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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열왕기 상 19,9ㄱ.11-13
◼제2독서: 로마서 9,1-5
◼복음: 마태오 14,22-33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미사 오신 분들은 인천방 분들입니다.
예약하셨는데 못 오신 분이 계신 데, 여기는 아무나 오고 싶어 오는 곳은 분명 아닙니다.
그분들도 오고 싶었겠지만, 사정이 생겼겠죠.
아무튼 여러분들은 미사 드리는 이곳은 단순히 은퇴한 원로 사제가 사는 개인 사가가 아니라
83분이나 되는 많은 성인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오는 분들에게 ‘어떻게 왔습니까?’ 하면 이제는 다 답을 알아요.
그죠? ‘불러주셔서 왔습니다.’
이렇게 답은 100점짜리인데 문제는 마음으로부터 진정으로 느끼고 이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이 은혜를 받고 안 받고의 차이겠죠.
이 장소는 치유의 장소입니다.
정원을 어렵게 만든 것은 나 혼자 즐기려고 만든 건 아니겠죠.
신자들 때문에 만든 겁니다.
신자들이 와서 조용히 기도하고 치유받고 또 머물다가, 어떻게 또 운이 좋아서 나랑 눈이 마주칠 수도 있겠죠.
아니면 제가 밖에 내다 보다 ‘어디서 오셨어요?’ 하고 묻고 차 한 잔 마시러 오시라 할 수 있어요.
여기, 이 주변은 내 허락을 맡고 오는 장소도 아니고, 누구 눈치를 보고 오는 장소도 아니죠.
이쪽 지나가다가 들러서 기도하고 갈 수 있는 곳이고, 또 일부러 와서 머물다 갈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밑에 집은 현재 리모델링하고 있고, 리모델링이 끝나면 신자들이 예약하고 쉴 수 있는 집입니다.
아까 첫째 부분에도 ‘이 거룩한 미사에 불러주심에 감사드립시다.’라고 했죠.
오늘 1독서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하세요?
난 이 내용을 볼 때마다 참 많은 묵상 거리가 떠올라요.
무슨 내용이었나요?
본당이든 어디든 독서자는 본인이 독서 할 내용이 뭔지 적어도 요약할 줄 알아야 해요.
1독서에서 엘리야가 하느님 말씀을 들었죠. ‘나와서 내 앞에 서라.’
그래서 나왔죠. 그리곤 ‘주님이 이제 나타나시겠지’ 하고 기다렸어.
어마어마한 바람이 불어. 어느 정도냐?
요번에 할퀴고 올라간 태풍, 이거는 이 엘리야가 본 바람에 비하면 그냥 봄바람이야.
여기 뭐라고 나와요? 바위를 부술 정도.
보통 초속 35에서 40m면 열차가 탈선한다는데, 그 정도 바람이 바위를 깼어요.
그래서 ‘아유, 하느님이 이제 나타나셨구나.’ 그랬는데 어떻게?
그 어마어마한 바람 가운데 계셨어요, 안 계셨어요? 안 계셨죠.
그리고 바람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 또 뭐가 일어?
땅이 흔들리면서 몸이 왔다 갔다 하면서 난리가 나죠. 지진이 일어나.
그래서 ‘이제 하느님이 진짜 나타나시나 보다.’ 했는데 나타났어요?
아니요.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고 그랬죠.
그다음 지진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뭐가 일어나요?
땅속에서 막 불이 화산 터지듯이 시뻘건 불덩어리가 호렙산 여기저기서 막 솟아오르는 거야.
‘지금이야말로 이제 주님 나타나실 때로 구나.’
하지만 나타났어요? 안 나타났잖아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어요.
지금 바람, 그다음에 지진, 불, 이 세 현상 가운데서도 주님은 계시지 않았어요.
아마 이 세 가지를 겪은 후에 엘리야의 얼굴은 사색이 돼 있었겠죠.
바람에 정신없이 머리는 산발이 되고, 단추도 다 떨어지고, 그런 바람이 지나갔다 싶었더니 왼쪽 오른쪽 다리가 따로따로 놀아.
그냥 나무가 흔들리고 아마 정신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끝났다 싶었더니 발밑에서 불덩어리가 막 솟아 이런 상황을 겪은 거예요.
불이 지나가고 불이 다 사그라든 다음에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힘이란 힘은 다 빠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더니
그때야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렸죠.
그게 누구 소리예요?
이것이 여러분이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이에요.
살다 보면 정말 거센 바람에 내 영과 육이 다 날아갈 정도로 내 존재가 이렇게 먼지만도 못하게 가볍구나.
내 입이 이렇게 가볍구나, 입으로 이렇게 죄를 짓고 살고 있구나.
또 우리 지진을 만날 때도 있잖아요.
살면서 또 불덩어리 때문에 ‘아이고 뜨거워.’
그것을 다 겪고 난 다음 아주 오만 고생을 다 시키고 난 다음,
산전, 수전, 지상전 바람전, 화학전, 지진전, 불전까지 다 겪고 난 다음
모든 걸 다 포기한 상태가 됐을 때, 모든 걸 다 내려놓은 상태가 됐을 때,
그때 비로소 하느님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주신다 이 얘기예요.
앞으로 내가 독서를 하겠다고 하면 적어도 독서의 내용이 뭔지는 알아야만 말씀이 살아서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이지,
아니면 입과 눈만 갖고 읽는 거예요.
내가 일주일에 4번 강론을 유튜브에 올리는데, 내가 10분 동안 기도하고 올리는 거 아닙니다.
독서와 복음을 가지고 하루 종일 묵상하며 테마를 잡아요.
복음은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이어서, 다이아몬드가 나올 때도 있고 금전도 나올 때도 있고 은전도 나올 때도 있어요.
해마다 똑같은 평일 복음이지만 해마다 읽을 때는 다 다른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도 독서를 읽거나 복음을 읽을 때는 나름대로 공부를 하셔야 해요.
이따 서재에 가시면 책상 위에 신학생 때부터 보던 성경책이 펼쳐져 있을 텐데 너덜너덜해.
저는 신학생 때도 성경 하나 읽더라도 쉽게 읽지를 못했어요.
2천 년 전으로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예수님이 얘기하시는 그 자리 앞에 앉아 있는 거예요.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성경 읽을 때 내가 예수님이 얘기하시는 그 앞에 앉아 있다 생각을 해야 해요.
그러면서 예수님의 말하는 표정, 눈빛 하나, 그리고 저분과 눈 한 번 마주쳤으면 하는 그런 마음으로 그 앞에 앉아 있을 때는,
그 말씀이 살아서 2천 년 전에 바로 그분 앞에서 앉아서 내가 듣는 거랑 똑같아.
그렇지만 아무 영혼도 없이, 제가 가끔 말하는 뇌사 상태에서 읽는다면, 그냥 책 읽는 것과 다른 의미가 없죠.
그럼, 오늘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오늘 성경 구절을 묵상하면서 베드로 사도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과 또 그 반대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베드로가 죽을 때 어떻게 죽었다고 그랬어요? 거꾸로 매달려서.
‘나는 예수님과 똑같이 이렇게 죽을 수 없다. 거꾸로 매달려 죽겠다.’
물에 빠져서 ‘살려주세요’ 할 때의 베드로와 거꾸로 순교한 베드로가 도대체 같은 사람인가,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을까?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증거하고, ‘나는 감히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던 사람이오. 그분과 똑같이 매달릴 수 없소.
나는 뒤집어서 거꾸로 매달게 해주시오.’
이런 베드로의 모습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물에 허우적거리며 ‘살려주세요’ 하는 모습과 매칭되더라 이거예요.
무엇이 이렇게 베드로 사도를 다르게 만들었을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그래요, 성령 때문에!
성령 강림 전에도 베드로는 제자였고 성령 강림 후에도 제자였어요.
성령 강림 전에는 3년 동안이나 쫓아다니면서 교육받고 또 중요한 얘기도 적었을 거고,
또 예수님이 하신 얘기 외우려고 무던히도 애썼을 겁니다.
얼마나 많이 배웠겠어요?
기적 수십 개를 눈으로 봤던 사람 아니에요.
그런데 그것이 결국엔 다 머리에만 있었던 거예요.
막상 자기가 물속에 빠지니까
거센 바람이 불었다고 그랬죠.
호렙산에 있던 엘리야처럼 거센 바람이 바위를 깨니 아이고 나 죽는다고 살려달라고 했던 거예요.
성령 강림 전에도 베드로에게 붙여진 타이틀은 사도였고, 성령 강림 후에도 사도였지만
Before와 After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죠.
사실 베드로만이 아니에요.
성령 강림 전에 제자들의 모습은 어땠는가?
예수님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 우왕좌왕했어요.
또 그전에는 자리다툼까지 했어. 자기 엄마까지 동원하여 로비도 했어.
‘예수님, 왕 되시면은 큰아들은 오른쪽에 작은아들은 왼쪽에’
그리고 순명하지도 않았잖아요?
많은 사람 먹일 것을 좀 찾아보라 했더니, ‘지금 때도 늦고 이 사람들 먹이려면 몇 데나리온이나 필요한데요.’
하며 찾으러 나가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결정적인 건 뭐예요?
예수님이 매 맞기 시작할 때부터 예수님을 버렸잖아요. 도망쳤잖아요.
3년 동안 그렇게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다 도망쳤어요.
그리고 또 사도 토마는 어떻게 했습니까? 다락방에 없었어요.
먹고 살길 찾으러 나간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첫 부활을 못 봤잖아요.
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
‘아이고 우리가 3년 동안 헛거 쫓아다녔어. 이제 고향으로 가 먹고 살길 찾자.’
그런데 예수님이 같이 갔죠.
하지만 그 인간들, 예수님이 그 긴 시간 동안을 같이 걸어갔는데도 누군지 몰랐어요.
집에 가서 빵을 떼어주실 때 그때 주님인 줄 알고 왔던 길을 한달음으로 다시 갔잖아요.
또 제자들은 예수님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다락방에 모였다고 그랬죠.
그 다락방은 거룩한 다락방이 아니에요.
피신처예요. 로마 군인들한테 잡힐까 봐 숨은 거예요.
그런데 그 다락방에 나중에 성령이 임하셨죠.
그 다락방은 바로 오늘 여러분들이 미사 드리는 이 거룩한 다락방처럼 바뀐 거예요.
그렇게 성령 강림 후에 제자들은 어떻게 바뀌었어요?
첫 번째 다락방 문을 박차고 나왔어요.
피신처가 아니라 이제 그 다락방은 출발하는 장소,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장소가 됐죠.
어디서 그런 배짱이 생겼는지 다락방 문을 박차고 나갔어요.
두 번째로 사람들이 모인 시장터에서 이상한 언어로 설교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각 나라 사람들이 다 알아듣기 시작했어.
세 번째 성령 강림 후에 제자들한테 어떤 힘이 생겼어요?
세 가지 능력, 즉, 치유의 능력, 구마의 능력, 말씀 선포 설교의 능력이 생긴 거예요.
그다음에 마지막, 네 번째 이게 제일 중요해요.
성령 강림 후에 제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어요.
벌벌 떨고 도망치던 그들이 성령 강림 받은 후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결국에는 사제든 수도자든 주교든 교황이든 추기경이든 성령 체험이 문제예요.
성령 체험을 하지 않으면 천주교 신자로 70년, 80년을 살아도 하느님 몰라요.
내 이론적으로만 알아요.
그래서 혹시 여러분 본당에서 성령 기도회나 세미나가 있으면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하지 말고 참석해 보세요.
결국에 참다운 평신도, 예수님다운 성직자, 성모님다운 수도자가 되는 것은 성령 체험을 했느냐 안 했느냐로 갈라져요.
사제도 성령 체험하지 않으면 직업인이에요
꾸리아 단장을 수십 년을 했다고 해도 만일 성령의 어떤 체험을 못 했다면 맡았으니까 그냥 하는 거예요.
이 성령에 대한 체험이 이렇게 달라요.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베드로 사도, 우왕좌왕하고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
자리 다툼하면서 세속에 빠져 있던 제자들, 예수님 버렸던 제자들, 살 궁리했던 제자들,
이들이 바로 성령 강림 후에 다락방 문을 박차서 나가서 이상한 언어로 설교하고 또 치유, 구마, 설교의 능력을 갖게 되고
심지어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죠.
이것이 바로 성령의 문제로 나뉘죠.
종교인이냐 신앙인이냐, 참 제자냐 거짓 제자냐, 참 신자냐 거짓 신자인가로 나뉘어요.
혼자 속으로 한번 대답해 보세요.
여러분들은 성령 체험했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여러분들은 스스로 주님의 참 신자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껍데기만 신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신부님 어떻게 해야 성령 받습니까? 어떻게 해야 성령 체험합니까?’ 그 질문하고 싶죠?
그렇게 질문하면 난 뭐라고 대답하냐. ‘받긴 뭘 또 받아. 다 받았잖아’
그렇죠? 언제 받았어요? 세례 때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났잖아요.
단지 성령이 지하실에 갇혀 계신 거예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어두운 지하실에 성령이 내 죄와 교만 때문에 갇혀 계신 거예요.
그분이 활동을 못 하잖아.
저는 강론할 때 제일 먼저 청하는 것이 뭐냐?
오늘 이 사제의 말씀이 여러분들 안에 들어가서
여러분들의 그 어둠의 지하실 속에 갇혀 계신 성령께서 나오시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는 강론을 해요.
이 강론을 듣는 이들의 마음을 열어달라는 기도를 하면 저는 설교를 해요.
교우들의 어둠의 지하실에서 문을 열고 나온 성령께서 당신의 일을 하셔서, 사도들이 성령 받기 전과 후가 변화됐듯이,
사람을 몇 죽인 살인범이 교도소에서 하느님을 만나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듯이,
정말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설교합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사제들의 강의를 들으면 느끼실 거예요.
‘저 신부님 말 들으면 비록 5분 강론을 들어도 깊은 울림이 있고 뭔가 내가 변화된 것 같아.’
‘저 신부님이 와서 1년 동안 강론 듣고 내가 많이 바뀌었어.’
치유의 힘이 있단 말이에요.
마찬가지로 성령을 체험한 교우들은 말투 하나하나 매사에 적극적이죠.
성령 체험하지 못하면 모든 게 다 소극적이에요.
전교하는 데도 소극적이고, 전례에 임하는 데도 소극적이고, 봉헌하는 데도 소극적이고, 봉사하는 데도 소극적이고
그냥 끌려만 다니는 거예요.
마지못해 얼굴도장 찍으려고 봉사하러 나왔어도 귀찮은 거예요. 피곤하고.
그러나 성령을 체험한 사람은 기쁘죠.
내가 며칠 전 이제 가든 공사 끝났으니 눈치 볼 필요 없이 와서 기도하고 가라 했더니 어제도 한 열 사람은 왔다 갔어요.
커피 한잔 먹고서 보내면 또 다른 차가 들어오고.
그래도 아직은 지치지 않았어, 첫날 개업한 날이니까.
어제도 서울에서 부부가 왔는데 내다보니까 둘이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얼마나 이쁜지.
앉아서 기도하다, 또 서서도 기도하고.
사진을 몇 장 도촬했죠. 하도 이뻐서.
어디서 왔느냐 물으니 자기네 부부들을 잘 모르실 거래요.
하지만 자기네는 감곡 기도 찬미의 밤, 배티 은총의 밤, 서운동 은총의 밤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다녔던 부부래요.
신부님 다른 사람들도 많이 만나시는데 괜히 피곤하게 할까 봐 늘 끝나면 바로 갔대요.
그러면서 ‘신부님 정말 은총의 밤이 그리워요.’
한 달 동안 직장 생활하면서 이런저런 산전수전 겪다가 유일하게 기다려지는 것이 매월 첫 토요일,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2시 3시 된대요.
하지만 은총의 밤을 통해 받은 힘으로 한 달 동안을 버틸 수 있었대요.
그러면서 여기서도 하시면 안 되는지 부탁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아요,
왜냐하면 같은 시간에 감곡에서 기도 찬미의 밤이 있죠.
그리고 원로 신부들은 그 지역 사목권자의 사목을 방해하면 안 돼요.
만일 은총의 밤을 한다면 여러 상황을 보고 조심스럽고 지혜롭게 해야지요.
여러분 오시다 상평 공소 보셨죠?
내가 여기 온다 했을 때 상평 공소 신자들이 난리가 났었어.
‘드디어 신부님이 우리 지역에 오시었으니, 매주 미사 드릴 수 있구나’
오지 말라고 그랬어요. 본당 가라 했어요.
‘신부님 공소 오시어 미사 좀 해주시면 안 돼요?’
회장님이 쫓아와서 부탁한다고 미사 못해요.
정말 원하신다면 본당 신부님한테 가서 허락을 맡고 본당 신부님이 나한테 부탁을 해야죠.
그것이 순서예요.
가톨릭은 그것 때문에 살아남는 거예요.
개신교랑 이것이 다른 것이에요.
저도 은총의 밤이 그리워요.
은총의 밤 준비하고 여러분과 같이 치유 노래 부르고,
십자가 보목 친구하며 안수받고, 정말 눈물 흘리며 행복해서 돌아가던 시간들.
아마 한국에서는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첫 토요일,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이벤트일 겁니다.
그런데 사목은 하라 하잖아요? 원로 사목자.
하여튼 저도 기도하는 가운데도 생각을 하고 고민해볼 겁니다.
어떤 식으로 원로 사목자의 위치에서 다른 신부님과 충돌하지 않고 지혜롭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 겁니다.
아멘
♣2023년 연중 제19주일 (8/13)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