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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밀양 - 서울
밀양 탈송전탑 탈핵 운동의 이야기
한국에서 에너지 정의와 탈핵 운동의 역사를 쓴다면
그 첫 페이지에는 ‘밀양 할매’가 있어야 한다.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이 시작된 지 19년,
2014년 6월 11일 행정대집행이 자행된 지 10년.
세상은 밀양의 투쟁을 진 싸움으로 기억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진 싸움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탈핵’ 이슈를 최초로 한국 사회의 주요 의제로 등장시킨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의 의미를 짚어 보고,
그 속에서 꽃핀 ‘여성 연대’와
‘탈송전탑 탈핵 운동가’로서 ‘밀양 할매’를 재조명하다!
2024년, 에너지 정의와 탈핵 운동 역사를 쓴다면 그 첫 페이지에는 ‘밀양 할매’가 있다
2013년, 밀양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데서 시작된 ‘탈핵 희망버스’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도 한국 사회의 주요 의제가 되지 못했던 ‘탈핵’ 문제를 전 사회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의제로 만든 첫 장면이었다.
2014년 6월, 행정대집행 이후 송전탑이 다 들어서고, 문재인 정부의 탈핵 공약이 숙의 민주주의 실험장의 이슬로 스러진 후, 밀양의 투쟁은 수많은 지난 투쟁 중 하나로 잊혀 갔다. 하지만 주민과 연대자들은 아직 손을 놓지 못했다. 강원 홍천군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제2, 제3의 ‘밀양’이 계속되고 있고, 탈핵과 에너지 정의가 기후 부정의의 해법임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4년, 밀양 탈송전탑 탈핵 운동의 의미를 다시 짚어 보는 책을 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에너지 정의와 탈핵 운동의 역사를 기술할 때 가장 먼저 호출해야 할 이름은 바로 ‘밀양 할매’이다.
밀양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생생한 증언,
그리고 운동가이자 활동가로서 ‘밀양 할매’에 대한 재조명
이 책은 총 13개의 이야기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에서 중반부까지가 주로 밀양 송전탑 건설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국가폭력과 그로 인한 마을공동체 파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후반부에서는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 속에서 피어난 여성 연대와 탈송전탑 탈핵 운동가로서 밀양 할매를 재조명한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공을 들여 기술한 부분은 국가 권력과 한국전력의 만행에 대한 내용이다. ‘나랏일’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실상 어떤 폭력을 행사했고, 한국전력이 공공 기관을 등에 업고 어떤 기만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랜 역사와 관계성을 지닌 마을공동체는 어떻게 해체되었는지에 대한 증언이 괴로울 정도로 생생히 담겨 있다.
하지만 밀양의 투쟁이 고통과 패배의 기억으로만 소환되는 것도 아니고, ‘밀양 할매’가 희생양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구술자들은 정부와 한국전력에 대한 분노를 쏟아 내다가도 천막 농성장을 떠올리면 ‘즐거운 나의 집’이라며 그때를 그리워했고, 함께 밥을 해서 나누어 먹던 따뜻한 기억을 되살렸다. 밀양 할매들은 연대자들이 있었기에 싸움을 계속 이어 갈 수 있었다고 말하고, 연대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붙든 것은 ‘밀양 할매’였다고 강조한다.
싸움이 길어지면서 남은 주민들과 연대자들은 주로 여성이었는데, 저자는 젠더 관점에서 ‘밥을 짓고 함께 먹는 것의 의미’를 해석해 내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바느질 공방’을 ‘여성 연대’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저자의 말처럼 ‘밀양 할매’들은 ‘연대자’들과 ‘여성 연대’를 통해 함께 성장하였고, 세상으로 나가 한국 사회 탈송전탑 탈핵 운동의 핵심적인 활동가들이 되었다.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연대
“모르지. 내 살아생전에는 송전탑이 안 뽑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나는 괘않다(괜찮다). (……) 내사 살날이 얼마 안 되고,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뽑히면 그만이지. 느그가 할 거잖아. 나는 걱정 안 한다. 그라이 지는 싸움도 아니지.”
저자와 이 책의 구술자로 참여한 이들 모두는 탈송전탑 탈핵 운동의 이야기가 과거를 회상하는 추억담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밀양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 희망버스를 타 본 적이 없는 사람들, 밀양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 때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만한 나이의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읽어 주기를 바란다. 주민들이 내 살아생전에는 송전탑이 뽑히는 걸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내 뒤를 잇는 사람들이 있다면 언젠간 뽑힐 거라서 이것이 절대 지는 싸움일 수 없다고 말할 때 바로 그 기대에 찬 눈빛이 가리키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밀양을 듣다》와 《송전탑 뽑아줄티 소나무야 자라거라》 등의 전작을 통해 밀양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 온 저자는, 이 책에서 2014년부터 2019년까지의 구술 인터뷰를 바탕으로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이 탈송전탑 탈핵 운동으로 나아간 과정을 치밀하게 기록하고 의미화해 낸다. 이야기꾼으로서 밀양의 이야기를 매개하는 위치에 선 저자는 자신을 그 자리에 세운 것은 ‘말하고자 한 이들’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말할 장소’를 갖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흘러들어 가고 장소를 확장해 나가는 것을 ‘이야기를 통한 연대’라고 이름 붙인다.
도시로 가는 전기는 누군가의 위험과 폭력을 지우며 우리에게 오고 있고, 우리 모두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그들과 함께 이 땅의 주인이 될 것인가.’ 밀양 탈송전탑 탈핵 운동의 이야기를 듣는 청취의 연대는 이 질문과 함께 시작된다.
책 속에서
‘말할 장소’를 갖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는 세상에 드러날 길이 없다. 이야기가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의 삶은 사회적으로 상상되거나 가정되지 못한다. 처음부터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모든 사회적 담론의 바깥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가 없는 사람들은, 이야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멋대로 재단한 방식의 이름과 이미지를 얻는다.
‘밀양 할매’는 귀엽고 순수하며 순박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의 할머니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탈송전탑 탈핵 운동가이자 에너지 정의를 실천하는 활동가를 부르는 이름이다. 한국 사회에서 탈핵 운동의 역사를 기술하거나 에너지 정의와 기후 정의 실천의 역사적 과정을 구성할 때 가장 먼저 호출해야 할 이름 가운데 하나가 ‘밀양 할매’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밀양 할매’라는 이름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가 세상 사람들의 귀로 흘러들어 갔으면 한다. 사람들이 상상하고 가정하는 한두 가지 이야기의 이면에는 그 상상과 가정을 뚫고 누군가의 입을 통해 직접 드러나는 수많은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이런 ‘다른’ 이야기들이 ‘말하고자 하는 입’들의 장소를 확장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구술 청취가 만들어 내는 다양한 서사의 층위는 그 자체로 이야기를 통한 연대라고 할 수 있다.
― 〈들어가며〉, 11~12쪽
“데모하러 서울에 갔는데 마 삐까뻔쩍하이, 마 정신이 읎어. 마 대낮겉이 밝아갖고 훤-하이 그란데 마 퍼뜩 그런 생각이 들더라꼬. ‘아 여 이래 전기 갖다 쓸라꼬 우리 집 앞에다가 송전탑 시운(세운) 기구나’……. ‘느그 여 전기 갖다 쓰느라고 우리 집 앞에다가 말뚝 박아 놨구나’ 싶은 기 마 부아가 치미는 기라. ‘그라믄 전기 만드는 데든 송전탑이든 여 갖다 세우지 와 남의 땅에다 시와(세워) 놓고 이래 느그는 팡팡 에어컨 돌리고 야밤에 온 시상(세상)을 대낮겉이 밝혀 놓고 이라노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기라.”
― 〈도시로 가는 전기〉, 16쪽
밀양에서 주민 대상 설명회가 개최된 것은 2005년 무렵이었다. 주민들 대부분은 설명회가 개최된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고, 설명회 개최를 안내받은 이들은 지역 내 소수의 ‘남성’에 불과했다. 설명회는 마을마다 개최되지도 않았고, 주민들이 농사일로 바쁜 시기를 고려하지도 않았다. 설명회에 참여한 이들은 제대로 된 내용을 듣지 못했고, 마을 이장들을 포함하여 지역 내에서 송전탑 건설 관련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최소한 송전탑이 마을 내부 공간에 건설될 예정이거나 주민 거주지에 인접한 공간에 건설될 예정인 마을의 이장이나 마을 주민 가운데 한 명이라도 송전탑 건설에 관한 내용을 알고 있어야 했지만 이들이 관련 내용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러다가 2011년 밀양 여러 지역에서 공사가 본격화되면서 마을마다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소문’의 진위 여부를 설명해 주는 이도, ‘소문’이 아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주는 이도 없었다. 더구나 그 누구도, 한글 문서를 읽는 데 익숙하지 않고 평생 송전탑이라는 단어를 들은 적도 없는 고령의 ‘여성’ 주민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송전탑 건설 관련 내용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 〈말해 봤자 알아듣나〉, 34~35쪽
시골 마을에서 ‘나랏일’이 가지는 힘은 어마어마하다. 아무리 내 이익에 반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들 상당수는 70, 80대 이상의 고령 주민들이다. 특히 80대 이상의 주민들은 말 그대로 ‘나라’를 잃어 본 경험이 있다. 식민지 경험의 기억을 가진 이들은 ‘나라’를 잃는다는 것이 자기 삶의 기반을 어떻게 뒤흔드는 일이었는지, 생존의 토대를 어떻게 무너뜨리는 일이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 〈나랏일〉, 41~42쪽
이제 주민들은 ‘나랏일’이어서 반드시 따라야 하고 ‘나랏일’이어서 기필코 완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랏일’이라고 내세우는 일들을 더 깊이 의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나라에서 하는 일’이기에 오히려 ‘옳은 일’이 아닐 수 있으며, ‘나랏일’로 감싸진 일들의 속 알맹이에 부조리와 폭력이 감추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도 안다. 이것은 순진한 시골 사람들이 비로소 세상 물정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싸움의 과정에서 성장하며 확인하고 실천한 결과였다. ‘나라’의 폭력이, 그 폭력에 맞선 저항의 실천이 ‘나라’가 무엇이고 어떤 일들을 자행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해 준 셈이다.
― 〈나랏일〉, 71쪽
마을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돈이 원수’라고 말하는 배경에는, 한국전력의 무원칙적이고 비윤리적인 ‘보상’ 방식 탓에 마을공동체의 공적 시스템이나 민주적인 논의 절차가 파괴되고 문화적 관습과 전통이 훼손되었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수십 혹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마을의 전통과 역사, 공동체의 규범적 가치들이 한국전력이 쏟아부은 ‘돈’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일그러지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주민들을 가장 분노케 하는 지점은 한국전력이 ‘돈’을 앞세워 주민들을 우롱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주민들의 인간적인 자존감을 공격했다는 사실이다.
― 〈돈지랄〉, 103쪽
“사람을 마 돈으로만 보는 기라. 그라이 돈지랄이라 카지. ‘두당 얼마다’ 마 이런 소문이 확 퍼지이끼네 사람들이 마 눈이 벌게가(벌게져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합의서를 받으러 다니는 거지. 그래가 마 서로 막 아침저녁으로 숨도 못 쉬게 전화를 해쌓고 ‘언니 내한테 합의서 주라’ 마 이런 부탁을 막 하고, 또 ‘왜 내한테 안 해 주고 다른 사람한테 합의서 써 줐노’ 하면서 막 삐지고 난리가 났ᅌᅥ. [김영희: 합의서 한 장당 얼마를 받았는데요?] 몰라, 나는 자세히는. 근데 뭐 소문에는 한 명당 백만 원이라 카는 사람도 있고 몇십만 원이라 카는 사람도 있고 그카데.”
― 〈돈지랄〉, 105쪽
어느 마을에 들어가 질문을 해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한국전력의 대응 전략은 이처럼 치밀하면서도 일사불란하게 실행되었다. 한국전력이 이와 같은 종류의 사업을 추진해 온 역사만큼의 경험치가 쌓여 그들의 전략과 노하우 역시 촘촘하게 설계되고, 실행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전력 대응 매뉴얼의 개별 장면들은 아주 구체적이고 세밀한 디테일들로 채워졌다.
예를 들면 한국전력 직원들은 마을별로, 개인별로 합의금을 지급하면서 합의금 지급 내역을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 다른 마을은 얼마를 받았는지, 다른 사람은 얼마를 받았는지 서로가 모르게 하는 것이다. 합의금이 지급되는 방식 역시 한번에 보상금의 형태로 지급되기도 했지만, 그 밖에 여러 한전 자회사를 통해 다양한 항목으로 1백만 원이나 2백만 원씩의 돈이 지급되기도 했다. 돈을 지급한 측도, 돈을 받은 사람들도 보상금이나 합의금으로 한전에서 받은 돈의 총 액수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얼핏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허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한국전력의 대응 전략의 일환이기도 했다. 한국전력은 어느 경우에나 송전탑 건설에 대한 정확한 설명, 보상금 및 합의금 지급의 정확한 기준과 지침 등을 제대로 제시하지 않았고, 각종 협의체 등에 제공해야 할 자료 역시 지연시키거나 누락시키는 방식으로 제대로 제출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공백을 채운 것은 말 그대로 마을에 떠도는 ‘소문’이었다.
― 〈한국전력의 대응 매뉴얼〉, 128쪽
“참……. 동네가 뭔 분열이라면 우아한 소리고, 그냥 동네가 쪽사리 난 상황이지.”
“박살이 나고 쪼가리 난 상황이지.”
“저 저 저 사람하고 노인회장하고 사촌 간인데도 말 안 한다 아입니까, 송전탑 때문에. 아래 위 집에 사는데도 말 안 합니다.”
“돈이 꽉 있으니까 저게 박살이 나고, 없어야만 우리 동네가 좀 살아 볼 낀데 저게 저 송전탑이 살아 있어가 절대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송전탑이 동네 박살시켰다 안 합니까. 돈이 을매나(얼마나) 많길래 사람을 이래 가지고 노나…….”
― 〈부서진 마을〉, 138쪽
마을을 감도는 팽팽한 긴장감은 모든 일상생활의 공간을 일촉즉발 위기의 현장으로 만들어 갔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 축적된 분노와 갈등의 에너지가 쌓이고 쌓이다 어느 순간 폭발하면 시골 마을에서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을 길을 가다가 욕을 듣거나 모욕을 당하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회관에서 음식이 든 그릇을 던지거나 마을 어르신들에게 욕을 하는 수준을 벗어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어느 동네에서는 실제로 주민들 사이에 칼부림이 벌어져 현장에서 주민이 경찰에 끌려가는 일도 있었다.
― 〈일상의 폭력〉, 188~189쪽
무너진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 않을지 모른다. 또 여전히 한국 사회 어딘가에서는 밀양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 이미 송전탑 경과지인 청도의 주민은 ‘할매들이 회관에 가지도 못하고 가서도 왕따를 당하는 게 너무 슬프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깨진 그릇이 다시 붙냐’는 말로 마을공동체 해체의 절망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주민들의 말처럼 부서진 마을을 다시 이어 붙이긴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왜 주민들은 부서진 마을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려주는 것일까. 절망 어린 이야기를 계속하는 마음에는 어떤 바람이 스며들어 있는 것일까.
― 〈일상의 폭력〉, 227쪽
언젠가 주민 한 명이 송전탑에 올라가서 외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그게 뭐냐고 여쭤보니 생각할 틈도 없이 곧바로 ‘개-새끼들, 한전 놈의 개-새끼들, 한전 놈의 개-새끼들’이라고 목청껏 외쳤다. 그분의 외침 속에 존재하던 ‘한전 놈’들은 마을에 찾아와 웃는 낯으로 합의서를 내밀던 직원부터 마을에 분열을 조장한 한국전력이라는 조직까지 포함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마음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한전 놈의 개-새끼들’은 송전탑 건설 예정지에서 마주쳤던 그들일 것이다. 한국전력이 고용한 용역 인부들은 모욕에 그치지 않고 때로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 〈포크레인 아래〉, 243쪽
2014년 6월 11일 주민과 연대자들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경찰들을 기다리며 긴장 속에 밤을 지새웠다. 새벽 3시 40분경 경찰버스 6대가 부북면 위양마을의 도방동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면서 행정대집행이 시작되었다. 새벽 6시 10분경 부북면 평밭마을 129번 송전탑 건설 예정지 농성 천막을 시작으로 마지막 단장면 용회마을 101번 송전탑 건설 예정지 농성 천막까지 차례로 2천~3천 명의 경찰과 공무원들에 의해 철거되기 시작했다. 101번 농성 천막이 철거되었을 때는 거의 해 질 무렵이 다 된 시간이었다. 농성 주민과 연대자들은 서로의 몸을 쇠사슬로 엮어 묶었고, 구덩이를 파고 몸을 뉘였으며, 옷을 벗고 끌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 〈포크레인 아래〉, 256쪽
한국 사회에서 맨 처음 탈핵의 문제를 전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린 것은 ‘밀양 할매’였다. 사실상 공론화위원회가 가능했던 것, 혹은 공론화위원회를 설치하게 된 계기도 ‘밀양 할매’에게 있었다. 그리고 탈핵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의 흐름을 만들어 내기까지 ‘밀양 할매’는 수많은 폭력과 고통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공론화위원회에 ‘밀양 할매’의 자리는 없었다. 그들은 전문가로 불릴 수도, 당사자로 불릴 수도 없었다. 전문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간주된 ‘밀양 할매’는 처음부터 공론장 바깥으로 밀려나 있었다. ‘밀양 할매’에 연대해 처음 탈핵의 문제를 자기 삶의 의제로 받아들인 이들도 이 공론화위원회가 인정하는 ‘시민’으로 호명받지 못했다.
― 〈국가폭력〉, 279쪽
한국전력이 본격적으로 송전탑 건설을 시작할 무렵 이를 반대하는 주민들은 송전탑 건설 예정지에 천막을 짓고 농성에 들어갔다. 2014년 6월 11일 행정대집행으로 인해 철거될 때까지 이 천막 농성장은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에 참여한 주민들과 연대자들에게 또 다른 ‘집’이었다. 농성에 참여했던 주민과 연대자들 가운데 몇몇은 이 집을 ‘즐거운 나의 집’이라고 불렀는데 천막 농성장이 이런 별칭을 얻게 된 것은 어느 늦은 밤 찬 바닥에 누워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기며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네”로 시작하는 같은 제목의 노래를 부른 일에서 비롯되었다. 행정대집행의 기억은 쓰라렸지만 천막에서의 일들이 슬프고 우울했다고 말하는 이들은 없었다. 하루라도 천막 농성장을 찾았던 이들은 천막에 누워 도란도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던 이때의 일들을 모두 즐겁고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 〈즐거운 나의 집〉, 302쪽
천막 농성장을 더 ‘집’처럼 꾸미려 노력했던 열정 안에는 밤만 되면 서늘해지고 변변한 뒷간도 없는 곳에서 밤새 고생하시는 어르신들이 조금이라도 덜 고생했으면 하고 바라는 연대자들의 마음이 있었다. 주민들도 그 마음을 모를 수 없었다. 한밤중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험한 산길을 몇 시간씩 헤치고 올라와 자신들의 곁을 지켜 주는 사람들, 하루 종일 굶은 뱃속에 달콤한 바나나 한 쪽을 채워 주던 이들이 바로 ‘연대자’들이었다. 주민들은 ‘우리가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이만큼 지탱해 온 것은 모두 연대자들 덕분’이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연대자들의 마음에 어긋난 채로 다른 길을 모색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번 발길이 닿았던 연대자들은 잊지 않고 주민들을 찾아왔고 이 발길은 행정대집행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함께 모여 바느질을 하기도 하고 같이 뜸을 뜨기도 하면서, 농사일이 바쁠 때는 농사일을 거들고,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모시고 주기적으로 병원을 가거나 목욕탕에 가는 것 또한 연대자들이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는 일이다.
― 〈즐거운 나의 집〉, 308쪽
밥의 연대가 있다. 함께 밥을 만들고, 둘러앉아 함께 밥을 나눠 먹고, 밥해 준 사람들의 마음을 먹고, 밥을 나눠 먹은 사람들의 마음에 기대 가는 ‘연대’가 있다. 밥을 먹으면 떠날 수 없는 현장, 밥을 먹고선 외면할 수 없는 현장이 있다고, ‘연대의 밥’을 먹어 본 사람들은 말한다.
단식을 하지 않는 모든 싸움의 현장에서 사람들은 밥을 먹는다. 어쩌다 거리로 나서는 날엔 김밥 같은 걸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지만 싸움이 길어지면 어디서나 솥단지를 건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 수백 명이 몇 날 며칠 싸움을 이어 갈 때 제일 중요한 건 밥이다. 밥을 먹지 않으면 싸움에 나설 수가 없고, 싸움을 끈질기게 이어 갈 수가 없다.
― 〈밥의 무게〉, 321쪽
많은 사람이 떠나기도 했고, 또 그들이 떠난 자리에 아쉽고 슬픈 감정들이 스며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한 것은 즐겁게 나눠 먹은 밥의 기억이다. 그 춥고 시린 밤공기 속에서도 서로 수다를 떨고 웃음을 나누며 부족한 음식을 배불리 나눠 먹었고, 그 충만한 배로 든든하게 현장을 지킬 수 있었다. 밀양 탈송전탑 탈핵 운동의 현장에는 늘 맛있는 먹거리들이 있고, 그 먹거리들은 언제나 따뜻하고 풍족하다. 대책위 활동가들과 연대자들은 행사를 준비할 때마다 가장 먼저 먹거리를 고민하고 준비한다. 따뜻한 밥을 나눠 먹고 함께했던 사람들이 자기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서도 ‘부른 배’가 주는 따스함과 어딘지 모르게 ‘채워진 느낌’을 안고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연대자들을 향한 응원이자 다음 싸움을 약속하는 마음이다.
― 〈밥의 무게〉, 336~337쪽
‘밀양 할매’들은 ‘연대자’들과 ‘여성 연대’를 통해 함께 성장하였다. 노동과 돌봄의 ‘집’에서 벗어나 세상을 만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으며 개인적 삶의 장면들만이 아닌 사회적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연대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밀양 할매’는 연대자들을 통해, 연대자들은 ‘밀양 할매’를 통해 세상을 배워 나갔다. ‘밀양 할매’라는 표상은 이제 밀양에 거주하는 할머니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특정 시기 한국 사회에서 탈송전탑 탈핵 운동을 이끈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으며 이 주체의 장소 안에는 ‘여성’ 연대자들의 몫이 포함되어 있다. ‘밀양 할매’는 밀양 지역 주민과 연대자가 함께 만들어 낸 ‘여성 연대’의 상징적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 〈바느질과 여성 연대〉, 350쪽
‘밀양 할매’는 세상으로 나가 성장하면서 한국 사회 탈송전탑 탈핵 운동의 핵심적인 활동가들이 되었다. 그들은 훌륭한 대중 연설가였고, 대중과 호흡하는 정치적 감각 또한 뛰어났다. 수백, 수천 명의 대중이 있는 곳에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설을 하고,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가장 필요한 지원을 하며 든든한 연대자의 자리를 지켰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 되어 관객과의 만남을 이어 갈 때도 머뭇거리거나 움츠러들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드러냈다. 연대자들 또한 마찬가지여서 밀양 싸움의 중요한 장면마다 이들이 제안하고 실천한 운동의 계기들이 있었다.
― 〈바느질과 여성 연대〉, 352~353쪽
우리가 살면서 분투하고 노력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인류 역사의 오랜 과거로부터 지속해 온 싸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 중요하고 존귀한 가치일수록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치열하고 그 싸움의 목표는 금방 실현되지 않는다. 평화와 공존, 존중과 평등 등의 가치는 여전히 실현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평화는 이미 수백 년, 수천 년간 분투해 온 목표이며 평등 역시 최소한 인류가 수백 년의 시간 동안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온 가치다.
싸움은 이루고 성취하여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이 그러하기 때문에, 내가 함께할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는 방향이 그러하기 때문에 걸어갈 수밖에 없는 길인 것이다.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은 일이라 하더라도 그 싸움의 목표가 옳다면 그것이 미래다. 그런 의미에서 탈송전탑과 탈핵은 언젠가 올 수밖에 없는 미래다. ‘밀양 할매’만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뽑히지 않을지라도, 언젠가 송전탑은 뽑히고 말 것이다.
― 〈나는 탈송전탑 탈핵 운동가다〉, 381~382쪽
‘밀양 할매’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할머니도 아니고 안타까운 폭력의 희생양도 아니다. 그보다 더 높고 고귀한 곳에 ‘밀양 할매’의 이름이 있다. ‘밀양 할매’는 한국 에너지 정의와 탈핵 운동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만들었고, 그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기후 위기 시대 기후 정의를 향한 실천은 에너지 정의를 실현하고 기후 부정의를 극복하는 데서 시작된다. 인류 역사가 나아가는 길에서 지금 현재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가 기후 정의의 실현이라면 여기 그것을 가장 먼저 앞장서서 주장하고 실천한 이들이 있다. ‘밀양 할매’는 탈송전탑 탈핵 운동가이고, 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다음 세대 인류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위해 기후 정의 실천의 첫발을 내딛었다.
― 〈나는 탈송전탑 탈핵 운동가다〉, 382~383쪽
목차
들어가며
도시로 가는 전기
말해 봤자 알아듣나
나랏일
돈지랄
한국전력의 대응 매뉴얼
부서진 마을
일상의 폭력
포크레인 아래
국가폭력
즐거운 나의 집
밥의 무게
바느질과 여성 연대
나는 탈송전탑 탈핵 운동가다
저자 소개
김영희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공동체와 젠더 관점에서 구술 서사와 연행을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다. 누군가의 말을 들으려는 노력이 ‘말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든다고 믿으며, 이와 같은 청취의 연대를 통해 더 많은 ‘말’과 ‘이야기’가 세상에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술 인터뷰와 현지 조사를 통해 여러 겹의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내는 ‘서사 운동’에 참여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담론장을 넓고 깊고 두텁게 만드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993년부터 밀양에서 구술 청취를 시작했으며, 2014년 가을부터 밀양 탈송전탑 탈핵 운동의 이야기를 들었다. 《구전이야기 연행과 공동체》, 《한국 구전서사의 부친살해》, 《밀양을 듣다》, 《송전탑 뽑아줄티 소나무야 자라거라》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