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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논의한 내용이 대부분이 다루어지고 있고 이미 읽었지만, 복습 차원에서 발췌합니다. 그러나 유기적 구성 개념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시원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네요. 구리와 철 이야기는 유기적 구성이 아니라 가치구성이네요. 하지만 그래서 유기적 구성이 다르다고 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과 생산성 증대, 이윤율 저하, 자본주의 너머(1)
변화한 사정에서 동일한 물적 자본을 재생산하는 데 두 배의 노동시간 또는 절반의 노동시간이 든다면, 화폐의 가치가 불변인 경우, 종전에 100원이었던 자본은 지금은 200원 또는 50원으로 될 것이다. 이런 가치증감이 자본의 모든 구성부분들에 균등하게 일어난다면, 이윤도 또한 2배의 화폐액 또는 절반의 화폐액으로 표현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가치증감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자본의 가변부분과 불변부분 사이의 비율)의 변화를 수반한다면, 기타의 조건들이 불변인 경우, 이윤율은 가변자본의 상대적 증대에 따라 상승하고 상대적 감소에 따라 하락할 것이다. 만약 투하자본의 화폐가치만이 (화폐의 가치변화 때문에) 증감한다면, 잉여가치의 화폐표현도 동일한 비율로 증감할 것이며 이윤율은 변동하지 않을 것이다.(자본3,174)
노동의 착취도가 불변이라도 불변자본의 구성부분들의 가치변동이나 자본의 회전시간의 변동은 이윤율을 변동시킨다. 따라서 나란히 존재하는 서로 다른 생산부문들의 이윤율은, 기타의 조건들이 동등한 경우, 투하자본들의 회전시간이 다르든가 이 자본들의 유기적 구성부분들 사이의 가치비율이 다르다면, 달라질 것은 당연하다.(자본3,179)
첫째의 비율은 기술적 조건에 근거하고 있으며, 생산성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서는 주어진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예컨대 하루에 일정량의 생산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일정량의 생산수단−기계⋅원료 등−을 운동시켜 생산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의 노동자가 가리키는 일정량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일정한 수의 노동자가 일정량의 생산수단에 대응하며, 따라서 일정량의 살아 있는 노동이 생산수단에 이미 대^상화되어 있는 일정량의 노동에 대응한다. 이 비율은 다른 생산분야들에서, 그리고 흔히들 동일한 산업의 다른 부문들에서도 심한 차이를 보인다. 물론 전혀 다른 산업부문들에서 이 비율이 우연히 동일할 수도 있다. 이 비율은 자본의 기술적 구성을 형성하며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현실적인 바탕이다.(자본3,180-181)
그러나 가변자본이 노동력의 단순한 지표이고, 불변자본이 이 노동력이 처리하는 생산수단량의 단순한 지표인 한에서는, 산업부문이 다르더라도 자본의 기술적 구성은 동일할 수가 있다. 예컨대 구리를 취급하는 어떤 작업과 철을 취급하는 어떤 작업에서 노동력과 생산수단 사이의 비율이 동일할 수가 있다. 그러나 구리는 철보다 더 비싸기 때문에, 두 경우에 가변자본과 불변자본 사이의 가치비율은 다를 것이며, 따라서 두 자본의 가치구성도 다를 것이다.(자본3,181) : 가치구성이 한쪽은 3:1이고 다른 쪽은 2:1일 경우, 유기적 구성이 다르다고 하면 아무 문제 없지만, 기술적 구성이 같으므로 유기적 구성도 같다고 한다면, 이때의 유기적 구성은 3:1인가 아니면 2:1인가?
기술적 구성과 가치구성의 구별은 모든 산업부문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즉 자본의 두 부분 사이의 기술적 구성이 불변이더라도 가치비율은 변동할 수 있으며, 또 기술적 구성이 변동하더라도 가치비율은 동일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는 사용되는 생산수단의 양과 노동력의 양 사이의 비율 변동이 반대방향의 가치 변동에 의하여 상쇄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자본3,181)
자본의 가치구성이 자본의 기술적 구성에 의하여 결정되며 이것을 반영하고 있는 한, 우리는 이 가치구성을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고 부른다.(자본3,181)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차이는 자본의 절대적 크기와는 상관이 없다. 문제로 되는 것은 각 100단위의 자본 중 얼마가 가변자본이고 얼마가 불변자본인가 하는 것뿐이다.(자본3,185)
동일한 크기의 자본들[또는 다른 크기의 자본들을 100단위로 환원시킨 것]은, 노동일과 노동착취도가 동일하다 하더라도, 매우 다른 잉여가치량(따라서 이윤)을 생산하게 된다. 왜냐하면 각각의 생산분야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달라 자본의 가변부분이 다르며(즉 운동하는 살아 있는 노동의 양이 다르며), 이에 따라 잉여노동[잉여가치와 이윤의 실체]의 취득량이 다르기 때문이다.(자본3,185)
어느 특정한 시점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두 개의 요소에 의존한다. 첫째는 사용되는 노동력과 생산수단 사이의 기술적 비율이고, 둘째는 이런 생산수단의 가격이다. 이 구성은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백분율로 고찰되어야만 한다. 어느 자본이 4/5의 불변자본과 1/5의 가변자본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80c+20v라는 공식으로 표현한다.(자본3,192)
더욱이 자본구성의 이런 점진적인 변화가 어떤 개별 생산분야의 특징이 아니라 거의 모든 생산분야 또는 적어도 결정적인 생산분야에서 일어나며, 따라서 그 변화가 그 사회의 총자본의 평균 유기적 구성을 변화시킨다고 가정한다면, 가변자본에 대비한 불변자본의 이런 점차적 증가는−잉여가치율 또는 자본의 노동착취도가 불변이라면−필연적으로 일반적 이윤율의 점차적인 저하를 일으킬 것임에 틀림없다.(자본3,264)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달과 더불어 불변자본에 비하여, 따라서 또 운동되는 총자본에 비하여 가변자본이 상대적으로 감소한다는 것은 이미 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하나의 법칙이다. 이것은 단순히 다음을 의미할 뿐이다. 즉 일정한 가치의 가변자본이 고용하는 동일한 수의 노동자 또는 동일한 양의 노동력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부에서 발달하는 독특한 생산방법의 결과로, 동일한 기간에 점점 더 증대하는 양의 노동수단(기계와 각종 고정자본)과 원료⋅보조재료를 운동시키고 가공하며 생산적으로 소비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일한 수의 노동자들이 점점 더 증대하는 규모의 불변자본을 처리한다는 것이다.(자본3,264)
이처럼 불변자본에 비하여 따라서 또 총자본에 비하여 가변자본이 점점 더 감소한다는 것은, 사회적 총자본의 평균 유기적 구성이 점점 더 고도화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이것은 또한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이 점점 더 발달한다는 것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한데, 이 점은 기계와 고정자본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함으로써 동일한 수의 노동자들이 동일한 시간에 일반적으로 더 많은 원료와 보조재료를 생산물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증명된다.(자본3,264-265)
이와 같은 불변자본 가치량의 증대−이것은 불변자본을 소재적으로 구성하는 사용가치의 현실적인 양의 증대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에 대응하여 생산물이 점점 더 값싸게 된다. 각 개별 생산물은 그 자체로 보면 생산의 더 낮은 발달단계−여기에서는 노동에 지출되는 자본이 생산수단에 지출되는 자본보다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한다−에서보다 더 적은 노동량을 포함하고 있다.(자본3,265)
자본주의적 생산은 불변자본에 비해 가변자본을 점점 더 감소시킴과 함께 총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점점 더 고도화시키는데, 이것의 직접적인 결과로, 잉여가치율이나 노동의 착취도가 불변이거나 심지어 증대하는 경우에도, 일반적 이윤율은 계속 하락한다. (이 하락이 왜 이와 같은 절대적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누진적 하락의 경향으로 나타나는가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할 것이다.)(자본3,265)
살아있는 노동의 사용량이 이것에 의해 운동되는 대상화된 노동량−즉 생산적으로 소비되는 생산수단의 양−에 비하여 점점 더 감소하기 때문에, 이 살아있는 노동중 지불되지 않고 잉여가치로 대상화되는 부분도 총투하자본의 가치에 비하여 그 비율이 점점 더 감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잉여가치량과^ 총투하자본 사이의 비율이 이윤율을 나타내므로 이윤율도 점차로 저하하게 되는 것이다.(자본3,265-266)
이윤은 잉여가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데, 다만 잉여가치를 그것의 원천인 가변자본과의 관계에서 본 것이 아니라 총자본과의 관계에서 본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윤율의 저하는 총투하자본에 대한 잉여가치 그것의 비율 저하를 표현하며, 따라서 이것은 잉여가치가 각종 범주들로 분할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자본3,267)
이윤율의 누진적 저하의 법칙[또는 살아 있는 노동이 운동시키는 대상화된 노동의 총량에 비하여 취득되는 잉여노동이 상대적으로 감소하는 것]은, 사회적 자본이 운동시키고 착취하는 노동의 절대량, 그리고 또 사회적 자본이 취득하는 잉여노동의 절대량이 증가하는 것을 결코 제외하지 않으며, 또한 마찬가지로 이 법칙은 개별 자본가의 통제 아래에 있는 자본들이 증대하는 노동량 따라서 또 잉여노동량을 처분하는 것[잉여노동량은 노동자 수의 증가 없이도 증가한다]을 제외하지도 않는다.(자본3,270)
노동이 운동시키는 불변자본(고정적인 것과 유동적인 것)의 양이 증대함에 따라, 잉여가치량과 불변자본의 가치[불변자본의 양과 동일한 비율로는 증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증가한다] 사이의 비율은 저하한다. 이 비율 그리고 또 이윤율은, 자본이 여전히 동일한 양의 살아 있는 노동을 지배하고 동일한 양의 잉여노동을 흡수하더라도 저하한다.(자본3,270)
이 비율이 변동하는 것은 살아 있는 노동의 양이 감소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는 노동이 운동시키는 이미 대상화된 노동의 총량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 감소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며, 따라서 사용되는 노동의 절대량이나 잉여노동의 절대량이 감소하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이윤율의 저하는 총자본 중 가변적 구성부분의 절대적 감소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감소−즉 불변적 구성부분에 대한 가변적 구성^부분의 상대적 감소−에서 생긴다.(자본3,270-271)
자본이 고용하는 노동자의 수(즉 자본이 운동시키는 노동의 절대량), 그리고 또 자본이 흡수하는 잉여노동의 절대량(즉 자본이 생산하는 잉여가^치의 양), 이리하여 자본이 생산하는 이윤의 절대량은, 이윤율의 누진적인 저하에도 증가할 수 있으며 그리고 누진적으로 증가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바탕 위에서는 가능할 뿐 아니라 [일시적인 변동을 제외한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자본3,271-272)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본질적으로 축적과정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달함에 따라 단순히 재생산되고 유지되어야 할 가치량은 [사용되는 노동력이 불변인 경우에도] 노동생산성의 상승에 따라 증대한다.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이 증대함에 따라 생산되는 사용가치의 양은 더욱 크게 증대하며 그 중에는 생산수단도 포함된다. 이 추가적 부가 자본으로 재전환되기 위해 흡수해야 하는 추가적 노동은, 이런 생산수단(생활수단도 포함)의 가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양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가 생산과정에서 상대하는 것은 생산수단의 가치가 아니라 그것의 사용가치이기 때문이다.(자본3,272)
그런데 자본의 축적 그것과 이것에 수반하는 자본의 집적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하나의 물질적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생산수단의 이런 증가는 노동인구의 증가를 수반한다. 즉 과잉자본에 대응하는 노동인구의 창조 또는 심지어 과잉자본의 일반적 요구를 초과하는 과잉노동인구의 창조를 수반한다. (자본3,272)
그러므로 자본으로 전환할 생산수단의 양적^ 증대는 그것에 대응하는 증가한, 심지어 과잉의 착취가능한 노동인구를 항상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의 성질 그것으로부터 나온다. 이리하여 생산과정과 축적과정이 진행함에 따라, 취득가능한 그리고 실제로 취득되는 잉여노동의 양, 이리하여 사회적 자본이 취득하는 이윤의 절대량은 증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생산과 축적의 위와 같은 법칙들 그것이 불변자본의 양과 함께 그것의 가치를, 살아 있는 노동으로 전환되는 가변자본 부분의 가치보다 더욱 더 급속하게 누진적으로 증대시킨다. 이리하여 동일한 법칙들이 사회적 자본에 대하여 이윤량의 절대적 증대와 이윤율의 저하를 모두 일으키게 된다.(자본3,272-273)
이 집적과 더불어 이 집적에 발맞추어 직접적 생산자들에 대한 수탈이 누진적으로 진행된다. 이리하여 개별자본가들이 점점 더 큰 노동자집단을 지휘하게 되며(가변자본이 불변자본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아무리 감소하더라도), 그들이 취득하는 잉여가치량[따라서 또 이윤량]은 이윤율의 저하와 함께 그리고 그 저하에도 불구하고 증대한다. 개별자본가의 지휘 아래 대규모 노동자집단을 집적시키는 바로 그 원인들이, 사용하는 고정자본의 양과 원료⋅보조재료의 양을 살아 있는 노동의 상용량에 비하여 점점^ 더 큰 비율로 증가시킨다.(자본3,273-274)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달에 정비례하여 상대적으로 과잉의 노동인구가 나타날 가능성도 발달하는데, 이것은 사회적 노동의 생산성이 감퇴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증대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노동인구와 생활수단(또는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수단) 사이의 절대적 불균형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의 자본주의적 착취에서 생기는 불균형[즉 자본의 누진적 증대와 자본이 필요로 하는 인구 증대의 상대적 감소 사이의 불균형] 때문이다.(자본3,277)
요컨대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의 발달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전에 따라, 한편에서는 이윤율의 누진적 저하경향으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취득되는 잉여가치(또는 이윤) 절대량의 끊임없는 증대로 표현된다. 따라서 대체로 보아 가변자본과 이윤의 상대적 감소는 이 두 개의 절대적 증가와 나란히 나아가고 있다. 이런 이중의 효과는,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총자본의 증가가 이윤율의 저하보다 더욱 급속히 진행되는 경우에만 나타날 수 있다.(자본3,278)
더 높은 구성(즉 불변자본의 상대적으로 급속한 증대)에서 절대적으로 증가한 가변자본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총자본은 구성의 고도화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여야 한다. 이 결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달하면 할수록 동일한 수의 노동력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큰 자본량이 필요하게 된다(물론 증대하는 노동력을 고용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자본3,278)
개별상품들[이것의 합계가 자본의 총생산물을 구성한다]의 가격이 하락한다는 것은, 일정한 노동량이 더 큰 상품량으로 실현되어 각각의 개별상품이 이전보다 적은 노동을 포함하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 불변자본의 일부인 원료 등의 가격이 등귀하더라도 위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예외적인 경우(예컨대 노동생산성의 발달이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요소들 모두를 균등하게 싸게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잉여가치율이 상승하더라도 이윤율은 저하할 것이다. 왜냐하면 (1) 새로 첨가되는 노동총량이 더 적어지면 이 총량 중 더 큰 부분이 부불노동이라고 하더라도, 이 부불노동은 이전의 더 큰 노동총량의 더 작은 부불부분보다 더 적어질 것이기 때문이며, (2) 자본구성의 고도화는, 개별상품의 경우 상품가치 중 새로 첨가되는 노동을 표시하는 부분이 원료⋅보조재료⋅고정자본의 마멸분을 표시하는 가치부분에 비하여 감소하는 것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자본3,282): 자본구성은 단순히 가치구성인가 유기적 구성인가?
앞으로 더 나가기 전에,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이미 여러 번 전개된 두 개의 명제를 다시 한 번 반복한다.
첫째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달과정에서 상품을 값싸게 만드는 바로 그 과정이, 상품생산에 투하되는 사회적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변화시키고 이리하여 이윤율을 저하시킨다. 그러므로 개별상품의 상대적 비용의 감소[이 비용 중 기계의 마멸분을 표현하는 부분의 감소를 포함]를 가변자본에 비한 불변자본의 가치증대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물론 거꾸로, 불변자본의 상대적 비용의 감소−불변자본의 소재적 요소들의 양이 불변이거나 증가하는 경우−는 이윤율을 상승시키는 작용, 즉 점점 감소하는 비율로 사용되는 가변자본에 비하여 불변자본의 가치를 그^만큼 감소시키는 작용을 한다.(자본3,298-299) : 그러면 유기적 구성도?
둘째로, 개별상품(이것의 총체가 자본의 생산물을 구성한다)에 포함되어 있는 살아있는 노동이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원료와 그것의 생산에 소비된 노동수단에 비하여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즉 사회적 생산성의 발달에 따라 상품들의 생산에 더 적은 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에 점점 감소하는 양의 살아 있는 노동이 상품들에 대상화된다는 사실]은, 상품에 포함되어 있는 살아 있는 노동이 지불노동과 부불노동으로 분할되는 비율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상품에 포함되어 있는 살아 있는 노동의 총량은 감소하더라도, 부불부분은−지불부분의 절대적 감소나 상대적 감소에 의하여−지불부분에 비하여 증대한다. 왜냐하면 상품에 포함되는 살아 있는 노동의 총량을 감축시키는 생산방식 그것이 절대적⋅상대적 잉여가치의 증대를 가져오기 때문이다.(자본3,299)
이윤율의 저하경향은 잉여가치율−즉 노동착취도−의 상승경향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므로 임금율의 등귀를 가지고 이윤율의 저하를 설명하는 것−예외적으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보다 더욱 불합리한 것은 없다. 이윤율을 형성하는 관계들이 올바로 이해될 때 비로소 통계에 의하여 다른 시기, 다른 나라의 임금율을 올바르게 분석할 수 있다. 노동이 덜 생산적으로 되기 때문에 이윤율이 저하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더 생산적으로 되기 때문에 이윤율이 저하하는 것이다. 잉여가치율의 증가와 이윤율의 저하는 노동생산성의 증대가 자본주의적으로 표현되는 특수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자본3,299)
자본의 증대(즉 자본의 축적)가 이윤율의 저하를 일으키는 것은, 이 증대가 자본의 유기적 구성부분들 사이의 비율을 변동시키기 때문일 뿐이다. 그런데 생산방식의 끊임없는 매일의 변혁에도 불구하고 총자본 중 이러저러한 크거나 작은 부분은 주어진 평균적인 구성비를 바탕으로 일정한 기간 축적을 계속하므로, 이런 자본의 증대는 유기적 구성의 변동을 포함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윤율의 저하를 일으키지 않는다. 옆에서는 새로운 방법이 이미 도입되고 있음에도, 낡은 방법에 의거한 자본의 끊임없는 증대와 생산의 확장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이윤율이 사회적 총자본의 증대와 동일한 비율로 저하하지 않는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자본3,329)
어쨌든, 임금노동자 수의 상대적인 감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절대적으로 증가해야 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필요조건이기는 하다. 이 생산양식에서는 노동력을 매일 12~15시간 취업시킬 필요가 더 이상 없게 되자마자 노동력은 남아돌게 된다. 노동자의 절대수를 감소시키는 생산력의 발달−즉 국민 전체가 더 짧은 시간에 총생산을 실제로 달성할 수 있게끔 하는 생산력의 발달−은 이 생산양식에서는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생산력의 발달은 인구의 다수를 실업자로 만들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자본3,329-330)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시 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징적인 한계를 보게 되며, 자본주의적 생산은 결코 생산력의 발달이나 부의 생산을 위한 절대적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일정한 점에 달하면 이 발전과 충돌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분적으로 이런 충돌은 주기적 공황으로 나타나는데, 공황은 노동인구의 이러저러한 부분이 자기의 종래의 직업에서 불필요하게 될 때 생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한계는 노동자의 잉여노동시간이며, 사회가 얻는 절대적 여가시간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하여 생산성의 발달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잉여노동시간을 증가시키기 때문이지 물질적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 일반을 감축시키기 때문은 아니다. 이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순 속에서 진행된다.(자본3,330)
이미 본 바와 같이 자본축적의 증대는 집적의 증대를 포함한다. 이리하여 자본의 힘이 증대한다. 다시 말해 현실적 생산자들에 대립하는 사회적 생산조건들−이는 자본가로 인격화되어 있다−의 자립화가 점점 더 강화된다. 자본은 점점 더 사회적 힘[이 힘의 행사자는 자본가다]으로 나타나는데, 이 사회적 힘은 어느 개인의 노동이 창조할 수 있는 것과는 이미 어떤 관련도 없다. 그러나 이 사회적 힘은 사물[자본가의 힘의 원천인 사물]로서 사회에 대립하는, 소외되고 자율적인 사회적 힘이다. 자본이 형성하고 있는 일반적 사회적 힘과, 이런 사회적 생산조건들에 대한 개별 자본가들의 사회적 힘 사이의 모순은 점점 더 화해할 수 없게 되지만, 또한 문제의 해결책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모순은 동시에 생산조건들을 일반적⋅공동적⋅사회적 조건들로 전환시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전환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생산력의 발달에 의하여, 그리고 이런 발달이 이루어지는 방식과 수단에^ 의하여 달성된다.(자본3,33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