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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래(지명유래)
특 성
계곡리(桂谷里)
계곡리는 안동군 임북면에 속하였으며 계일, 또는 계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마곡, 전시곡, 장성백리를 병합하여 계곡동(리)를 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74년 안동댐 건설에 따라 월곡면이 폐지됨으로서 예안면에 속하였으며, 1995년에는 안동군을 안동시에 통합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계곡리는 압시골, 찰앞시골, 웃게일, 장성백이 등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구수는 30여호이다.
이 마을은 구한말 예안군 동하면의 지역으로서 구다니 또는 구단이라 하였는데,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갈동을 병합하여 귀단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는데, 1973년 안동댐이 생기면서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귀단리는 행정구역상 1리와 2리로 나누어지며 가구수는 60여호를 헤아린다. 귀단 1리는 고통, 와운데, 지촌으로 이루어지며, 2리는 가래실, 인겔, 금곡, 한자골, 새마을 등의 마을로 구성되었다.
옛날 안동군 임북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구렁이 있으므로 구렁, 또는 구룡방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달리, 양옥동을 병합하여 구룡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월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군을 안동시에 통합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구룡리는 동다리, 원구룡, 소월, 양옥, 원심이, 한바우 마을로 구성되었으며, 가구수는 약 100호이다.
아마리 아마리골 아휴리(阿休里) 조선 숙종 15년 昌寧人 曺圭承이 개척했다고 전해지며, 연대 미상이나 채정승이라는 분이 벼슬을 하여 이 곳을 지나다가 경치가 좋아 쉬어갔다 하여 아휴리로 불리어졌다고 하며 지금은 아마리로 부른다. 선암골 선암동(仙岩洞) 永川 李氏인 李公이 전사했는데 그가 탓던 말과 말방울이 이 곳에 돌아 왔다. 이에 仙岩堂을 지어 그의 영혼을 모셨으므로 동명을 선암골로 부르게 되었다.
수몰전 이 마을은 원래 영양남씨(英陽南氏)와 흥해배씨(興海裵氏)의 세거지(世居地)로 조선조에 학행으로 군위훈도(軍威訓導)에 천거된 영양인(英陽人) 남첨(南 ) 선생이 이곳 산수의 아름다움을 취택(取擇)하여 와룡면 주촌(周村)에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산천의 그윽하고 아름다움이 마치 무릉도원(武陵桃源) 같고, 복숭아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도목(桃睦) 또는 도목촌(桃睦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어떤 점장이가 와서 마을 주위에 복숭아나무가 있으면 해롭다고 하여 도목촌(道木村)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또 도목(道睦)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남첨 선생이 강학하던 장소를 기려 후손들이 8칸의 정사(精舍)를 지은 뒤 편액을 '도목정사(道睦精舍)'라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도(道)로서 일족을 돈목(敦睦)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영가지의 부북(府北) 임하현(臨河縣)에 실린 도목촌 부분을 보면 '도목촌은 현(縣)의 북쪽 35리에 있으며 본부(本府)에서 35리 떨어진 곳에 있는 동네인데, 이 곳에는 100여자 되는 석벽(石壁)이 있어 이를 '검암(儉巖)'이라 불렀으며, 그 바위 위가 평평한데 대(臺)를 지어 이름하기를 '임연(臨淵)'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관찰사 배삼익(裵三益) 공이 여기에다 대를 짓고서 임연이라 자호하였는데 관찰사의 선군(先君) 증참판(增參判) 배천석(裵天錫, 1523∼1573) 공이 처음 와서 살았다'고 기록되어있다. 또 배천석 공이 서후면 금계(金溪)로부터 도목촌으로 이거한 이래 공의 아들인 임연재(臨淵齋)가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고 벼슬이 황해관찰사에 이르렀으므로 그 친우인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선생이 이 마을의 이름을 '도맥(道脈)'으로 부르기를 권했으나, 공은 과분하다고 하여 '도목(桃木)'으로 정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도목리는 행정구역상 안동군 임북면의 지역에 속해있었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기리와 동후면의 구미동, 신기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도목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는데, 1973년 안동댐 건설로 말미암아 도목촌의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도목리의 가구수는 3개 반에 약 30호로 가래골, 구미, 오미골 등의 마을에 나누어져 있다.
도촌리는 예안군 동상면의 지역에 속했으며 길골, 또는 질골, 길곡(吉谷), 도곡(道谷)으로 불렀는데 그 유래는 옛날에 물편 사람들이 영해에서 소금이나 해산물을 지고 영양을 거처서 장갈령(長葛嶺)을 넘어 이 마을을 지나 예안까지 내왕하였는데, 장갈령에서 이 마을로 뻗어 내려오는 길을 길골이라 하였으며, 한창 때는 3, 40명이 이 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통마, 톳골, 오미골, 수락골, 고사리골, 평지마, 사래실을 병합하여 도촌동(리)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피박 혹은 피박골로도 부른다. 피박골로 부르는 이유는 사래실 앞산에 고지박을 닮은 명당이 있는데 그곳을 껍박이라 하며 한자로 쓰면 피박(皮朴)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이 마을은 사례실, 평지마, 지통마 등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약 40호이다.
이 마을은 예안군 동상면의 지역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학리, 부모리, 장갈리를 병합하여,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내(川)의 뜻을 따서 동천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군을 안동시에 통합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으며 가구수는 28호이다
미질리는 구한말 안동군 임북면의 지역으로서 미지리, 또는 미질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계, 벌탄, 벽지곡, 동파를 병합하여 미질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다. 월곡면의 중심지가 되어 면사무소, 지서, 우체국, 국민학교, 고등공민학교, 시장 등이 있었으나 1973년 안동댐 건설로 말미암아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7월 1일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미질리에 속한 마을은 현재 움터 마을 하나 만 있으며, 가구 수는 9가구로 와룡면 절강리와 더불어 안동시에서 가장 적은 가구수가 살아간다.
이 마을은 고려 중기부터 조선말기까지 시행해 온 역원공영제도(驛院公營制度)에 의하여 예안현(禮安縣)에 속했던 부라원(浮羅院)이 있었으므로 부라원, 부라리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예안군 동하동 지역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천동과 의동면의 분천동 일부를 병합하여 부포동(리)이라 해서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74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부포에 오래 전부터 살았던 성씨로는 호군(護軍)으로 있던 안동권씨(安東權氏) 경력(經歷) 권간(權簡)의 상세(上世)로부터 살았다고 하며, 그 후 금숙(琴淑)이 권간의 사위가 되어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하였으며 조금 뒤에는 진성이씨(眞城李氏)들이 입향하였다고 한다. 수몰전 부포리는 넓은 들이 기름진 100여호의 큰 동리로 산천이 아름답고 들이 넓어 비교적 생계가 넉넉해서인지 예부터 수(壽)를 누리는 사람이 많아 수향(壽鄕)이라 부를 만큼 장수를 누리는 사람이 많았다. 현재 부포리에는 역동, 가늠골, 호사골, 햇골 등의 마을이 남아 있으며 가구수는 30여 가구로 예안면에서 적은 수에 속한다.
예안군 동상면에 속하였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늣골, 성황리, 오도락, 원음, 고감을 병합하여, 성황리 앞에 세 내가 합하여 흘러가므로 그 뜻을 따서 삼계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삼계리는 현재 수능골, 성황, 오평, 원음, 고감, 이들리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약 100가구이다.
예안면에서 가장 북쪽에 있으며 봉화군과 닿아 있다. 예안군 동상면의 지역에 속했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죽, 정자곡, 구통, 두곡, 산양평, 점곡과 봉화군 재산면의 남면리 일부를 병합하여, 산성(山城) 남쪽이 되므로, 그 뜻을 따서 신남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신남리는 현재 정자골, 선양바들, 자운, 높은데, 구티미, 점곡 등 6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70여호를 헤아린다.
예안면의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안동군 동상면에 속해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구리, 도동리, 전두리, 건천리, 송곡을 병합하여 동계천(東溪川)의 뜻을 따서 인계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근래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인계리는 현재 청구, 독실, 상전두, 하전두, 건천, 솔골 등의 마을이 있으며 가구수는 약 100호이다.
정산리는 구한말 안동군 임북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정정리(上鼎井里), 하정정리(下鼎井里), 등산리(登山里), 계곡리(桂谷里) 일부를 병합하여 정정(鼎井)과 등산(登山)의 이름을 따서 정산동(리)가 되었고, 1934년에 다시 행정구역이 변경됨에 따라 월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74년 7월 1일 월곡면이 폐지되면서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정산리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지며 전체 가구수는 190여 가구로 예안면에서 가장 많은 주민이 산다. 정산 1리는 시장, 등재, 상활지, 하활지, 마골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산 2리는 샛터, 오리실, 중마, 솥우물로 이루어져 있다.
주진리는 낙동강 가의 나루터가 되므로 배나드리, 배나들, 또는 주진(舟津)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안동군 동후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천리와 임북면의 박곡리와 예안군 읍내면의 천전동 일부를 병합하여 주진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는데, 1937년 안동댐의 시설로 인하여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주진리는 현재 행정구역상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70여호이다. 주진 1리에 속한 마을로는 배나들이 있으며, 주진 2리에는 삼산, 오른데, 노천 등의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고려 공민왕 때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최초로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해지며, 임하면의 내앞[川前]마을처럼 마을 앞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으므로 내앞 또는 천전(川前), 천전동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예안군 읍내면 지역에 속하였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천(上川), 중천(中川), 하천(下川)을 병합하여 천전리라 해서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안동댐이 시설되면서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천천리는 미질리와 더불어 예안면에서 가장 적은 가구수가 살아가는 동네로 상천, 중천, 하천 마을에 약 10가구가 살아간다.
예안면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뒤에 태봉(胎峯)이 있으므로 이름을 탯골, 또는 태곡(台谷), 태동(台洞)이라 부른다. 예안읍지인 선성지(宣城誌) 서문에서 '...송(宋)나라 대중(大中), 천성(天聖) 연간인 현종대(顯宗代)에는 길주(吉州; 옛 안동)에 속했는데 신우(辛禑:고려 우왕)의 태(胎)를 현 동쪽에다 묻었다하여 다시 군으로 만들었다가 조금 뒤에 주로 승격했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한 현 동쪽이 지금의 태곡이며 그 뒷산에 태를 묻었음으로 그 산을 지금도 태봉이라고 한다. 태곡리는 예안군 동하면의 지역으로서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외촌, 곡촌, 퇴산, 남산, 덕현과 동상면 인제동 일부를 병합하여 태곡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으며, 1995년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태곡리는 덧재, 물미, 골마, 밭마, 남산, 탯골 등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약 80가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