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 향기
서미숙
사춘기 시절, 이마와 볼, 턱에 여드름이 쉴 새 없이 돋아났다. 어머니는 여드름에 효과가 좋다는 비누 하나를 사 오셨다. 호박 보석처럼 투명한 주황색의 네모 비누였다, 반들반들해서 물을 묻혀 문지르는 느낌이 좋았고, 상큼하면서도 산뜻한 향이 나서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차가운 물과 함께 거품을 내서 얼굴에 가까이 대면, 향기는 더욱 선명해져서 코끝에 행복을 전했다. 여드름 때문에 고민이 되고 속상해하면서도 세안을 귀찮아했는데, 그 비누를 사용하는 동안에는 부지런히 씻었다.
언제부터인가 그 비누 향기를 가끔 떠올리기 시작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아내, 엄마, 그리고 맏며느리로 살아 내느라 해야 할 일에 치이고 하고 싶은 일을 미룰 수밖에 없어, 삶이 팍팍하게 느껴지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 향기를 가진 비누를 구하고 싶었다. 투명하고 반들반들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바쁘다 보니 그저 손에 잡히는 비누를 사용하기에도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항상 부족했다. 관심이 가는 것이 있어도 열정을 이어갈 힘이 부족했던 나는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에 안주하며 그 향을 마음으로 맡았다.
직장에서 ‘천연비누 만들기’ 일일 강좌가 있었다. 비누 베이스를 녹인 비커에 티트리, 라벤더, 레몬 오일을 몇 방울씩 떨어뜨려 저은 후, 비누 틀에 부어 만들었다. 그 향이 기억 속의 향기와 많이 닮은 것 같았다. 두 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이어서 정확한 조향 방법을 배우지는 못했다. 강사는 많은 인원을 가르치느라 바빴고, 우리 역시 바쁜 업무 중에 잠시 짬을 내어 참여한 강좌여서 서둘러 자리를 떴다. 티트리, 라벤더, 레몬 오일이 들어가면 그 향이 나는 비누를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만든 비누가 화장실에 있는 동안, 화장실을 자주 드나들었다. 상큼하면서도 은은하고, 쌉싸름하면서도 산뜻한 향은 시원하게 콧속을 훑고 지나가서, 온몸 구석구석, 세포 하나하나를 설레게 했다. 비누 향으로 머릿속이 말개지면, 옛날 그 향을 더 정확히 떠올리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조금은 여유가 생긴 시기가 있었다. 한쪽으로 밀쳐 두었던 묵힌 마음에 신선한 공기를 솔솔 불어 넣어 아련한 정서를 헤집었다. 그 비누 향을 찾고 싶어서 천연비누 공방에 갔다. 공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디선가 그 향이 느껴지는 듯했지만, 막상 비누 하나하나 맡아 보니 수많은 비누 중에 하나도 없었다.
공방에서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강사의 도움을 받아서 오일의 양을 다르게 하며 여러 번 시도했지만, 내가 만든 비누도 공방의 다른 비누들과 비슷할 뿐이다. 다른 오일을 넣어보기도 했지만, 그 향을 찾지 못했다. 오일도 종류가 많고 생산지나 업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했다.
몇 년이 흐른 후, 다시 ‘비누 향기 앓이’를 했다. 다른 공방에 가면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도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디선가 그 향이 느껴지는 듯했지만, 비누 하나하나의 향을 맡아보면 없었다. 강사에게 또다시 주절주절 사연을 늘어놓은 후, 다시 비누 만들기에 도전했다. 향기를 찾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더라도 천연비누 만드는 과정 자체가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러다 보면 혹시 그 향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다.
지난번보다 좀 더 깊이 있게 배웠다. 지난번에는 공장에서 다 만들어진 비누 베이스를 녹인 후에, 오일, 가루 등을 첨가해서 굳혀 만들었다면, 이번 수업에서는 비누 베이스도 직접 만들었다. 그런데 비누 베이스를 만드는 과정이 위험했다. 수산화나트륨을 물에 녹일 때 발생하는 열과 기체가 호흡기, 눈, 피부에 해로울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마스크, 고글, 장갑을 착용하고, 공방 밖에서 팔을 한껏 뻗고, 고개를 돌리고 저어야 했다. 자칫 실수하면 화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호흡기가 건강하지 못하고, 더구나 자주 깜박거리는 나는 자신이 없었다. 쉽게 꺾이는 열정을 다독이며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라는 가사를 다시 읊조렸다.
최근에 우연히 그 향을 떠올리는 비누를 찾았다. 물론 아주 다르다. 불투명 우유색에 팔각형 무른 비누다. 알싸한 향을 내기는 하지만 은은하기만 하다. 그래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선택이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가끔 비누와 코 인사를 한다. 세수할 때는 거품 속의 향을 맡으려고 날숨보다 들숨을 더 깊게 오래 쉰다. 그러다 보면 가끔, 그때 그 향이 선명해지기도 한다. 여전히 나는 아련한 정서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마음에만 두자고 하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