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대표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있는 백낙청이 최근에 발간한 『2013년 체제 만들기』를 읽으면 내가 안타까워하는 이 땅의 진보논리의 실상이 다 드러나 있다. 그는 그 책에서 “87년 체제와 더불어 그 본질적 제약으로 작용한 53년(분단) 체제를 타파하는 일”이 2013년 체제의 과제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87년 체제를 진정한 민주화를 이룩한 체제로 보지 않는다. 가령 “87년 변화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변혁은 아니었고… 97년 신자유시대로 들어섰기 때문에 87년 민주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논자도 있다”라는 식이다. 그런 논자야 얼마든지 있겠지. 자본주의 체제 속에 살면서 자신은 다른 곳에 살고 있다고 우기는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나만 말하자.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어야 한다는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자본주의를 지상낙원의 체제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속에 살면서 그 모순을 직시하고 개선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 속에 살면서 자신은 그 밖에 사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보다 치열하고 정직한 사람이 더 많다. 게다가 그는 남북이 적대적이면서 동일한 체제라고 말한다. 나쁜 점을 닮아가며 재생산되는 구조라고 양비론을 펼친다. 종북(從北)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비론을 펼친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여하튼 그는 남북의 현격한 차이를 애써 외면한다. 그리고 여전히 ‘남북연합’으로 분단현실을 공동 관리하는 ‘1단계 통일’을 내세운다. 그리고 아주 근사한 말을 한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심지어 사회주의도 원칙상 용인되는 국가”라는 것이다. 하나만 묻자. 북한은 그중 어디에 속하는가? 그는 자본주의 체제와 분단체제의 청산만이 진정한 변혁이라고 주장한다. 가히 혁명적이다. 그에게는 통일만이 지상과제이고 나머지는 다 부수적이다. 하나의 목표를 정해놓고 나머지는 다 가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은 옳은 편에 굳건히 서 있다. 정말 장하다. 그의 논리 속에서 북한과 손을 잡고 통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모두 반통일 세력이 된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라. 그의 방식대로의 통일을 지상과제로 삼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반통일이 지상과제인 사람들이 아니다. 통일을 더 깊이, 더 넓게 바라보고 숙고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훨씬 더 차원 높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세상을 그렇게 단차원적으로 보고 우기는 것이 더 힘이 있어 보이니까 백낙청 같은 사람은 일부러 그 단차원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 단순한 사고에서 2012년의 대한민국을 자꾸 1953년의 분단체제로 옮겨 놓는다. 세상에 이런 극렬 보수도 없다. 그런 것이 진보이고 진취적 사고라면 공자님이 웃으신다. 북한과 1대 1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하라고? 대단한 민족주의이다. 하지만 그 민족주의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 북한의 실상이 어떠하건 대등한 입장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새로운 통일국가’를 함께 모색하자고? 하나만 묻자. 지금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인가? 수령 독재가 3대 세습으로 이어지고 있는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인가? 수백만 명이 굶주려 죽어간 나라가 정상적인 국가인가? 굶어 죽어간 국민이 민족인가, 아니면 3대째 수령 독재를 행하고 있는 정권이 민족인가? 북한은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다. 북한은 암과도 같은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는 국가이다. 암이란 무엇인가? 정상 세포가 변형된 것이 암세포이다. 그 암세포의 속성은 딱 한 가지이다. 왕성한 맹목적 증식력을 갖고 있다는 것, 그것이 암세포의 속성이다. 그 증식력이 어느 정도 왕성하냐 하면 자기가 살아가야 할 터전이 죽어버릴 때까지 증식을 한다. 암세포는 암세포가 살고 있는 숙주가 죽어야 함께 죽는다. 그리고 기를 써서 그 숙주의 죽음을 앞당긴다. 암세포의 왕성한 생명력은 죽음과 바로 연결된다. 우리는 지금 그 암세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느냐 아니냐 하는 싸움을 벌일 때가 아니다. 북한도 우리와 한 민족이니 모든 것을 1대1로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자고 말하는 것은 암세포도 정상세포가 변한 것이니까, 정상세포와 뿌리가 같으니까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도 병들어 있으면서 어디 북한만 병들었다고 말하느냐고? 맞다. 우리에게도 병은 있다. 하지만 어디 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체가 있을 수 있는가? 감기몸살과 암도 결국 같은 병이 아니냐고 우기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이 나라의 대표적 지식인 대접을 받는 사람이 그런 해괴한 논리를 펼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올 뿐이다. 통일 논의는 우선 북한이 중증의 병을 앓고 있다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북한이 앓고 있는 그 병을 진심으로 가슴 아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민족주의이다.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북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앓고 있는 병을 우리의 병처럼 생각하는 것, 그것이 올바른 방향의 민족주의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치료의 방법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올바른 방향의 민족주의이다.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 그 치료방법에 대해 논란을 벌이는 것은 그 논란이 아무리 격렬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심지어 북한을 자극하지 말자는 논리도 상관이 없다. ‘암세포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일 난다.’라는 논리라면 그런대로 받아줄 만하다. 북한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만 인정해도 어느 처방이 옳은 것인지 함께 모색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땅의 진보 지식인들은 대개 그 병에 대해 눈을 감는다. 그리고 거기다 민족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인다. 그래서 지금 이곳에서는 북한이 병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쪽과 병을 외면하는 쪽의 소모적 논란만 있게 된다. 게다가 이 땅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북한이 병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수라고 매도한다. 북한이 병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보수라면 나는 기꺼이 보수의 탈을 쓰겠다. 백낙청의 글은 나라를 걱정하는 원로 지식인의 글이 아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원로지식인의 생각이 아니다. 차라리 통합진보당 동부 연합의 대변인 이야기가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런 논리로 어쩌자는 것인가? 다시 죽창을 들고 나서던 때의 그 살벌한 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인가? 시대착오도 그런 시대착오가 없다. 그런 시대착오적인 사람이 이 땅의 지식인 대접을 받는다. 국가도 생명체이다. 남과 북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수십 년 생장해 왔다. 천 번 만 번 양보해서 남북의 우열비교를 하지 않는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남북의 통일 논의는 지금 현재 변한 그 모습에서 찾는 게 상식이다. 어떻게 53년 이후의 모든 변화를 무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53년 이후의 삶을 전부 잘못 살아온 삶으로 매도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그 모든 변화를 무시한단 말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이 해방 이후 분단체제의 모순을 그대로 안고 있을 뿐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백낙청의 이념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에는 무슨 이념이라고 해야 할 것도 없다. 그냥 초라한 껍질만 있을 뿐이다. 권력을 탐하고 그것을 즐기는 사이비 지식의 모습만 있을 볼 뿐이다. 나는 진보로 포장을 한 정신적 꼴통 보수의 모습이 안타까워 그것을 비난하는 것뿐이다. 나는 이 땅의 정치가들에게 호소한다.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 호소한다. 자신의 신념이 어떠하건, 인생관이 어떠하건, 세계관이 어떠하건 제발 방관자의 논리를 펴지 마라. 제발 안으로 들어와라. 모두가 함께 사는 집을 만든 후에, 싸우더라도 그 집안에서 싸우자. 지금까지 지은 집, 우리가 살아온 집을 제대로 살아보기도 전에 부수어야 한다는 논리는 제발 펴지 말라. 사실 정통성 운운하는 내 속도 쓰리다. 정통성을 세우자고 주장하는 내 속도 쓰리다. 정통성 안에는 보수도 있고 진보도 있다. 미국의 민주당이 미국의 역사를 부정하는가? 영국의 노동당이 영국의 역사를 부정하는가? 다 뒤엎어야 한다고 하는가? 프랑스의 공산당도 거기까지는 안 간다. 그런데 이 땅의 진보는 그것을 다 뒤엎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 살았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올바른 교육이고 그것이 진보인가? 세상에 공과가 없는 역사가 어디 있고 공과가 없는 나라가 어디 있고 공과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 공과를 바탕으로 반성과 미래 지향이 나와야지 역사를 뒤엎으려는 눈으로 무슨 진보를 외치는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선언할 수밖에 없다. * 우리의 민주화가 아직 요원하다, 우리는 아직 반민주 독재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믿는 것이 진보라면 나는 보수의 탈을 쓰겠다. * 우리의 근현대사를 온통 부끄럽기만 한 역사라고 주장하며 그것을 온통 부정하는 것이 진보라면 나는 보수의 탈을 쓰겠다. 부정적인 우리의 근현대사를 단번에 척결해야 한다는 망상에 빠져있는 것이 진보라면 나는 보수의 탈을 쓰겠다. *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변혁과 분단체제 타파를 이룩하려 힘쓰는 것만이 진보라면 나는 보수의 탈을 쓰겠다. 무조건적인 통일이 선이고 다른 것을 모두 악으로 간주하는 것이 진보라면 나는 보수의 탈을 쓰겠다. -------------------------------------------------------------------------------------------------------------------------------------- 댓글 권영탁 진형준 교수가 있어서 그래도 [꼴통] 취급을 덜 당하는 게 같아서 적잖이 위안이 됩니다. 나라를 걱정하기는커녕 제2의 625보다 더한 살상을 불러올 일을 기획 추진하고 있으니.. 소생은 스스로 보수라 여긴 적도 없고, 편을 갈라 살고 싶지도 않았건만 어느새 좌편의 무리가 동기생 톡방에서 위장의 탈을 쓰고 얼쩡거리기만 하여도 메스꺼움이 올라오고, 심지어 피부 발진까지 나타났으니.. 이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한 열망으로 이해하는 수밖에 없었답니다. 동기생들에게도 소생이 아직 정신과의사로 일하며 어느 한편에 치우쳐져서 일하는 꼴통으로 여겨지지 않기를 기대해 봅니다. 2023-09-29 06:39:41
주한광 진형준 교수의 글에 동감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좌파에 대해 진보라는 표현은 절대 잘못이고, 종북좌파라는 표현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2023-09-29 10:03:43 |
첫댓글 경기고교 동기회에 올린 소생의 글을 보고 홍익대 불문과 교수로 은퇴하셨던 동기생 진형준이 답신으로 10년 전에 쓴 글을 올려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