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 (행1:21-26)
요즘 인기 프로그램 중에 <히든 싱어6>: 가수와 그 가수의 노래를 가수처럼 하는 4명이 등장하여 경연을 하는 프로그램인데 어떤 때는 가수가 먼저 탈락 되기도 합니다. 가수가 아닌 분이 출연가수보다 더 그 가수노래를 똑같이 부른다는 것 때문입니다.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 후반까지 전 세계를 풍미했던 찰리 채플린<찰리 채플린 흉내내기대회>에서 3등을 하고서 나중에 채플린이 이 사실을 떠올리면서, “어쩌면 나보다 나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닐 수도 있다” 즉, 자기 자신보다 타인이 자기를 더 잘 볼 수도 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의학이 발달한다고 해도 절대로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내가 나 자신을 더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이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엡1:3~6,딤후1:9, 렘1:5 대상28:9,시44:21)
1. 성경의 시작은 <창1:1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시작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것을 만드는 사람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드셨고 그래서 하나님은,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신앙의 시작은 그 창조자를 주로 믿는 것에서 시작하지요. 렘1:5 “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모태에 짓기 전에 아셨고 구별하셨고 도구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시139:1~4“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즉 다윗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기를 주께서는 나를 환히 알고 계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기에 언제나 좋은 길을 예비하시고 나를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로 감사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의 사도행전 1장 21-26절의 배경은, 최초의 신약교회가 시작되었던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이 자리에는 열 한 명의 사도들을 포함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결원된 가룟유다의 사도 자리를 놓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한 보선을 하는 중 가롯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뽑았다는 내용입니다. 제비뽑기를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요?이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 그들에겐 세상과 인간 모두를 지배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결과를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잠16:33)그래서 20명의 성도들이 이 두 사람을 놓고 제비뽑기에 앞서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행1:24-25“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하고. 최초로 모여서 기도하면서 밝힌 하나님의 호칭이 나오는데 행1:24“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즉, ‘카르디아 그노스테스’ 즉 마음을 아시는 이 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사도행전에서만 두 번 사용된 헬라어인데 모든 마음을 다 아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라는 의미이지요.
세상에는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그 하나님께서 자기의 마음까지도 아시는 분이시고, 자신이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자신을 잘 아시는 분이라고 믿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은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정확하게, 가장 세밀하게, 가장 구체적으로 아신다는 것을 믿기 전까지 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주 되심을 믿는 게 아닙니다. 진정으로 우리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 되심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가장 잘 알고 계신다는 믿음으로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여기 추천 받은 둘 중에 누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더 확정되어 있는지를 하나님만 아신다고 믿었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불렀고, 유다의 빈자리에 요셉과 맛디아 중 사도로 뽑힌 사람은 맛디아인 것을 알고 그 하나님께서 둘 중에 맛디아가 더 충성할 것을 알고 그를 선택했다고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맛디아는 ‘맛디아’로만 소개되어 있지만, 요셉은 ‘유스도’라고도 하고 ‘바사바’라고도 하는 이렇게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맛디아라’ 성경 전체에 소개되는 방식에 의하면, ‘맛디아’는 별로 내세울게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설명이 아주 짧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비에 뽑혀 맛디아가 당선된 것을 보고 쉽게 ‘그래 맛디아가 요셉보다 나았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요셉 역시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을 따라 다녔고, 그래서 사도가 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신앙과 인격과 또 모든 조건이 다른 11명의 제자들과, 특히 자기와 함께 추천되었던 맛디아 와도 별 차이가 없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맛디아가 제비 뽑힌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하면 보통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나,변화산에서 당신의 변한 모습을 보이실 때나,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드리실 때 같은 아주 중요한 현장에는 언제나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를 대동하고 다니셨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이 사실을 두고, 이 세 사람이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켐벨몰간 (영국 목사로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까지 아주 독특한 해석을 했던 강해설교의 제왕)은 그가 쓴 책 중에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이 너에게 말씀하신다>1권 2권이 있는데 내용을 전혀 다른 의견을 내 놓고 있습니다. 요약한다면 ‘예수님의 처방은 사람마다 다 달랐다 즉 각각의 사람들을 거기에 맞게 치유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책에서 그는 지금 말씀 드린 세 제자에 관해 독특한 견해를 내 놓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유독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셨던 것은, 그들이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나서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제자들보다 연약한 자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해 주시지 않으면 그들은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에 제자로서 바로 설 수 조차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켐벨 몰간의 이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것은 그 세 제자의 평소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미가 급해서 매사에 실수 투성이었지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못 박혀 돌아가시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했던 비겁한 인간이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 형제는 자기들의 반대자들이 나타나자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확 태워버리자 그러지요? 엄청나게 과격하고 엉뚱한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이 세상 권력을 장악하시는 줄 알고, 예수님께 자기 아들들을 중용해 줄 것을 청탁했습니다. 그 만큼 세속적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세 제자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절하게 기도를 드리시는 동안 함께 기도하자고 부탁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잠에 골아 떨어졌을 만큼 한심한 인간들이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성경에 나타난 바대로 그 세 제자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시지 않았다면, 그 세 사람은 결코 우리가 아는 바대로의 사도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들여다보면, 초대교회를 이룬 초대교회 교인들이 가장 먼저 하나님을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라고 호칭했던 깊은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켐벨 몰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제비뽑기에 탈락한 요셉보다, 선택된 맛디아가 더 연약하다는 것을 아시기에 택하게 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요셉이 더 굳건한 자요 맛디아가 더 연약한 자였음을 아셨던 것입니다. 즉 요셉은 비록 사도가 아닌 평신도로 삶을 살아도 평생을 굳건한 자로 살 것을 하나님은 아셨고. 맛디아는 사도로 뽑히지 않는다면 낙심할 연약한 심성을 가진 자임을 하나님은 아셨기에 이렇게 하셨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어떤 삶을 사셨는지를 우리가 기억한다면, 캠벨 몰간의 이런 주장은 예수님의 마음과 같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낮은 곳에, 약자와 병자와 억눌린 자, 죄인, 창녀, 과부, 고아처럼 부스러기 같은 인생들을 향해 가셨습니다. 연약한 자를 더 사랑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알아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의 마음은, 그렇게 낮은 데로 흐르신 겁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쓰시는 그릇은, 성경에도 나오듯이 이 세상에서 비천하고, 낮고, 무가치한. 그런 그릇들입니다.(고전1:26~29).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지난날의 삶을 돌아봐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크셨구나’ 고백하게 되지 않습니까? 지금 여기에 있는 까닭은 하나님의 나를 너무 잘 알고 계시기에 여기 앉혀 놓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여러분과 저를 봐도 하나님이 믿는 성도로 부르시지 않았더라면 큰 일 날 사람 많지요.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우리의 체질과 마음속의 깊은 것을 모두 아시는 하나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의 체질과 마음속의 깊은 것을 모두 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렇게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자신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생각 할때가 있지요. 앞길이 정말 막막하여 살맛이 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계셨습니다(출3:7) 시103:14에,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역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고 우리를 은혜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도 못된 성격도 다 알고계세요. 또 쉽게 남 비판하고 거짓말 하는 것을 잘 알고 계세요. 그런데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우리 마음의 간구를 아시는 주님, 우리의 슬픔을 아시는 주님, 우리의 외로움을 아시는 주님, 우리의 문제를 아시는 주님, 그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시고 해결해주시고 주님의 기적을 나타내주시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염려하지 마세요. 여러분 개인, 가정, 생활, 자녀 범사에 모든 것을 알고계세요. 주님이 다 알고계세요. 미국의 기독교 베스트셀러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의 < 위로> 라는 책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소개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 옆을 돌아보라.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응원하신다. 결승선 너머를 보라.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박수치고 계신다. 계속 달리기에는 지쳤는가? 하나님이 안고 가신다. 계속 싸우기에는 낙심이 되는가? 하나님이 붙드 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괴롭고 힘들고 어렵고 내 앞의 놓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시고 우리를 그 절망에서 건져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생각까지 살피시며, 여러분의 환경과 처지를 아시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고 채우실 것입니다. 지금 현실이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두려운 상황일 찌라도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자유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고후3: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