. ‘주님 저 사람 아프대요. 도와주세요.’
어떻게 응답이 올까요?
베드로 사도가 나타나서 귀퉁배기 딱, ‘빨리 돈 들고 저 사람 둘러업고 응급실로 가.’
자신은 조금도 부서지지 않고, 사실은 조금의 시간도 물질도 눈곱만큼 손해 보지 않고, 오로지 립서비스만.
이러면서 과연 누구를 도와줄 수 있느냐 이거예요.
못 도와준다는 얘기죠.
예수님이 유다로 돌아가자 할 때는 예수님은 목숨을 내건 거예요.
못 살리면 내가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 각오하고 간 거예요.
두 번째로는 주님께서는 못 고치시는 병도 없고 용서 못 하시는 죄도 없다는 것이 두 번째 교훈입니다.
‘주님, 저는 죄를 하도 많이 지어서 회생할 기회가 없습니다. 안 되겠습니다.’ 하고 우리는 자포자기 하기 쉬워요.
라자로가 죽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찾아오시어 누이들은 처음에는 원망했잖아요?
마르타는 조금 일찍 오시지 원망하다가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합니다.
또 39절, 마르타가 ‘라자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납니다.’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예수님은 기도하셨죠.
42절,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은 뭐예요?
예수님께서 성부께 청하면 예수님은 못 하시는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회개의 끝은 절망이 되어서는 안 되고 기쁨이고 소생이 되어야 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 물론 암도 어떨 때는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병을 철학자들은 ‘절망’이라 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이미 죽은 지 사흘이나 돼서 송장 냄새가 나는 오빠의 시신 앞에 와 있는 예수님이 원망스러웠던 겁니다.
전갈은 전한 지가 한참 됐는데 ‘왜 이렇게 뜸을 들이시다 이제 오셨어?’
아주 원망하는 말투가 그 안에 가득 들어가 있어요.
이 두 자매의 모습은 절망 그 자체였어요.
아무 소용도 없었어요. 절망!
예수님께서는 못하시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그 순간에 이 자매는 잊고 있던 겁니다.
원망하는 겁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영적으로 죽을병 들 때가 있죠.
우울증에 빠지고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 십자가 보면서
‘주님 저 죽고 싶어요.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제가 죽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랬을 때 예수님 뭐라 그러셨습니까? ‘너는 죽을병이 아니다.’
이제 시신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소생 작업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소생시키기 위해서 세 번의 말을 하세요.
이 세 말을 우리는 ‘소생 삼언’ ‘부활 삼언’이라 합니다.
첫 번째는 39절의 ‘돌을 치워라.’
두 번째는 43절의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마지막 세 번째는 44절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예수님이 라자로에게 하셨던 이 말씀을 바로 우리에게 하는 말씀이죠.
첫 번째 ‘돌을 치워라.’
라자로를 죽음의 상태에서 못 벗어나도록 가로막고 있는 큰 돌을 치우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돌을 치워야 합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나를 영적으로 부활 못 시키는 그 돌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내면의 눈으로 살펴보고 그
돌을 온 힘을 다하여 밀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밀어낼 수 있어요. 왜냐?
다른 이들에게 기도를 청할 수 있기 때문에요.
‘나를 위해서 좀 기도 좀 해줘.’
주변에 기도하는 은인들을 우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요.
나도 안에서 밀어내고 밖에서도 밀어내야죠.
성서에는 나를 영적으로 부활 못 시키는 돌의 종류를 분명히 얘기하고 있어요.
방탕, 음행, 우상숭배, 원수가 돼서 싸우는 것, 시기하는 것, 분노하는 것, 이기심, 분열, 질투, 술주정.
갈라티아서 5장 19절에서 21절에는 이런 돌들이 바로 우리를 굴속에 가두고 있는 돌이라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치우라 하니 사람들이 달려들어 돌을 치웠어요. 치워줬어요,
사실 라자로 입장에서는 죽어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돌을 밀어요?
이번 경우는 합작이 아니라 100% 주변 사람들이 합심 기도예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무덤에서 돌을 끄집어낸 것이죠.
‘돌을 치워라’
다른 말로 하면 첫 번째 긍정적인 삶을 살아라,
두 번째는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세 번째는 너의 어두운 생각을 바꾸어라. 열등감의 돌, 악습의 돌, 죄악의 돌, 과거의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돌들,
그 돌을 치워야만 우리는 진정 부활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힘이 달리면 성체의 도움, 그리고 말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내 주변에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영적 은인에게 겸손하게 청해야 합니다.
그럼 반드시 곧 그 돌은 벗어나게 돼 있어요.
두 번째는 뭐라고 그랬죠?
‘라자로야 나오너라’ 그랬어요.
내가 살 곳은 굴속이 아니죠.
내가 살 곳이 굴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만의 그 캄캄한 골방에 갇혀서 교만의 방에 갇혀서
묘지 속에 갇혀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밖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도와서 돌멩이를 치워낸다 해도. 못 나와요.
‘야 좀 나와 나와. 싫어 난 여기가 더 좋아’
두들겨 패서 기절시켜 끌어내기 전에는 못 끌어내요, 맞죠?
양심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성체를 통해서, 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이제 돌을 치웠으니 나오라고 끊임없이 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제가 은퇴 미사 때 손 십자가를 하나씩 나눠줬어요.
이제는 없어서 못 드리는데, 그 손 십자가에 얽힌 많은 얘기가 있어요.
한 자매가 제 은퇴 미사에 참석하고 그것을 받아 갔대요.
제가 나눠주면서 ‘이 십자가는 치유의 힘이 있는 십자가일 거다. 왜냐?
한평생 하느님 사업을 하고 산 사제가 은퇴할 때 만든 십자가이기에 그런 능력이 있을 거라 믿는다.’라고 했거든요.
그 자매는 그 말을 100% 믿고 그걸 받아서 어디다 썼느냐? 아들한테 썼대요.
아들은 마흔둘인가 셋인데 중학생 때부터 포르노 중독자예요.
방 안 가득히 음란 비디오테이프가 수백 개가 있고 컴퓨터로 온종일 보는 게 음란물.
장가를 어떻게 보내면 1년 살고 여자가 도망을 가고.
방은 중학생 때부터 커튼을 연 적이 없대.
한마디로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둠의 방이었어요. 굴속이었어요.
엄마는 아들이 담배 피우러 간 사이에 아들 침대 안쪽에 표시 안 나게 십자가를 집어넣었대요.
아들이 돌아와서 방문 걸어 잠그고 한 10분도 안 됐는데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오더니 혼자 중얼거리더래요.
‘아이고 더러워. 이 더러운 걸 내가 어떻게 보고 살았지?’
엄마는 부엌에서 일하다 이 소리를 듣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대요.
기적이 일어나는 거 아니야?
아들이 몇 시간 후 쓰레기봉투 오십 장만 달라고 하더래요.
그랬더니 3일 동안 벽마다 꽉 차 있던 음란 비디오테이프를, 그냥 버리면 딴 놈이 또 볼 그거라 하면서
나사로 다 풀어 플라스틱은 플라스틱대로, 또 테이프도 가위로 다 잘라 한 열 포대 이상을 만들어
분리수거장으로 끌어다 버리더래요.
그러고 딱 들어오더니 중학교 때 닫았던 커튼을 수십 년 만에 쫙.
그러니 빛이 쫙 들어와요.
굴 같은 방에 빛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더니 아들이 심심한데 성경이나 써보겠다고 성경책 빌려달라고 하더니,
문방구 가서 노트를 잔뜩 사 오더니 쓰기 시작하더래요.
그때 엄마가 뒤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너한테 고백할 거 있다.’ 하면서 이불을 들었죠.
십자가가 있잖아?
그것을 보더니, 아이가 뒤로 그냥 주저앉더래요.
‘엄마 이게 뭐야? 언제부터 이것이 있었어?’
‘열흘 전에 어느 신부님 은퇴 미사 때 갔더니 이 십자가를 선물로 주셨다.
신부님이 ’이 십자가는 구마의 힘이 있고, 치유의 힘이 있는 특별한 십자가니까 그렇게 선용해라‘
난 네 생각밖에 안 났다.
네가 담배 피우러 가면서 이렇게 했더니 너의 첫 마디가 그거였고 상상도 못 할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그 얘기를 듣고 아들은 십자가를 붙들고 펑펑 울었대요.
중학생 때 닫힌 캄캄한 방.
수십 년 만에 예수님이 얘기하셨겠죠.
‘문 열어라, 이제. 그리고 너 다시 새롭게 부활해야 한다.’
마흔세 살 된 음란 포르노 중독자는 예수님의 손 십자가로 소생을 한 거예요.
지금은 3년째 매일 미사 열심히 다니고 청년 레지오 들어서 완전 새사람이 되었대요.
오늘 예수님이 43절에 ‘라자로야 나오너라. 네가 사는 곳은 컴컴한 굴속이다.’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서, 자기만의 음란 세상에 갇혀서, 교만한 세상에 갇혀서,
욕망의 굴속에 갇혀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면 나오게 할 재간이 없죠.
끊임없이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면서 양심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성취를 통해서 성사를 통해서 계속 얘기해 주세요.
‘나와. 이제 굴 열어놨으니까. 이제 나오기만 하면 돼’
며칠 전 복음에 38년 동안 벳자타가에 앉아 물이 흔들리기만 기다리던 사람 얘기 있었죠.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데도 본인이 안 일어난다면 도와줄 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과부의 아들이 상여에 실려 갈 때도 ‘젊은이여 일어나라’ 했어요.
생명을 불어넣어 준 것은 내가 할 일이지만 일어나는 것은 네 몫이야.
이것까지는 내가 못 해줘. 너 스스로 해야 해.
아마 제가 그때 강론에서 정형외과에 가면 반드시 거치는 곳이 재활 과정이라 했어요.
두 달 동안 손이 묶여 있다가 깁스 풀자마자 의사가 ‘이제 팔 좀 펴보세요.’
‘안 돼요. 안 돼요.’
‘괜찮습니다. 의학적으로 이제 아무 문제 다 붙었어요. 펴세요.’
매우 아프죠.
두 달 다리 깁스한 것 풀고 발 디뎌보세요.
‘무서워요. 못 디뎌요.’
물리치료실에 가면 인정사정없이 비틀죠.
그런데 재활하는 과정이 무섭다고 해서,
발 딛는 거를 두려워한다면 팔 펴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 사람은 영영 팔 병신으로 살아야 해요.
뼈가 다 이미 붙었는데도 그렇죠.
병원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재활을 안 시켜요
재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집에서 꼭 하라고 하죠.
그것을 열심히 눈물이 나더라도 기를 쓰고 하는 사람은 같은 날 똑같은 수술을 받았다 하더라도 먼저 걸어 다녀요.
근데 몇 번 하다가 잔소리하는 의사도 없고 힘들어서 안 할래 하면 팔 병신으로 사는 거예요.
나오는 것은 라자로의 몫이에요.
세 번째 ‘풀어주어서 가게 하여라.’
라자로의 시신을 감아놓은 천들을 풀어주어서 자유롭게 걸어가게 하라는 말씀이죠.
예를 들어서 용서라고 하는 걸 생각해 봅시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이웃이 나를 용서해 주지 않고 미워하고 있으면 나는 자유로울까요.
부자유로울까요?
내가 저 사람한테 잘못했고 나도 알아. 그런데 저 사람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날 용서해 주는 기미가 없어.
그러면 나는 자유를 못 느끼는 거예요.
미워하고 있는 그 사람 역시 자유로울까요, 부자유로울까요?
미움받는 사람이나 미워하는 사람이나 다 칭칭 감고 있는 거야.
그러면 자유롭게 움직이질 못해요.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때는 그 사람 용서해 줘야 해요.
그래야만 그 사람도 자유로울 수 있고 나도 자유로울 수가 있는 거죠.
풀어줘서 가게 해야 합니다.
미움이라고 하는 그 천을 가지고 저 인간의 몸뚱아리를 똘똘 내가 감아놨어.
그러면 나도 불편해요
용서로 상대를 풀어주어서 자유롭게 해주면 나도 해방돼서 행복해진다는 영적인 진리죠.
그래서 오늘 우리 사순절 끝날 날도 이제 많지 않았죠.
이 강론을 듣는 모든 신자에게 제가 드리고 싶은 묵상 거리는
이 소생 삼언을 묵상하면서 마지막 부활절을 준비해 보자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돌을 치워라!’
나를 소생 못 시키는 내 돌의 종류가 무언지는 확인이나 하고 그 돌을 치우려 노력하고 살았나?
긍정적인 삶,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아야 하고 생각을 바꾸려고 애를 썼는가?
열등감이라고 하는 돌, 악습이라고 하는 돌, 죄악이라고 하는 돌, 상처라고 하는 돌로부터 내가 벗어나려고 애를 썼는가?
성서에서 알려주는 갈라티아서 5장 19절 이하의 말, 거기에 나한테 해당하는 돌은 없는가 묵상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라자로야 나오너라’
굴속에 좋다고 우기는 인간에게 바깥 햇빛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지 아무리 설명해도 안 나와요.
‘나는 커튼 닫고 사는 게 편해. 왜 자꾸 커튼 열어?’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황반변성 녹내장이 있어요.
그러다 보니 빛이 굉장히 고통스러워요.
이 불빛도 내가 며칠을 고민하면서 정한 거예요.
그리고 밖에 나갈 때도 이 안경도 자동으로 바뀌는 안경이에요.
한동안은 커튼을 닫았는데 내가 미치겠는 거예요.
내가 정신병자가 돼가는 것 같아.
그런데 커튼을 닫고 살아가는 것이 내 눈은 편안해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내 영혼은 힘들어해요.
부활절을 앞두고 내가 일어서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가?
한번 주저앉아서 굴이 뻥 뚫렸는데도 불구하고 ‘어두운데 살아보니까 이것도 편하네 냅둬’
이렇게 어둠의 자식으로 내가 물들어 있지는 않는다는 것 살펴봐야죠.
주님은 우리의 의지를 존중하시죠.
세 번째는 ‘풀어줘서 가게 하여라.’
내가 누군가를 지금 묶어놨다면 내가 풀어줘야 나도 편하고 저 사람도 해방이 되는 거예요.
또 내 몸뚱아리가 뭔가 뭐로 감겨 져 있어.
돈에 대한, 물질에 대한 생각 때문에 머리끝에 발가락까지 그걸로 도배되어있어.
미움으로 나 자신이 감겨 져 있을 수 있고, 어떤 열등감으로 감겨 져 있을 수도 있죠.
나를 감고 있는 것, 또 내가 상대편을 감아놓은 것 그것이 무언가를 우리들이 부활절 맞이하면서
잘 성찰해서 판공성사 보셔야지요.
그것이 바로 내가 누누이 강조하는 적극적인 성찰 거리입니다.
소극적인 성찰 거리는 누구나 다 알아요.
그렇지만 이런 적극적인 성찰 거리, 이런 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가 많거든요.
소생 삼언을 묵상하면서 부활도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겁니다.
♣2023년 사순 제5주일 (3/26)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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