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자연 흐름을 따를 뿐이다
이 남 순
덥다, 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지만, 나무 잎새는 가을빛이 서려 있다. 잠자리는 맴맴 맴돌고 그늘에도 가을이 살포시 보이는 볕이 좋은 날에 아들이 며느리와 손자를 데리고 왔다. 아들이 나이 들고 있나 보다. 나날이 어미 생각하는 일이 자상하고 극진하다.
몇 해 전만 해도 집에 들면 응석 부리듯이 “엄마 밥 먹고 싶어 왔어요.” 하며 집밥을 원했다. 날이 갈수록 어미가 힘들어 보이는지 아예 저희끼리 아비, 어미가 즐기는 음식으로 외식 계획을 세워오는 것 같다.
토요일 아침에 오겠다기에 아침밥 준비해 둘 테니 집에 와서 먹으라 했다. 어머님 준비한다고 힘들다며 아침 먹고 오겠단다.
점심은 간단하게 잔치국수해 먹으면 좋겠다기에 아이들 오기 전에 서둘러 육수 우리고 호박 볶고 묵은지 송송 썰어두고 김, 지단 붙여두고 국수 간장도 만들어 두고 손자들 즐겨 먹는 과자, 마실 것, 아이스크림으로 냉장고를 채웠다. 시원하게 미리 에어컨도 켜두고 오기를 기다린다.
현관문이 열리며 “할머니, 할아버지.” 하며 손자들이 앞다투어 들어와 품에 안긴다. 올 때마다 몸만 자란 것이 아니라 말씨도 늘었다. 그간 일들을 들려준다. 상도 받았으며 앓아 병원도 갔단다. 형은 제법 의젓하다. 앞서 왔을 때만 해도 막무가내로 고집부리던 그 동생도 형 말을 제법 잘 알아듣고 다투지도 않으니 대견하다.
점심으로 준비한 국수를 조록조록 오물오물 맛나게 먹는 손자 모습은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 저녁 식사는 이르다 싶게 아이들과 종종 가는 갈빗집을 갔는데, 명성 때문인지 벌써 손님이 그득하다. 오붓이 삼대가 같이하는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 서로를 챙기는 정겨운 분위기가 기껍기만 하다. 계산대에서 부자가 앞다투는 일도 보기에 흐뭇하다.
식당을 나오면서 아들 며느리는 어미, 아비 걸음걸음을 극진히 살핀다. 손자들은 덩달아 제 손을 내밀며 앙증맞게 “할아버지, 할머니 조심하세요.” 한다. 어른이 아이 거울이라는 말이 옳은 듯하다.
아침이 밝았다. 아들 방이 조용하다. 잠 깨울까 싶어 살며시 일어나 좋아할 만한 먹거리로 아침을 준비하였다.
아침을 먹고 아이들은 돌아갈 채비를 한다. 냉장고에 쟁여 둔 것들을 이것저것 아이스박스에 담았다. 손자들 즐겨 먹던 과자, 음료수도 챙겨주었다. 가져가게 챙겨준 과자를 살펴보던 둘째 녀석이 과자 두 봉지를 꺼내와서 내게 건네며 “할머니, 할아버지 드세요.” 한다.
큰 녀석은 시무룩하게 언짢은 얼굴이다. 둘째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살자, 가족이잖아요.” 기특하게 하는 말에 모두 말이 없다. 갈 때마다. 녀석들은 헤어지기가 싫다. 섭섭한 속내를 숨기며 간신히 달래어 차에 태운다. 저만치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다. 흔적 없이 멀어졌다.
집에 들어서니 온통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널려있다. 텅 빈 느낌에 허전하기 그지없다. 글썽이는 눈물을 삼켰다. 집 양반도 말없이 흩어 놓은 장난감을 정리하며 “그 녀석들….” 못내 섭섭한 마음을 한마디 흘린다.
아이들이 갔다. 아들도 제 자식을 키우며 나이 들어가니 어미, 아비 쇠하는 모습이 애석하게 가슴에 담기는가 보다. 아들 며느리 정성이 왜 이렇게 가슴을 서글프게 메우는지….
어머님 아버님 생전에 옹기종기 모여서 한 이틀을 보내고 뉘엿뉘엿 해 질 녘에 집으로 돌아오려고 고향 집 대문을 나설 때면 그 쓸쓸한 모습은 보내는 부모님 마음이나 떠나는 자식 마음이 같았으리라. 지금도 어머님께서 바람 부는 날에 물끄러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시던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찡하다.
광음은 이제 나를 그 어머님 모습으로 변화하게 하였고 아들 며느리 손자는 그때 내 짠했던 마음을 품고서 저희 둥지로 돌아갔다. 아들이 어미, 아비를 정성으로 챙기는 일이 부모 인생에 가을빛이 내려앉는 그것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공허한 마음에 뒤 숲길을 걸어본다. 해는 긴 그림자를 지우고 노을을 곱게 뿌리며 산을 넘어 어두움에 묻힌다. 풀벌레 소리가 은근하다. 더위가 기승을 부릴지라도 가을은 오고야 말 것이다. 내 가을도 오고 말았다. 날로 조금씩 저물어지는가 보다.
북송 구양수 「추성부」를 떠올려 본다. “초목은 감정이 없어도 때가 되면 나부끼며 날리어 떨어지고, … 짙게 붉던 얼굴이 마른나무처럼 되고 까맣게 검던 머리가 허옇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 어찌하여 금석의 재질도 아닌데, 초목과 더불어 무성함을 다투고자 하는가? 누가 이것에 대해 상하게 하고 해치는가를 생각해 보면, 또한 어찌 가을 소리를 한탄하겠는가. 草木無情有時飄零 … 宜其渥然丹者 爲槁木 黟然黑者 爲星星 奈何非金石之質 欲與草木而爭榮 念誰爲之戕賊 亦何恨乎秋聲”라고 하지 않는가.
싹이 자라 나무로 꽃 피고 열매 맺고 낙엽 지고 낙엽은 푼푼이 흩날리고 흙이 되어서 또 싹을 키우는 도리는 자연 흐름이리라. 내 가을도 흘러 깊어지고 있다. 그저 자연 그 흐름에 따를 뿐이다. 언젠가는 지수화풍 흩어지는 그 날까지 수인사대천명 修人事待天命 하는 차지게 영그는 인생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이들이 잘 도착했다는 전화다. 고맙다. 내 아들 어미를 성찰하게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