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는 첩보당국이 대북공작원을 통칭하는 말이다.
“Y공작보고서” 비밀첩보작전 / KBS 교양프로 인물현대사
Y'는 첩보당국이 대북공작원을 통칭하는 말이다. 대한민국 국가가 존속하는 이상 암호명을 가진 호국전사들의 진정한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 이는 국가 상벌정책이자 이 나라 수호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첩보당국의 비밀첩보작전인 “Y공작프로젝트”는 대북첩보전의 실상을 증명해 주고 있다. ‘Y공작’은 대북첩보전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Y’로 통칭되는 북파공작원들은 이름 대신 암호인 숫자로 불리었다. 최초 공개되는 당국의 비빌문서인 “Y공작보고서”는 북파공작원들의 특수임무수행이 어떻게 수행돼 왔고, 또 성과는 무엇이었는지를 자세히 보여준다.
남과 북의 ‘드러나지 않는 전쟁‘인 첩보전을 수행하며 수 많은 북파공작원들이 희생됐다.
그러나 그들은 잊혀진 존재였다.조국의 분단은 남북한 상호간의 체제 경쟁과 이념 대결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역사의 비극을 북파공작원 'Y'를 통해 그 실체를 들어보아야 힌다.
“대북공작은 이렇게 수행됐다” - 최초공개 ‘Y’공작보고서 첩보당국의 비밀문서인 “Y공작보고서”는 1965년 6월, 중부전선 비무장지대를 통해 수행된 대북공작 임무수행 보고서이다. 북파공작은 ‘대북공작계획서‘과 ’목표 및 침투로 분석’을 통해 공작계획과 훈련, 그리고 침투로 확보가 이루어졌고, ‘행동경위보고서’에는 어떤 목표가 달성되었는지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음지에서 일하고 음지에서 죽는다‘라는 모토 아래 조국을 위해 북파공작 임무를 수행한 그들의 존재는 그들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이념전쟁과 체제경쟁의 희생자 ‘멸공통일’, ‘적화통일’, ‘싸우면서 건설하자’등은 남과 북의 치열한 이념전쟁과 체제경쟁의 대결이 펼쳐진 1950-60년대에 아주 익숙했던 말들이다. 철저한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돼 있던 시기 남과 북의 첩보전은 아주 치열하게 전개된다. 1960년대 들어서며 북의 대남침투가 빈번해 진다. 1968년 김신조 부대의 청와대습격사건은 물고 물리는 피의 보복으로 이어졌다. 북파공작원들의 '00' ‘00’ 00' 등 보복작전이 수행됐고, 155마일 비무장지대는 연일 크고 작은 국지전이 벌어지며 68년엔 전쟁위기로까지 치달았다고 침투한 대북공작원들은 증언한다.
강요된 침묵 그리고 잊혀진 존재 국군정보사령부가 공식 확인한 북파공작원은 총 13,835명. 이들 중 실종. 행방불명된 공작원은 모두 7,726명이다. 월남전의 5600명 희생자들 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 버렸다.
비무장지대 인근에는 북파공작원 희생자들의 무덤이 곳곳에 방치돼 있고, 북에 생존해있는 북파공작원도 상당수 있다는 증언들이 이어진다. 68년 8월경 비무장지대를 지나던 특수공작원들은 (판교 광주교육대)목장1기 동기생들이 북측 선전방송에 나와 동기생들 이름까지 열거하며 투항을 권유했기에 그 무렵에 체포되어 억류된 생존자들이 상당수가 살아있다고 주장한다.
북파공작원은 그동안 자신들의 이름을 잊어야만 했고, 잊혀진 존재로 살아야만 했다. 그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사선에서 대북공작 임무를 수행했지만 자신 들에게 명령 내린 조국으로부터 철저히 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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