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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이 읽어주시는 화엄경(2021.6.8.PM2시)
십주품(十住品)
보살 십주
화엄경 한 단락 공부하겠다. 어제는 스님들 공부하는 날이어서 휴강을 했고, 오늘 화요일 다시 십주품 두 번째 치지주를 공부할 차례다.
앞에는 제1주 발심주, 보리심을 발하다, 보리심, 좋은 마음, 불심을 발하다, 하는 발심주였다.
그 마음의 땅이 다져지라고 치지주 두 번째가 치지주다. 땅을 다지다.
그러니까 지난 시간에 좋은 마음을 쓰면서 살겠다는 것이 발심이다. 선한 마음을 내면서 살겠다, 중생을 도우면서 살겠다 그것이 발심이다. 그것을 좀 더 단단하게 다진다 하는 뜻에서 치지주 아주 좋은 내용이다.
4) 제2 치지주(治地住)
(1) 중생에게 열 가지 마음을 낸다
중생에게 열 가지 마음을 낸다, 그랬다.
불자(佛子)야 운하위보살치지주(云何爲菩薩治地住)오 차보살(此菩薩)이 어제중생(於諸衆生)에 발십종심(發十種心)하나니 하자(何者)가 위십(爲十)고 소위이익심(所謂利益心)과 대비심(大悲心)과 안락심(安樂心)과 안주심(安住心)과 연민심(憐愍心)과 섭수심(攝受心)과 수호심(守護心)과 동기심(同己心)과 사심(師心)과 도사심(導師心)이니 시위십(是爲十)이니라
“불자여, 어떤 것이 보살의 치지주인가. 이 보살은 중생들에 대하여 열 가지 마음을 내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이익을 주려는 마음, 크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大悲心], 안락케 하려는 마음, 편안히 머물게 하려는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 거두어 주려는 마음, 수호하려는 마음, 내 몸과 같이 여기는 마음, 스승같이 여기는 마음, 도사(導師)같이 여기는 마음이니, 이것이 열 가지니라.”
발심을 내었으니까 이익을 주려는 마음이다.
좋은 마음이 다 준비되어 있다. 특히 중생들을 스승같이 여기는 마음, 모든 중생들을 내 스승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이가 나보다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도시에 사는 사람이든 시골에 사는 사람이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지 간에 모두가 스승같이 여기면 전부 배울 점이 있다. 어떤 면도 다 그것을 배우고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다음에 도사(導師)같이 여기는 마음, 나를 인도하고 이끌어주는 스승이다, 중생들이 전부 나를 인도하고 이끌어준다고 하는 마음이다.
이런 열 가지 마음을 낸다.
그런 마음을 내야 땅이 다져진다. 문제는 중생이고 관심사는 늘 중생이다,
중생을 어떻게 하더라도 거두어 주고 중생들을 보살피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2)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함
불자(佛子)야 차보살(此菩薩)이 응권학십법(應勸學十法)이니 하자(何者)가 위십(爲十)고 소위송습다문(所謂誦習多聞)과 허한적정(虛閑寂靜)과 근선지식(近善知識)과 발언화열(發言和悅)과 어필지시(語必知時)와 심무겁포(心無怯怖)와 요달어의(了達於義)와 여법수행(如法修行)과 원리우미(遠離愚迷)와 안주부동(安住不動)이니라
“불자들이여, 보살은 마땅히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할 것이니, 열 가지 법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외우고 익혀 많이 아는 것 한가하여 고요한 것, 선지식을 친근하는 것, 화평하고 즐겁게 말하는 것, 말을 할 시기를 아는 것,두려운 마음이 없는 것, 이치를 잘 아는 것, 법대로 행하는 것,어리석음을 멀리 여의는 것,편안히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라.”
외우고 익혀 많이 아는 것
첫째는 자꾸 법문을 들어야 된다. 요즘 공부할 거리가 많다. 여기서 이렇게 유튜브 방송을 통해서 일단 공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 TV에서 공부할 수도 있고, 염화실 까페를 통해서 공부할 수 있고, 책을 통해서도 공부할 수가 있다.
그동안 화엄경 책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것을 쌓아 놓으면 안 된다. 짐이 된다. 열심히 읽으셔야 된다. 그래서 외우고 익혀서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한가하여 고요한 것
많이 공부하지만 마음은 한가하여 고요한 자세 그래야 공부가 들어간다. 마음에 복잡한 것이 있으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들어갈 틈이 없다.
선지식을 친근하는 것
친히 가까이 하는 것, 화엄경이 제일 좋은 선지식이다. 화엄경을 늘 가까이 하고, 81권이나 되니까 곳곳에다 펼쳐놓고 거실에서 방에서 식당에서 식탁에서 심지어 화장실에까지도 곳곳에 펼쳐놓고는 그것을 늘 가까이 하고 한 구절, 한 글자라도 익혀서 생각하는 것,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화평하고 즐겁게 말하는 것
그 사람의 인격이 제일 잘 표현되는 것이 말이다. 아주 친근한 말, 아주 화평한 말씨, 자비스러운 말씨, 부드러운 말씨 이런 것이 필요하다.
말을 할 시기를 아는 것
우리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을 할 때인가 아닌가, 할 장소인가 아닌가, 이것을 잘 아는 것이 참 중요하다.
부처님의 열 가지 힘 가운데서도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이라고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그것을 아는 지혜의 힘, 그런 표현을 자주 썼다.
말도 이런 말을 할 시기인가 아닌가 이것을 우리가 잘 헤아려서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문득 말이 튀어나온다고 해버리면 중생들은 번번이 실수다. 번번이 실수한다.
두려운 마음이 없는 것
불법을 공부하는 데는 당당해야 된다.
이치를 잘 아는 것
공부하는 것, 우리가 화엄경을 듣고 배우는 것도 결국은 이치를 알자고 하는 것이다. 이치를 잘 아는 것
법대로 행하는 것
여법하게 행하는 것
어리석음을 멀리 여의는 것
어리석음을 멀리 여의는 것
편안히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것
이것이 열 가지 배워야 할 내용이다. 왜 그래야 되는가?
(3) 까닭을 말하다
하이고(何以故)오 욕령보살(欲令菩薩)로 어제중생(於諸衆生)에 증장대비(增長大悲)하고 유소문법(有所聞法)에 즉자개해(卽自開解)하야 불유타교고(不由他敎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들로 하여금 중생에 대하여 대비심을 증장케 하며, 법을 듣고는 스스로 이해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니라.”
즉자개해(卽自開解)하야 불유타교고(不由他敎故)니라
십주품 매주 마다 전부 다 이 말이 나온다.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법을 듣고는 스스로 곧 이해해야 된다.
결국은 자기가 납득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것을 다른 사람들이 권한다 하더라도, 좋은 가르침을 권한다 하더라도, 자기가 납득이 되지 아니하면 그것을 결국은 남의 말이고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살다보면 절실하다.
그래서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다른 이의 가르침, 다른 이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하건 말건 그것이 나에게 납득이 되고 내가 이해가 되면 하지 말라 해도 한다. 그것이 치지주 이야기다. 다음은 수행주다.
5) 제3 수행주(修行住)
땅을 다지고 나면 그 땅 위에서 수행해 나가는 단계다.
(1) 열 가지 행으로 온갖 법을 관찰한다
불자(佛子)야 운하위보살수행주(云何爲菩薩修行住)오 차보살(此菩薩)이 이십종행(以十種行)으로 관일체법(觀一切法)하나니 하등(何等)이 위십(爲十)고 소위관일체법무상(所謂觀一切法無常)과 일체법고(一切法苦)와 일체법공(一切法空)과 일체법무아(一切法無我)와 일체법무작(一切法無作)과 일체법무미(一切法無味)와 일체법불여명(一切法不如名)과 일체법무처소(一切法無處所)와 일체법이분별(一切法離分別)과 일체법견실(一切法無堅實)이니 시위십(是爲十)이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을 보살의 수행주라 하는가. 이 보살이 열 가지 행으로 일체 법을 관찰하나니 그 열 가지 행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일체 법이 무상하고, 일체 법이 괴롭고, 일체 법이 공하고, 일체 법이 내가 없고, 일체 법이 지음이 없고, 일체 법이 맛이 없고, 일체 법이 이름과 같지 않고, 일체 법이 처소가 없고, 일체 법이 분별을 여의었고, 일체 법이 견실(堅實)함이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을 보살의 수행주라 하는가
우리가 수행이라는 말을 얼마나 잘 쓰는가? 걸핏하면 불교는 수행의 종교다, 수행을 해야 된다고 한다.
망상만 부리고 졸기만 하고 방석위에 죽치고 앉아있기만 한 것이 수행일까? 아니면 망상 부글부글 끓으면서 관세음보살 염불만을 계속하면서 법당에서 염불하는 그 자세가 수행일까? 또 어떤가, 절만 열심히 해서 ‘내가 절을 몇 배를 했다, 만 배를 했다 천배를 했다, 백만배를 했다’ 이렇게 떠들고 다니는 것이 수행일까?
이 보살이 열 가지 행으로 일체 법을 관찰하나니 그 열 가지 행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일체 법이 무상하고
일체법이 무상하다. 무상하다고 하는 것을 관해야 된다. 그것이 수행이다. 딱 ‘아 무상하구나’ 이렇게 알면 그것이 그냥 수행이다.
일체 법이 괴롭고
‘인생사 괴로운 것이다’ 사바세계를 감인세계라고 한다. 견디고 참고 괴로운 세계이니까, 견디고 참고 살아가는 곳이다. 이렇게 아는 것도 또한 좋은 수행이다.
일체 법이 공하고
결국은 일체법은 다 공하다. 텅 비어 없다. 실체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아는 것, 그렇게 관찰하는 것이 좋은 수행이다.
일체 법이 내가 없고, 일체 법이 지음이 없고, 일체 법이 맛이 없고
맛 들일 만한 것이 없다. 세상에 뭐가 맛 들일 것이 있겠는가? 철없을 때 이것저것 전부 궁금하고 호기심 가고 다 맛 들일 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철이 좀 들고 세월이 좀 가면 관심도 없다.
뉴스에도 별 관심이 없다.
인생사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지 거기서 뭐 특별한 것이 있겠는가.
뉴스를 나중에 봐도 그러면 그렇지 뭐 별 게 있겠나,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냥 궁금증만 좀 일뿐이다.
일체 법이 이름과 같지 않고
이름과 같지 않다, 그것을 우리가 관찰해야 된다. 이름이야 번드르하다.
일체 법이 처소가 없고
어떤 고정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을 관찰해야 되고
일체 법이 분별을 여의었고
일체법이 분별, 차별을 다 여의었다.
일체 법이 견실(堅實)함이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니
일체법이 견실하다, 굳고 실다움이 없다. 이것을 잘 관찰하는 것, 이것이 수행이다,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열이니라
(2)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함
불자(佛子)야 차보살(此菩薩)이 응권학십법(應勸學十法)이니 하자(何者)가 위십(爲十)고 소위관찰중생계(所謂觀察衆生界)와 법계(法界)와 세계(世界)며 관찰지계(觀察地界)와 수계(水界)와 화계(火界)와 풍계(風界)며 관찰욕계(觀察欲界)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니라
“불자들이여, 보살은 마땅히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할 것이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중생계와 법계와 세계를 관찰하며, 지계(地界)와 수계(水界)와 화계(火界)와 풍계(風界)를 관찰하며,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를 관찰함이니라.”
이것이 또 열 가지다. 한 번 더 살펴보겠다.
중생계
중생들이 그 속에 다 들어간다.
법계
이 드넓은 우주법계가 다 들어가고
세계를 관찰하며
세계 하면 좀 더 우리가 친숙하게 말하는 그 세계도 다 그 속에 포함되고
지계(地界)와 수계(水界)와 화계(火界)와 풍계(風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이 네 가지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을 싹 한눈에 관찰하고 좀 더 우리가 확대해서 볼 때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
욕심의 세계, 물질의 세계, 물질마저 벗어난 경지의 세계, 욕심의 세계 물질의 세계 또 차원이 좀 높다손 치더라도 역시 어떤 예술의 세계라고나 할까 하는 무색계의 세계 이렇게 하면 여기에 다 포함된다.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다.
중생 법계 세계 지계 수계 화계 풍계 욕계 색계 무색계 불교는 교리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리고 워낙 교리가 다듬어졌기 때문에 이런 정리는 아주 훌륭하다. 이렇게 정리가 잘 될 수가 없다.
(3) 까닭을 말하다
하이고(何以故)오 욕령보살(欲令菩薩)로 지혜명료(智慧明了)하고 유소문법(有所聞法)에 즉자개해(卽自開解)하야 불유타교고(不由他敎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들로 하여금 지혜가 분명하게 하며 법을 듣고는 스스로 이해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니라.”
매 주마다 끝에는 스스로 이해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니라. 뭐든지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증득하고 스스로 알아야 되고 스스로 실천해야 된다 하는 것으로써 매듭을 짓는다.
6) 제4 생귀주(生貴住)
귀족으로 태어난다고 그랬다. 귀족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인가? 아주 정신적인 차원이 세속적이지 않고 출세간적이고 불교적이고 지혜롭고 철이 든 사람의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입장으로 태어나는 것을 생귀주라고 한다.
우리가 불법을 만나서, 특히 화엄경을 만나서 어떤가?
우리는 참으로 부처님의 아들딸로 태어났다. 부처님의 제자로 태어나고, 부처님의 아들딸로 태어나고 그래서 부처님을, 불교를 믿고 이런 화엄경을 공부하는 화엄학인들은 전부 부처님의 아들딸로서 살아간다. 그러한 신념이 아주 강하면 그대로가 부처님의 아들딸이다. 언제 죽어서 부처님 자녀로 태어나는 그런 형식이 아니다.
그대로 불법을 공부하고 ‘불법, 당장에 실천은 안 되더라도 참 훌륭하고 좋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거기에 마음을 딱 안착을 시키면 그것이 바로 귀인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귀인이라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아들딸로 태어나는 것이다.
(1) 열 가지 법을 성취하다
불자(佛子)야 운하위보살생귀주(云何爲菩薩生貴住)오 차보살(此菩薩)이 종성교중생(從聖敎中生)하야 성취십법(成就十法)하나니 하자(何者)가 위십(爲十)고 소위영불퇴전(所謂永不退轉)과 어제불소(於諸佛所)에 심생정신(深生淨信)과 선관찰법(善觀察法)과 요지중생(了知衆生)과 국토(國土)와 세계(世界)와 업행(業行)과 과보(果報)와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니 시위십(是爲十)이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을 보살의 생귀주라 하는가. 보살은 성인의 교법으로부터 태어나서 열 가지 법을 성취하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영원히 퇴전하지 아니하며, 모든 부처님께 청정한 믿음을 깊이 내며, 법을 잘 관찰하며, 중생과 국토와 세계와 업의 행[業行]과 과보와 생사와 열반을 잘 아는 것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을 보살의 생귀주라 하는가.
귀인으로 태어난 주라고 하는가.
보살은 성인의 교법으로부터 태어나서 열 가지 법을 성취하나니
성인의 교법으로부터 태어나서, 그게 그 말이다. 성인의 교법으로부터 태어나니까 그것이 귀인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영원히 퇴전하지 아니하며
혹 살다가 보면 깜빡할 때도 있고, 실수할 때도 있고,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과거생에 지은 업으로 인해서 얼른 그것이 따라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많다.
과거의 오래고 오랜 세월 동안 그야말로 철옹성 같은 업이 있는데, 그야말로 환희심이 난다고 하루아침에 모든 삶이 그렇게 부처님 아들딸로 살아지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걱정할 것은 없다. 그래도 퇴전하지 않는다. 혹 실수가 있더라도 나는 퇴전하지 않는다, 그것이 중요한 자세다.
모든 부처님께 청정한 믿음을 깊이 내며
부처님께 훌륭한 믿음을 깊이 내는 것이다.
‘아 참 불법이, 부처님 훌륭하다’ 자꾸 공부하다 보면 부처님이 훌륭하다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자꾸 깊어진다.
법을 잘 관찰하며
법을 잘 관찰해야 된다.
중생과 국토와 세계와 업의 행[業行]과 과보와 생사와 열반을 잘 아는 것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처음에는 영원히 퇴전하지 아니하며, 부처님께 청정한 믿음을 내며, 법을 잘 관찰하며 그래 놓고는 뭐라고 했는가? 중생, 국토, 세계, 업의 행, 업의 과보 그리고 생사, 열반 이렇게 일곱 가지를 한꺼번에 뭉뚱그려서 이러한 것을 잘 아는 것이 이것이 열이니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제가 자주 일컫는 금강경에도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이라고 하는 분이 있다. 법에 의해서 출생하다.
여기는 생귀(生貴) 귀족으로 태어나다,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이 귀족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보다 더 귀족이 없다.
세상의 어떤 나라 어떤 왕족, 어떤 귀족하고도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부처님의 제자로 태어난 것이다.
그동안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이러고 저러고 집안이 어떻다, 출신이 어떻다, 그러지만 우리는 부처님의 집안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생귀주, 아주 귀족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가 불계를 받으면 모두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
또 우리 불자들은 승속을 막론하고 석씨 성을 갖도록 제가 권한다.
석대원성보살님은 아주 고집이 센 분이라, 늘 석대원성 석대원성 그래서 내가 부를 때마다 기분이 좋다. 저의 말을 듣고는 그렇게 수긍이 가니까, 아무리 들어도 자신이 수긍이 안 가면 그렇게 안 한다. 그런데 당연히 우리는 불교적인 관계로서 우리가 이야기할 때는 석씨 성을 쓰는 것이 아주 바람직하다.
그리고 옛날에 청담스님이 대만에 세계 불교도 대회가 있었는데 청담스님이라고 여래 해 전에 계셨던 아주 큰스님이다. 대만에 가서 이청담이라고 하는 명함을 찍어서 내가 한국의 이런 사람이라고, 또 그 밑에 무슨 총무원장인가 뭔가 그런 이력을 잔뜩 썼다. 그랬는데 대만사람들이 보니까 이청담이고 속인인 것이다. 아무리 승복을 입었다 해도 승복은 나라마다 다 다르니까 그래 이청담이라고 해놓으니까 ‘아 속인이구나’그렇게 알고는 속인들 앉는 자리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크게 망신을 했다. 그래서 그 행사에는 말하자면 스님 자리에 못 앉았다는 것이다.
그때 참석하고 따라갔던 기자들 이런 이들이 돌아와서 그 사실을 이야기해서는 파다하게 이야기가 나서 우리한테까지, 학인들에게까지 전부 그것이 전달이 되어서 알려지고 한편 우스개가 되기도 하고 했던 일이 있었다. 여기는 제가 강설을 쓰면서도 그 이야기는 쓰지 않고 ‘석씨 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하는 말만 했다.
우리 불자들은 석씨 성을 써야 된다.
석가모니 석씨를 따르는 것, 부처님의 성을 우리가 따르는 것이 얼마나 영광이고 좋은 일인가.
그거 우리가 알아야 된다.
출가했다, 출가하지 않았다 상관없다.
뭐라고 했는가?
이심중애(離心中愛)를 시명사문(是名沙門)이요 불연세속(不戀世俗)을 시명출가(是名出家)라, 불법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출가한 사람이다. 불법에 마음을 환희심을 내고 불법을 자기 생명처럼 생각하고 ‘내가 의지할 데는 아 불법이다. 이렇게 좋은 곳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자나깨나 염화실에 들어와서 공부를 읽고 다른 사람들 잘잘못을 교정도 해주고 이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근사한 삶인가?
내가 일일이 그렇게 깨놓고 말씀을 못 드렸지만, 이 자리에 이야기가 되었으니까 드리는 말씀이다.
신심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한 것이 신심이다.
특히 여기서 화엄학인, 화엄행자로서 이렇게 수준이 높은 공부를, 불법 중에서도 수준이 높은 공부를 할 때 우리가 석아무개다, 이렇게 해야지 언제 석씨 성을 쓰겠는가?
그것을 잘 이해하시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란다.
그래야 이 생귀주, 귀족으로 태어난 것, 부처님의 아들 딸로 태어났다, 하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이다.
(2)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함
불자(佛子)야 차보살(此菩薩)이 응권학십법(應勸學十法)이니 하자(何者)가 위십(爲十)고 소위요지과거(所謂了知過去)와 미래(未來)와 현재(現在)의 일체불법(一切佛法)하며 수집과거(修集過去)와 미래(未來)와 현재(現在)의 일체불법(一切佛法)하며 원만과거(圓滿過去)와 미래(未來)와 현재(現在)의 일체불법(一切佛法)하며 요지일체제불평등(了知一切諸佛平等)이니라
“불자들이여, 이 보살이 마땅히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할 것이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일체 부처님 법을 분명히 알며,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일체 부처님 법을 닦아 모으며,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일체 부처님 법을 원만히 하며, 일체 부처님 법의 평등함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니라.”
불자들이여, 이 보살이 마땅히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할 것이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일체 부처님 법을 분명히 알며
그러니까 과거 부처님 법, 미래 부처님 법, 현재 부처님 법을 분명히 안다. 지금은 억만분의 일을 알았다 하더라도 앞으로 계속 알아 갈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된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일체 부처님 법을 닦아 모으며
내가 지금은 귀로만 듣고 입으로만 떠들지만 결국은 ‘앞으로 이것을 잘 닦아서 내 살림살이로 할 것이다’ 이러한 책임감 같은 것을 갖고 지금은 그것이 내 살림살이가 못되더라도 그런 확신을 갖고 사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일체 부처님 법을 원만히 하며
아직은 결손투성이다. 캄캄한 데 조금 그저 그 빛 한 줄기가 조금 보일 듯 말 듯한 상황이지만 그러나 세월이 가고 거기에 신심을 불어넣고 ‘아 이거구나 내가 살 길은 바로 이길 밖에 없구나’ 하고 탁 그냥 거기에 몸을 담고 마음을 담으면 그냥 원만해진다. 달이 훤하게 구름을 다 벗어나서 둥글게 어둠을 환하게 비추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된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일체 부처님 법을 원만히 하며
일체 부처님 법의 평등함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니라
일체 부처님 법의 평등함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니라.
(3) 까닭을 말하다
하이고(何以故)오 욕령증진(欲令增進)하야 어삼세중(於三世中)에 심득평등(心得平等)하고 유소문법(有所聞法)에 즉자개해(卽自開解)하야 불튜타교고(不由他敎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로 하여금 더욱 증진하여 세 세상 가운데서 마음이 평등하게 하려 함이며, 법을 듣고는 스스로 이해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앞서 말씀드린 것들도 전부 스스로 납득이 딱 가면 그것이 자기 살림살이인 것이다. 꼭 제가 말씀드린다고 해서 ’아 무비스님이 말했으니까’ 이렇게 따를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남의 살림이다. 자기가 납득이 딱 가서 자기 소신으로 모든 것이 결정 되어야 한다.
스스로 이해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참 그 결론이 아주 뛰어나다.
7) 제5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
(1) 선근의 열 가지 일
불자(佛子)야 운하위보살구족방편주(云何爲菩薩具足方便住)오 차보살(此菩薩)의 소수선근(所修善根)이 개위구호일체중생(皆爲救護一切衆生)하며 요익일체중생(饒益一切衆生)하며 안락일체중생(安樂一切衆生)하며 애민일체중생(哀愍一切衆生)하며 도탈일체중생(度脫一切衆生)하며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이제재난(離諸災難)하며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출생사고(出生死苦)하며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발생정신(發生淨信)하며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실득조복(悉得調伏)하며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함증열반(咸證涅槃)이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을 보살의 구족방편주라 하는가. 이 보살이 닦는 선근은 모두 일체 중생을 구호하며, 일체 중생을 요익케 하며, 일체 중생을 안락케 하며, 일체 중생을 가엾이 여기며, 일체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재난을 여의게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한 신심을 내게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다 조복함을 얻게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열반을 증득케 하려는 것이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을 보살의 구족방편주라 하는가
방편을 구족한 머무름
이 보살이 닦는 선근은 모두 일체 중생을 구호하며
보살이 닦는 선근은 모두 일체 중생을 구호하기 위함이다.
또 일체 중생을 요익하게 하는 것이다
또 일체 중생을 안락하게 하는 것이다
일체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다
일체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게 하는 것이다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재난을 여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재난을 여의게 하는 것이다.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한 신심을 내게 하려는 것이다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다 조복함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열반을 증득케 하려는 것이니라
편안한 마음, 온갖 생사와 번뇌망상이 다 사라져 버린, 혼탁하고 오염된 생각은 다 사라져 버린 경지, 열반의 경지, 그것을 증득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대목을 읽으면 ‘정말 세세생생 이 화엄경 공부만 하고 살아야 되겠다, 앞으로도 아주 건강하게 오랫동안 이 화엄경을 공부하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이 화엄경의 이훌륭한 이치를 전달하고 나누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이치를 여러 사람에게 나누면 얼마나 복이 되겠는가, 많은 사람에게 복이 되고 나에게도 복이 될 것이다.
불자들이여, 어떤 것을 보살의 구족방편주라 하는가. 이 보살이 닦는 선근은 모두 일체 중생을 구호하며, 일체 중생을 요익케 하며, 일체 중생을 안락케 하며, 일체 중생을 가엾이 여기며, 일체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재난을 여의게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한 신심을 내게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다 조복함을 얻게 하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열반을 증득케 하려는 것이니라
이것이 불경이다. 이러한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다.
(2)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함
불자(佛子)야 차보살(此菩薩)이 응권학십법(應勸學十法)이니 하자(何者)가 위십(爲十)고 소위지중생무변(所謂知衆生無邊)과 지중생무량(知衆生無量)과 지중생무수(知衆生無數)와 지중생부사의(知衆生不思議)와 지중생무량색(知衆生無量色)과 지중생불가량(知衆生不可量)과 지중생공(知衆生空)과 지중생무소작(知衆生無所作)과 지중생무소유(知衆生無所有)와 지중생무자성(知衆生無自性)이니라
“불자들이여, 보살은 마땅히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할 것이니, 열 가지 법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이 끝없음을 알며, 중생이 한량없음을 알며, 중생이 수가 없음을 알며, 중생이 부사의함을 알며, 중생의 한량없는 몸을 알며, 중생이 헤아릴 수 없음을 알며, 중생이 공함을 알며, 중생이 지음이 없음을 알며, 중생이 있는 바가 없음을 알며, 중생이 제 성품 없음을 아는 것이니라.”
불자들이여, 보살은 마땅히 열 가지 법을 배우기를 권할 것이니, 열 가지 법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이 끝없음을 알며
중생무변서원도 그런다. 중생이 끝이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끝없는 중생을 다 건지기를 서원합니다’ 사홍서원이 그렇다.
중생이 한량없음을 알며
중생은 한량없다. 끝없다는 말이나 한량없다는 말이나 같은 뜻이다.
중생이 수가 없음을 알며
중생이 그 수가 한량이 없다. 내 한 몸 안에 또 중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온갖 세균이며 세포며 균이며 충이며 등등 생명체가 내 한 몸 하나 속에 있는 생명체만 하더라도 수백만, 일조 세포가 백억이라 하던가, 일조라고 하던가 그런 정도의 생명체가 있다.
중생이 부사의함을 알며
중생이 불가사의하다.
중생의 한량없는 몸을 알며
우리들의 한 몸도 백조가 넘는 생명체가 함께 있다. 현대과학이 다 증명한 것이니까 잘 아실 것이다.
중생이 헤아릴 수 없음을 알며
헤아릴 수 없다.
중생이 공함을 알며
그러한 중생도 또 어떤 이치에서 보면 텅 비어 공하다. 좋은 이치가 아닌가?
중생이 지음이 없음을 알며
조작이 없다.
중생이 있는 바가 없음을 알며
중생 중생하지만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중생이다. 중생이 있는 바가 없음을 알며, 그런 입장이 있다. 그런 시각도 있어야 된다. 그런 안목도 갖춰야 된다.
중생이 제 성품 없음을 아는 것이니라
자기 성품, 이것이 나의 모습이다 라고 하는 것이 실재하지 않는다, 그런 입장도 또 있고, 그런 시각이 분명히 있다.
그런 입장에서 우리가 중생의 모습을 가지고 이 시간 이렇게 88명이나 동참해서 같이 공부하고 있잖은가?
환희심도 나고 신심도 나고, ‘야 화엄경이 그런 내용이구나’한다.
오늘 공부 다 잊어버리더라도 화엄행자, 화엄학인은 생귀주(生貴住) 귀족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이후로 부처님의 아들딸이 됐다 말이야. 나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종족의 자식이다. 귀한 종족으로서 부처님의 아들딸이다’ 그러면 모습도 달라지고 얼굴도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지고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런 도리가 있다.
(3) 까닭을 말하다
하이고(何以故)오 욕령기심(欲令其心)으로 전부증승(轉復增勝)하야 무소염착(無所染着)하고 유소문법(有所聞法)에 즉자개해(卽自開解)하야 불유타교고(不由他敎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 마음이 더욱 더 수승하여 물들어 집착하지 않게 하며, 법을 듣고는 스스로 이해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 마음이 더욱 더 수승하여 물들어 집착하지 않게 하며
더욱 더 수승하여 물들어 집착하지 않게 하며
법을 듣고는 스스로 이해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게 하려는 연고니라
스스로 모든 것을 이해한다.
아 참 부처님은 어떻게 보면 아주 꾀도 많으신 분이라. 당신이 이렇게 다 설명해 놓고는 그것을 자기 살림살이로 하고 안 하고는 각자 알아서 할 일이고 각자 소신에게 맡긴다, 내가 말한다고 꼭 그렇게 되라는 법은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스스로 이해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는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책임이 조금뿐이다. 천 분의 일? 백분의 일밖에 없다. 나머지는 전부 그대들 책임이다. 그대들 마음 씀씀이에 달려 있다’ 하고 부처님은 말하신다. 이렇게 저 나름대로 정의할 수가 있겠다.
구족방편주 법문 훌륭하고 좋다.
오늘 법문은 여기까지 하고 또 어떤 분들이 동참하셨는가 한 번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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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성불하십시다.
첫댓글 🙏🙏🙏
_()()()_ 감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QY_QL_wvQU
PLAY
어른스님의 말씀말씀이 귀에 쟁쟁합니다.
속히 쾌차하셔서 다시 저희들에게 법석을 열어주실 것을 간곡히 기도합니다.
화엄성중 화엄성중 화엄성중 화엄성중 화엄성중 화엄성중 화엄성중.........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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卽自開解하야 不由他敎故니라..._()()()_
_()()()_ 저도 큰스님께서 빨리 회복되시어 예전처럼 법석 열어주시기를 발원합니다.
그동안 큰스님께서 강의하셨던 법문들을 복습하고 있겠습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화엄성중 화엄성중 화엄성중~~~
하루속히 쾌차하시길 화엄성중님전에 기도올립니다. 화엄성중 화엄성중 화엄성중님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_()()()_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