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불교학(佛敎學)이 된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다양한 논서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마르크스 사상이 중국에 흘러들면서 마오이즘으로 중국화 되는 과정과 같은 이치이다. 사상과 철학이 요즘에 이르러 국제 상거래까지 중국 특유의 흡수력으로 상표의 명칭마저 중국에 들어오면 힘을 잃고 중국 표기 발음기호로 불리게 된다. (예) 코카콜라 ⇒가구가락(可口可樂)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와서 불교학 된 이후 한국 불교계는 중국 불교학에 의존하는 획일화에 대해서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경전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그 수를 헤아리기를 어려울 만큼 그 숫자가 많다. 「지장경」, 「정토경」, 「시왕경」, 「보살경」, 「업보경」, 「천지팔양경」 등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 가짜경전)이다. 특히, 한국 불교계에 널리 알려진 부처님과 가섭존자와의 삼처전심(三處傳心) 이야기도 중국에서 만들어진 「대범천왕문불경의 경」이라는 위경에서 들어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부처님 경전에는 마음과 마음이 전하는 염화미소란 없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에서 중국의 혜능 선사까지 이어져오는 33조사 설도 중국 토양에서 시대와 연대까지 무시하여 그럴듯하게 꾸며진 짜맞추기식 억지 계보인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왜인지는 모를 일이나 선사가 법상에 오른 후 토해내는 말씀은 중국 선사들이 주고받는 색 바랜 언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들어가 불학이 되었듯이, 중국의 불교도 한국에서 와서 한국의 토양과 문화에 맞게 한국인의 색깔과 목소리로 그 공감대와 둘레를 넓혀야 한다.
그렇다면 선원에서도 간화선 제일주의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가 한국 토양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화두정진이 이뤄저야 한다. 조사어록을 살펴보면 야사와 속어 등 당시에 유행했던 속담까지 들어있다. 영어 코미디는 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이해가 힘들어 우리를 웃기지 못한다. 마찬가지도 우리말로 코미디를 하면 외국인들은 그 반응이 싸늘하다.
한글세대 불자들 앞에서 당나라와 송나라 때 한문으로 된 게송을 읽거나 암송하는 스님들의 설법은 이제 변화해야 한다. 특히,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을 금과옥조처럼 읽고 암송하는 것은 불교 발전을 근본적으로 막는 행위이다. 더욱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가짜 경전을 진짜 경전으로 알고 암송하며 수행을 하는 것은 잡초 씨를 심어 놓고 쌀이 나오기를 바라는 격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홍길동」이란 사람을 길거리에서 「홍동수」라고 외치고 부르면 누가 대답을 할까? 부처님의 정신이 올곧게 들어있는 경전을 사용하고 수행을 해야 진리와 한 몸이 될 수 있다.
출처 : 향봉스님 <산골 노승이 푸른 목소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