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신박물관에 가면 이집트 여왕 네페르티티 흉상이 있다. 그녀는 BC 1300여년경 이집트 왕비로 남편이 죽은 뒤 여왕이 되었다. 아들겸 사위인 투탕카맨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다.
수천년이 흐른 지금도 네페르티티는 화장품 광고모델로 등장하고, 우표, 화폐 등에도 실렸다. 죽어서도 열일하는 여자다. 이만한 취업이면 정말 대단한 거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집트의 역사는 6,000여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에도 힘있고 돈 잘 버는 왕과 신하, 굶주린 백성이 있었다. 왕궁과 장식품들은 지금과 비교하여 절대 뒤지지 않는다. 정말 웅장하고 아름답다. 오늘날에도 과거와 같은 계급구조를 갖고있다. 대통령, 재벌 그리고 지하철 노숙자가 있다. 사는 모습이 옛날과 동일하다. 기계 등 물질문명이 조금 바뀌었을 뿐이다. 도대체 왜 인간은 똑같은 현상을 반복하는 걸까? 수많은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인간들이 같은 방식으로 살다가 죽어갔다. 죽어간 선인들에게 인생이 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왕이나 걸인이나 한번 살다가 죽는 같은 인생이다. 어쩌면 수많은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이것도 모자라 매일 백성을 괴롭히는 왕이 거지보다 훨씬 더 악랄한 놈일지 모른다.
인생은 어떻게 살든 죽으면 끝난다. 자신의 인생은 끝나더라도 후손들이 계속 삶을 이어간다. 내가 죽고 또 다른 생명이 살아가는 현상이 매번 반복되는 게 인간의 역사다. 이 역사 속에서 나는 무엇일까? 다람쥐 체바퀴 돌 듯 무의미한 역사를 반복하는 게 인생이 아닐까.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는 진로 문제가 큰 의미를 갖는 듯하지만, 큰 그림에서 보면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역사 속 인물들을 영웅, 위인, 일반인, 범죄자 등으로 구분하고, 소위 위인이라 불리우는 자들을 존경하고 따른다. 그러면 위인은 왜 위인인가? 아마 위인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기여하였기 때문아닐까. 그렇다면 좋은 삶 나쁜 삶은 무엇인가? 어차피 죽어없어지는 인생인데 이러한 구분이 무슨 소용있을까 싶다. 좋은 삶 나쁜 삶은 물질적 풍요를 제외하면 지극히 주관적이다. 게다가 이러한 평가는 전적으로 위인의 입장이 아닌 현세를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의 평가일 뿐이다. 만일 위인 자신이 자신의 생을 평가한다면 위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예를 들어 화가 고흐의 인생을 살펴보자. 고흐는 동생에게 의지하여 팔리지않은 그림만 그렸다. 가난과 정신병 등에 시달리다 자신의 귀까지 자르며 비루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죽은 뒤 그의 그림은 유명해졌다. 지금 우리는 그의 작품을 보며 감탄한다. 우리가 감탄한다고 고호의 인생이 뭐가 달라질까?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다. 후세의 우리만 죽은 그를 존경한다. 역사속 위인은 그저 현세의 우리에게만 위인일 뿐이다. 역사는 죽은 자에게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내 삶은 내가 알아서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