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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33 - 강족의 후예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西夏) 몽골과 여섯차례 전쟁을 하다!
요즘 아이들 이름 가운데 흔한게 “서하” 인데...... 1038년에 “서하(西夏)” 라는 나라가
있었으니 당시 하(夏)나라 로 불렸지만 우리나라 고조선 처럼, 3천여년전인 기원전
2070년에 우(禹) 임금이 세운 하(夏)나라 와 구분하기 위해 서하(西夏) 라고 부릅니다.
기원전 771년 서주(西周)의 수도 호경(장안)을 점령해 주(周)나라를 동쪽 낙양으로 몰아낸 견융(犬戎)
과 그후 5호 16국 시대에 후진(後秦) 을 세운 강족(羌族) 은 모두 티베트어족으로 보는데....
강족의 일파 중에 한 부족이 토번을 건국했으며, 몇백년 후에 다른 일파가 서하(西夏) 를 건국합니다
1. 강족(羌族)
서남이에 속한 강족(羌族)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저 견융(犬戎) 처럼 티베트어족에 속하며
현대에는 캄 지역(쓰촨성 아바티베트족, 창족)에 분산되어 분포하고 있는데 산시성
(섬서성)서부와 간쑤성 동남부 일대에에서 생활했고 갑골문에 따르면 이때 강방
(羌方) 이라고 불렸으며... 두 개의 큰 부락이 있어 북강(北羌)과 마강(馬羌)이라 불렀습니다.
강족(羌族)은 상나라 말에 주나라가 상(商)나라를 공격할 때 도왔지만 오래치 않아 다시
사이가 벌어졌고 춘추시대 때 진(秦)나라가 발전하면서 밀려서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월수강(越雋羌), 광한강(廣漢羌), 무도강(武都羌) 등으로 발전하다가..... 진(秦) 효공
때 진나라에게 굴복했으며 한나라 초에 흉노에 귀부해 한나라의 서쪽 지역을 침범합니다.
전한 말기에 중국이 혼란하자 금성, 농서로 몰려들었고 후한 초기 내흡, 마원의 공격을 받아 한(漢)나라
에 귀부와 저항을 반복하면서 한양, 안정, 농서를 정복하며 살았으니 강족은 거주 지역에 따라 서강
과 동강으로 나뉘어지게 되었으며 삼국시대와 서진(西晉) 시기에도 중국을 정복해 관중 지역에 거주
했고, 오호십육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강족(羌族)이 중국 중원 지역을 정복하여 후진(後秦)을 건국합니다.
강족은 토번의 압박을 받아 감숙, 영하, 섬서 북쪽 일대로 옮겼다가 후에 하주로 옮겨갔으며, 북송때
강족이 한족들을 정복하면서 한족들을 피지배민족으로 둔 서하국이 건국되었고, 서하국은 몽골
보다도 더했으니 한족들을 노예로 만들어 농락한 국가로 서하를 세운 강족 일파가 탕구트족 입니다.
강(羌)족은 서융(西戎) 가운데 양을 목축하는 사람들로 사람 인(人)과 양 양(羊)의 뜻을 따른다고
했고, 강(羌)이란 글자는 양(羊)의 뜻에 따르고 그 곳 사람들을 이 때문에 강족이라 불렀다고
하며, 군신이나 상하의 구분이 없고 힘센 자가 수령이 되었기에 하나가 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강(羌)족 종족은 거주지에 따라 나누고 강자는 약자를 멸시했으며 또한 유목민들이 그렇듯 일정한
거주지 없이 돌아다니면서 약탈을 했는데, 남자는 전쟁터에서 죽는 것을 일본의 사무라이들
처럼 매우 길(吉) 하게 생각했으며, 안방에서 병사(病死) 하는 것을 흉(凶) 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2. 탕구트족
탕구트족은 당항(黨項) 또는 당올(唐兀)이라 지칭하니 티베트계 강족(羌族)의 한 갈래로, 7세기 무렵
부터 13세기경 까지 간쑤성과 칭하이성에 웅거했던 민족으로. 탕구트라는 말은 중세 몽골어의
ᠲᠠᠩᠭᠤᠳ(Tangγud) 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탕구트인 스스로는 “미으냐(mjɨ-njaa)” 라고 했습니다.
탕구트 내부에 속한 티베트계 제족들과 티베트인들이 미냑(弭藥, Minyag), 동 미냑 (Dong
Minyag)" 이라고 불렀고, '탕구트' 라는 단어는 튀르크계(혹은 몽골화된 튀르크계)
주민들의 언어라는 이야기도 있으니 이들은 서하 건국의 전신이자, 현재 중국 창족
(羌族 티베트인) 과 같은 조상을 두었으며 서하 건국 이후에는 서하인 이라고 불렸습니다.
"당항강이란 삼묘의 후예이다. 그 종으로는 탕창과 백랑이 있는데 모두 원숭이의 종족이라고 자칭
한다."' - 《수서》 <당항전> 당항의 활동은 《수서》에서 처음 나타나니 위 사료에서는 당항족
이 '삼묘(요,순,우 시대의 이민족)' 의 후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항은 토번, 즉 티베트
의 동부 암도와 캄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585년에 탁발녕이 부락을 이끌고 수나라에 내부합니다.
지금의 산시성(섬서성)과 간쑤성, 닝샤에 이주한 이들은 주로 목축과 수렵에 종사하였는데
강족의 지파였지만 당항족이 거주하던 지역이 티베트와 칭하이성, 그리고 내몽골지역
및 몽골 서부와도 접해있다 보니 티베트 또는 티베트인을 포함한 티베트계 민족들
(창족 등)과 일부 몽골화된 튀르크계 민족들과도 혼혈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탕구트족은 강족의 한 갈래였던 만큼 문화도 강족과 비슷했는데, 탕구트족들은 칭하이호
유역에서 살다가 토번의 강압적인 정책으로 시달리자 당나라의 도움으로 지금의
내몽골 서부(오르도스)와 칭하이호 이북, 이동 지역 및 간쑤, 산시(섬서), 닝샤 일대로
이주하여 살게 되다보니.... 지역과 환경도 다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차이점도 나타납니다
일본의 야마구치 즈이호 교수는 당항이 원래 튀르크계 집단이었고, 칭하이성, 쓰촨성의
산악 일대에 살았지만 칭하이와 쓰촨 일대에 살던 티베트의 주요 부족 중 일부인
동(Dong) 부족 과 같이 살게되면서 당항에 많은 티베트인들이 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다만 그렇다고 당항족 집단 자체가 티베트계로 보긴 어렵다고 하는데, 물론 티베트인들이 당항에
많이 들어오다보니... 언어적으로서는 티베트화 되어 당항어는 티베트어와 비슷해졌으니
전성시절에는 내몽골 서쪽과 몽골 서남쪽 일부, 신장 중가리아 지역 일부도 점령한 적이 있습니다.
중원에서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자 당태종은 당항을 회유하여 이씨 성을 하사했으니
암도와 캄 지방에 있었던 당항은 토번 제국이 토욕혼을 격파하면서 자연스럽게 흡수되었고 일부
당항은 8세기에 정주로 이주해 동산부를 이루었고, 염주와 영주로 이주한 당항은 남산부였는데
탁발씨 당항도 동산부와 함께 정주에 거처하다 8세기 중엽 하주로 내려가 평하부를 이루었습니다.
당나라 말기에 황소의 난이 일어나 당의 변경 통제력이 약화되자 평하부의 수령인 탁발사공이 군사를
일으켜 유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자사라 칭했으니 중원에서 황소의 세력이 계속 커지자 탁발사공은
당군과 함께 황소 세력을 꺾는데 일조했고 이에 당희종은 탁발사공에게 정난군절도사를 제수했습니다.
또한, 당제국으로 부터 하주·수주·은주·유주·정주 다섯 주의 지배권을 하사받았으며 동시에 하국공으로
봉하고 이씨 성을 하사했으니 이로부터 평하부는 당의 직접지배에서 벗어났고, 오대십국시대에는
완전히 독립한 부락으로 성립되었는데 이들은 한족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봉건사회로 진입합니다.
발해를 멸망시킬 때 거란을 도왔던 세력 중 하나로《요사》에 토번(티베트), 실위(몽골족의 선조),
사타(튀르크계) 와 함께 당항족이 기록되어 있는데... 당항은 요나라에 복속되어 있었고,
거주지인 간쑤와 산시(섬서), 닝샤, 내몽골 서부 지역은 요나라와 가까이 접한데다가 요나라는
다민족들을 지배하기도 해서 요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당항족들이 지원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북송 시대에 이르러 이계봉이 정주 이외의 영토를 송나라에 복속시키길 청하고는, 수도 개봉
으로 이주했지만 이계봉의 족제 이계천이 이를 반대하고, 단독으로 요나라로 가서
하국왕으로 책봉받았으며 그후 이계천의 아들 이덕명이 뒤를 잇고 송나라와 화해하였습니다.
이후 1038년, 이원호가 흥경부에 도읍을 정하고 대하를 건국했는데 탕구트족은 서하
치하에서 꽤 번영했지만 몽골제국에 의해 서하가 멸망하였고 이후 탕쿠트족은
상당수가 몽골족에 동화되었으며 동화되지 않은 탕구트족들도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한 채 명나라에 복속해, 시간이 흘러 대다수가 한족에게 동화되면서 사라졌습니다.
한편 쓰촨성 간쯔짱족 자치구에는 목아인(木雅人) 이라는 서하인의 후예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소수민족들이 사는데 이들의 언어는 옛 서하어와 매우 유사하다고 하며
또한 이들은 변발을 했으니 그 문화는 서하 때도 유지되었고 유목과 수렵채집을
했으며, 농업를 하는 부족들도 있었으며 티베트의 영향으로 야크도 길렀다고 합니다.
760년대 신라의 승려였던 김화상은 당나라에 갔을 무렵 중국 북서부에서 당항족 출신의
보당무주(保唐无住)를 만났으며 보당무주는 김화상으로 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며 그래서 김화성은 당항족들이 있었던 곳에서도 알려진 인물이었다고 전해집니다.
3. 서하 (西夏)
서하는 북송 시대에 송나라 서북쪽에 있었던 티베트 계열의 탕구트족 이원호가 1038년에
세운 왕조로 탕구트 족은 자신의 나라를 크고 높은 나라라는 뜻으로 대백고국(大白高國)
이나 대하(大夏) 라고 했는데 탕구트어에서는 미으냐(mjɨ-njaa), 티베트어로는 미냑
(彌藥)이었으며 북송에서는 우 임금의 하(夏)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서하(西夏)라 했습니다.
저들은 중국 지역을 정복하여 1038년에 지배층은 탕구트족이고 피지배층이 한족(漢族)
인 서하국(大夏)을 건국하는데... 그후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현재의 칭하이성, 간쑤성, 산시성 북부 일대를 직접 다스렸으며 200년 동안
중계무역으로 번영을 누렸으니 1227년 몽골 제국의 칭기즈 칸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탕구트인은 “삼국지연의” 에 자주 나오는 강족(羌族) 에서 갈라져 나온 집단으로 강족은
오호십육국 시대 때 일시적이나마 중원 일부를 지배했으며 이후 강족은 크게 발강
(發羌)과 당항강(党項羌)으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서남쪽에 토번(티베트)을 세웠고,
후자인 탕구트족은 간쑤(감숙)성, 산시(섬서) 성 일대로 이주하여 서하를 건국 합니다.
탕구트인이 북위를 세운 탁발 선비족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으니 송나라 역사를 기록한 “송사” 에
의하면, 서하 황실의 선조는 탁발적사(拓拔赤辭) 였는데, 그의 성씨인 '탁발' 이 서기 4세기에
만주북부에서 중원으로 남하하여 북위를 세운 "탁발 선비족의 부족 명" 에서 유래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에 반박하는 의견도 있는데 성씨를 탁발씨로 한 건 그의 자칭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티베트계, 그러니까 정확히는 강족계에 해당하는 민족이라는 이야기
도 있는데..... 이쪽이 더 유력하며 실제로 서하어 역시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합니다.
선비족의 영역이 칭하이성 및 신장 지역 일대를 점령하면서 티베트와 접했고, 강족과도 여러
접촉이 있었으니 탕구트족 역시 선비족들과의 혼혈도 있었거나 서로 접촉 및 동화되어
일부 탕구트족들이 선비화되거나 반대로 일부 선비족이 탕구트화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탁발씨를 자칭한 건 선비족의 영향(문화적 등) 을 받아서 그렇다고 봐야 하니.... 수나라,
당나라의 황실이 선비족에서 나왔다해도 양 국가가 해외에서는 타부가치라고 불리며 선비족
국가로 보였지만 한족은 수나라나 당나라를 선비족 국가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과 유사합니다.
1032년에 조덕명(이덕명)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조원호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29세였으니 그는 1038년에 조씨 성을 버리고 이씨로 성을 바꾼 후 서하
(西夏, 大夏)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 수도는 영하(寧夏) 흥경부(현재의 인촨) 였습니다.
1041년에 동등한 황제국 관계가 된 것에 반발한 북송에 의해 호수천 전투가 벌어졌는데, 북송
이 13,000명의 사상자를 내며 무참하게 패배했고, 정천(定川) 전투에서 갈부민이 이끄는
서하군에게 9,000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으니 이후 3년간의 전쟁 끝에 화의가 맺어집니다.
이 당시 북송은 거란족 요(僚) 나라와도 전쟁 중이어서 북쪽과 서쪽에서 양면 전쟁을
치루어야 했는데..... 서하와 북송이 화의에 나선 까닭은 전쟁을 마친 요나라가
서하와 북송 중에서 어느 한 편이 될 가능성을 양국 모두 우려했기 때문 이었습니다.
결국 서하가 화의를 제안하고 북송이 동의하여 1044년 북송이 서하에게 매년 공물을 보내는 대신
서하는 북송의 신하 나라(경력의 화의)가 되었으며, 서하의 황제는 하국왕(夏國王)에 봉해
졌고, 북송은 매년 비단 130,000필, 은 50,000냥, 차 20,000근을 보내이 평화가 유지 되었습니다.
경종 이원호는 토번을 크게 물리치며 영토를 확장했고 서하 문자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후 서하는 혼란
을 겪게되니.... 경종은 말년에 태자의 아내, 즉 자신의 며느리를 취하는 바람에 1048년에 원한을
사서 태자에게 암살당하고 그 태자도 처형된 탓에 막내 아들인 이양조가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습니다.
의종이 너무 어렸던 탓에 섭정을 받았으니 모친인 몰장 태후가 친인척들을 등용해 정사를 어지럽히는
등 국정을 농단했다는 것이니 1056년, 외간 남자와 사통하다가 또 다른 사통하던 사람에게 원한을
사서 죽음을 당했지만 그녀의 오빠인 몰장와방이 혼란을 수습하여 몰장씨 일가의 전횡은 이어집니다.
하지만 몰장와방도 1061년에 의종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여 끝내 살해당했으며 그후 의종은 외척의 영향
에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1068년에 개혁정책을 펼치던 의종이 전쟁 도중 날아온 화살에 맞아 급사합니다.
결국 또다시 어린 황제인 이병상이 즉위하고 이번에는 태후 양씨가 섭정하고 또다시 외척 시기가 열리며,
이 와중에 혜종은 폐위되었다가 다시 즉위하기도 했는데 게다가 혜종 역시도 의종 못지않게 단명합니다.
이 시기에는 서하가 북송의 국경을 침공하니 북송이 접경 무역을 중단하거나, 충악이 외명산
부락을 투항시킨데 이어 북송 조정의 승인도 없이 수주성을 점령하자 서하가 보안군을
습격해 송나라 보안군이 많은 피해를 입는 등 서하와 북송 간에는 산발적인 충돌이 잦았습니다.
1073년 왕소가 하황 일대를 수복한 뒤, 1081년 국왕 이병상이 양태후에 의해 억류되자 이를
이용해 북송이 5개의 진로로 서하를 공격했으나 명령체계가 통일되지 않았고 난주를 수복
했던 이헌의 군대가 영주에는 오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군량 보급 문제로 인해 실패합니다.
이후에는 북송이 1082년 서희, 심괄로 하여금 영락성을 신축하여 이를 바탕으로 서하를 공격
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서하의 역공을 받아 영락성이 함락되고 서희도 난전 중에 전사했고
송나라 신종은 신료들 앞에서 통곡하였으나 서하(西夏)도 경제적인 피해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렇게 외척의 전횡은 계속되었고 이 와중에 이번에는 이건순이 즉위하지만 그
역시도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태황태후 양씨가 섭정했으니..... 이 시기,
서하는 국력이 약해져서 북송과의 전쟁에서도 피해를 입는 등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1099년에 친정을 시작한 숭종이 양씨 일가를 숙청하면서 나라를 안정시켰으며 이후
숭종은 관료제를 정비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며 비단길을 장악하고 요나라~
금나라 교체기를 안정적으로 지나가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1139년에 사망합니다.
송나라 신종 시절 서하와의 전쟁에 패해 하황을 토번에 넘겨주고 서하가 북송의 국경을
침범하는 등 서하와 북송 간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고 이후 북송 휘종 시기 왕후의
지휘 하에 하황을 수복한 뒤 황두회흘 까지 점령하면서 농우도호부를 세우게 됩니다.
이후 송나라는 환관 동관이 서하와의 전쟁에 관여하게 되는데 여기서 비록 동관이 패한 걸 승전으로
허위 보고랬던 것도 있지만, 서하 북송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송나라 카이펑(개본, 변경)이
함락되고 황제가 금나라에 잡혀간 정강의 변 시기 서하는 북송이 점령했던 영토 일부를 점령합니다.
이후 즉위한 인종 이인효도 선정을 펼쳤으니 특히 인종은 인재를 등용하는데 민족을 가리지 않았고
과거제를 전격적으로 시행하였으며 동시에 율령 정비에 힘썼고 문묘를 정비하고 불교를
후원하는 한편 실록 편찬에도 힘을 기울이는 등 숭종 보다는 내치에서 더 많은 업적을 거두었습니다.
고려가 동쪽에서 요와 북송 사이에 3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서하는 서쪽에서 요, 북송과 함께
3강 체제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다만, 북송과 더 친한 고려와 달리 서하는 요나라와 더
우호적인 사이였으니 서하 황후 중에는 숭종의 황후 처럼 요나라의 야율씨 황족도 여럿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서하는 북송 말기까지 칭신을 하면서도 북송과 언제 깨질지 모르는 긴장 어린 관계를
유지했는데, 한족의 북송과 거란족의 요가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한 후에는 금과도 관
계를 유지했으며 1194년 환종이 금나라에 의해서 하국왕(夏國王)에 책봉된 것이 그 사례입니다.
이렇게 서하는 요나라에서 금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에는 어찌저찌 줄을 잘 갈아타서
멸망을 피해갈 수 있었지만 인종 시기부터 강해진 몽골은 서하가 제대로 대처
하기도 전에 성장한 데다가 인종도 이를 어찌하지도 못한 채 1193년에 사망합니다.
4. 몽골과 여섯차례 전쟁 끝에 멸망
인종의 뒤를 이은 환종 이순우는 북쪽 초원에서 몽골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도 조치를 취하지 않아 몽골
의 침공때 무참하게 당했고 이후 서하는 멸망 때까지 황제가 시도때도 없이 바뀌는 혼란기에 접어드니
인종 사후 서하는 겨우 30년 밖에 유지되지 못했는데.... 그 기간 동안 무려 다섯명의 황제가 있었습니다.
숭종과 인종 시기가 엄청 길어서 합쳐 100년은 넘고 이원호 사후의 혼란스럽던 의종과 혜종 시기도
합쳐 30년을 넘는다는 걸 감안하면 이 시기 혼란이 어느정도인지 짐작하게 해 주며 게다가
황제가 바뀔 때마다 몽골에 대한 외교방침이 바뀌는 바람에 지속적으로 침공을 겪는 원인이 됩니다.
몽골 통일을 마치고 제도를 정비하며 힘을 키운 칭기즈 칸은 가장 먼저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
(西夏)를 침략하면서 대외 정복에 나섰으니...... 서역과의 교역로를 마련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서하국에는 칭기즈 칸과 싸워서 패한 나이만족 잔당들이 머물렀기 때문으로 봅니다.
3차(1205년 1차, 1207년 2차, 1209년 3차)에 걸친 전쟁 동안 서하군은 우수한 기동력을 바탕
으로 산개 전술을 펼치는 몽골군에게 참패를 면치 못했으니 1205년 1차는 몽골 제국이
세워지기 전 자무카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약탈전으로 이때 몽골군은 서하의
'흑장군' 이라 불리는 장수가 지키는 카라호토 라는 성을 공격하다가 엄청 식겁하기도 합니다.
서하는 중개 무역으로 국가의 부를 쌓은 나라였는데, 전쟁 상황에서는 성에 들어가 농성
을 해야되기 때문에 제대로 된 무역이 어려웠으며 계속된 몽골 침략은 국가 경제를
붕괴시켰고 설상가상으로 당시 지진이 잦았으니, 당시 동아시아의 주요 강대국들이
몽골군과의 회전에서 맥을 못추는 이유를...... 군대의 편제 차이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동아시아 강국들의 군대의 주축이 되는 병종은 중갑을 입은 중기병이었는데 이러한 중기병은
보병을 상대로 싸울때는 매우 유리하지만 기병끼리의 전투에서는 매우 불리하니,
당시 몽골군은 경기병 위주로 편제되어 있었고, 이는 적과의 대규모 회전에서
기동력이 우수한 몽골군을 최강으로 만들어주어 어떤 적도 몽골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반론으로는 중기병은 기병간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나타난 병종으로 칭키즈 칸의 군대
에서도 중기병을 많이 사용했고, 에초에 제대로 된 중기병을 처음 운용한 게 유목민족으로 다만
맞붙은 전투에서 기병을 제압하는 데는 최고인 중기병이지만 경비병이 그 기동력으로 우리 영토내를
돌아다니며 약탈해 국가경제를 마비시키는 전략에는 쫓아가면 빠르게 달아나니 대응하기 어려웠습니다.
몽골 군대는 쳐들어올 때마다 서하인들의 목숨을 빼앗았고, 약탈까지 일삼으면서 죽음의 사자
와도 같은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는데..... 몽골군은 수도 영하(인촨)를 포위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공성전 경험이 부족해 난항을 겪었으니 둑을 쌓아 황하 물줄기를 돌려 영하를
물에 잠기게 하려는 작전도 펼쳤지만 물줄기를 다루는 법에 무지해 되려 수해를 겪기도 합니다.
수도가 포위당한 상황에서 급한 쪽은 서하였고, 7대 황제 양종은 금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결국 오랜 대치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1209년, 칭기즈 칸에게 막대한 공물과 황녀를 바치고 항복을 청하
고는 항복 준비를 하는 그 사이에 말에서 낙마한 징기스칸이 사망했으니, 그의 유언은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서하인을 한 명도 남기지 말라' 라는 것이었으니 그리고 얼마 뒤 그렇게 서하는 멸망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대칸에 오른 막내아들 툴루이는 서하인을 모두 죽이지는 않았으니 서하인이 많이 학살당한 것
은 사실이지만 적지않은 서하인들이 몽골 제국에 흡수되었는데 서하의 요새중 하나가 카라호토인데....
몽골어 이름이며, 탕구트어로는 '검은 강' zjɨ̱r²-nja 이고, 한자로 흑성(黑城), 흑수성(黑水城) 으로 불립니다.
이 요새는 몽골이 교역상의 이유로 보존한 덕분에 서하인들은 카라호토에서 명맥을 이어나갔으며
서하국 출신 장수 차간(察罕, ?~1255) 은 몽골군을 이끌고는 남송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서하인의 후손 중 일부는 안후이성 근처에 살다가 원나라가 멸망한 뒤에 한족에 흡수되어 소멸했으며
명나라 중기인 16세기 초까지 서하 문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카라호토에서 명맥을 이어나가던
서하인들은 1372년 명 태조 주원장 지시로 카라호토를 침공한 풍승(馮勝)의 명나라군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카라호토는 소빙기에 접어들면서 오아시스가 소멸하기 시작해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는 데
쳐들어온 명나라군 풍승은 둑을 쌓아서 카라호토로 들어가는 수로를 차단해버렸으니 결국
카라호토는 명군의 공격으로 함락되고 서하인들은 사라졌으며 사라진 서하의 탕구트인들과
가장 가까운 민족으로는 중국 쓰촨 성, 간쑤 성, 칭하이 성 등지에 사는 강족(羌族)이 있습니다.
서하인 자신이 남긴 서하의 역사서는 현존하지 않으며, 20세기 초에 둔황에서 아우렐 스타인(Aurel Stein)
과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서하의 탕구트 문자로 기록된 문헌들을 발견했고 러시아의 표트르
코즐로프가 카라호토를 발굴하면서 탕구트 문헌들을 발견했지만 이들 문헌은 대부분 불교 서적이었습니다.
현존하는 역사서가 전혀 없어 '처음부터 역사서 편찬 같은 것을 안한 건가' 라는 의혹이 일기도 하지만
중원의 왕조를 모방하여 황제국의 제도를 갖춘 나라가 역사를 기록하지 않을리는 없으니 인종 시기
에 한림학사원(翰林學士院)을 설치하고 실록을 편찬하게 했으며 1225년에는 나세창(羅世昌)이라는
신하가 관직을 그만둔 후 “하국세차(夏國世次)”라는 역사서를 저술한 바 있지만 모두 현존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칭기즈 칸의 유언에 의해 자행된 서하인 대학살 기록이나, 옛 서하의 강역 내에
남아 있는 황폐화된 유적들을 보아 종합해보면, 전쟁과 방화 등의 난리로 인해 사서들이 모두 유실
됐을 가능성이 있으며 현존 사서가 없기 때문에 서하의 역사에 대해서 서하인들이 남긴 서하문자로
기록된 편지, 비문, 문집 등을 활용하거나 송나라에서 남긴 기록, 몽골인들이 남긴 기록 등을 참고합니다.
그러므로 서하의 역사나 문화를 연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니 대표적으로 서하 역사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부분은 《송사》 <하국전>(夏國傳)이 있고 그외 《요사》와 《금사》에 서하에
대한 기록을 남긴게 전부인데 전기 서하의 기록은 요사에 많고, 후기 서하의 기록은 금사에 많습니다.
고려가 거란을 주적으로 대치하면서 적은 인구에 엄청난 무리를 한 걸로 유명한데, 서하는 300만
에서 500만 선으로 추정되는 인구로 거란은 물론 인구 1억인 송과도 적대했으니, 서하는 군사
사회가 될수 밖에 없었는데 중국측 사료에 기록된 서하의 군대는 최대 50만이니 서하 인구
를 500만으로 잡아도 인구 10%, 생산 가능 인구의 절반이 군인이었다는 뜻으로 말
그대로 다 끌어모은 숫자고 한번에 동원가능한 전력은 이보다 적었겠지만 엄청난 무리 였습니다.
성인 남성들을 다 동원하고도 모자라서 당시로선 드물게 여군(女軍)이 정규편제로 존재했으며 전근대
에 양성평등 같은게 아니라 압도적인 물량의 송과 적대관계로 장기간 전쟁을 하는 바람에 남성을
다 끌고가도 모자랐기 때문이니 이들 여군을 마괴(麻魁)라고 불렀으며 송과의 전쟁에 투입되었습니다.
철요자(鐵鷂子)라는, 직역하면 전갈 기병 정도 되는 기병종도 존재했는데, 말과 탑승자의 갑옷
을 하나로 묶어 탑승자가 전투 중에 죽어도 말은 계속 전진해 적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특이한 병종이었으니..... 나중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철기병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이 '철요자(鐵鷂子)' 라는 병종은 서하의 고유 병종이라고 할 순 없으니 마찬가지로 중기병을 운용한
유목제국인 거란족의 요나라에서도 말과 기수를 묶어 낙마를 통한 전투력 저하를 막은 병종이
있었고, 이들과 교전하던 금나라 역시 괴자마라는 비슷한 병종을 남송과의 전투에서 운용했습니다.
1998년에 저술된 《서하의 군사, 과학, 그리고 기술》에 적힌 바로는 기병, 전차,
궁병, 포병, 수륙 양용군을 포함한 군사적 기술을 통해 요, 금, 송 등 당대의
중국 왕조들 사이에 여러 전쟁에서 동등한 위치에 서 있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서하는 남자의 나이가 15세 이상이 되면 모두 어른으로 간주하고, 군인이 될 의무를 적용시키는 징병제
국가였으니 그래서 서하군의 총인원 수는 50여만 명이나 되었으며 서하군은 젊고 용감한 사람을
전투병으로 삼았고, 겁이 많거나 나약한 사람은 후방에서 농사를 지어 식량을 지원하도록 배려했습니다.
보통 서하군은 10일 이내로 전투를 끝내는 속전속결을 선호했고, 그래서 병사들이 휴대한
식량도 10일분을 넘기지 않았다는데 서하인들은 말을 잘 다루고 굶주림과 갈증과 더위
와 추위를 잘 견뎠으며, 전황이 불리하면 재빨리 후퇴하여 남은 전력을 보존했다고 합니다.
서하군에는 전쟁 포로들로 구성된 특수 부대인 금생(擒生) 도 있었다는데, 이들의
인원수는 총 10만명이나 되었으니 대개 '금생' 은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포로
로 잡은 한족(漢族)들이었고, 간혹 거란족이나 티베트(토번)족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밖에 서하군은 주변의 이민족들 중에서 활쏘기와 말타기에 뛰어난 자들을 5,000명 뽑아서 육반직
(六班直)이라 부르며, 매달 쌀 2석을 급료로 주었으며..... 외인부대로 복무하는 외부 동맹군도
있었는데, 횡산(橫山)에 사는 강족(羌族)의 일파인 산와(山訛)였으니“송사” 를 보면 이들 산와족은
전투에서 서하인들 보다 월등한 용맹성과 기량을 보여, 서하군 보다 훨씬 강력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서하(西夏) 또는 서하의 정체성을 가졌던 탕구트족들이 자신들의 역사책을 기록하지 못하다
보니 그만큼 서하 제국과 탕구트족들의 문화가 어땠는지 알기 어려운 면도 있지만 그나마
서하 문자들이 존재했고, 다는 아니지만 일부분 해독되는 중이라서 조금씩 알려지고 있습니다.
벽화, 도자기, 칠기, 목제나 석제, 금속제품 등의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더욱 많이 알려
졌는데...... 한자를 참고로 한 서하 문자가 대표적이며, 불교와 유교, 토속신앙
중심의 문화가 발전되었으며 불교를 많이 믿다 보니 불화와 대장경들도 남겼습니다.
건축물은 일부 탑과 성터, 그리고 서하 황릉이 있으니 서하 황릉은 "동양의 금자탑(피라미드)" 이라고
불리며, 현재는 흙으로 쌓인 모습이지만 과거에는 여기에 탑 처럼 생긴 큰 건축물을 세웠다고 합니다.
다른 북방 유목민 및 기마민족들 처럼 변발을 하기도 했고 탕구트족 고유의 문화를 중심으로 하여 송,
요, 금, 티베트, 위구르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그 외 서역의 여러 민족들의 문화들도 존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