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과 여름의 작별
박 은 주
산수유꽃이 노랗게 번져가고 땅에는 별꽃이 피었다. 하지만 더 이상 봄은 봄이 아니었다. 코로나가 온 세상을 덮치고 개학은 늦춰지고 또 늦춰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지난가을 무렵 고관절골절 수술받으셨던 엄마가 퇴원하자마자 위암 말기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다. 세상이 온통 캄캄했다. 친정으로 뵈러 갈 때마다 엄마는 점차 사그라드는 촛불 같았다. 4월 초에 마지막으로 엄마를 뵀을 때는 손발이 부어있고 음식도 잘 드시지 못했다. 엄마가 언제 어떻게 되실지는 의사인 오빠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멀리서 사는 언니들은 코로나 상황이 나아지기만 기다리며 애를 태우는 중이었다. 언니들에게 엄마 상태를 전하고 엄마를 뵙고 돌아가는 길에 내가 있는 울진으로 오는 게 어떠냐고 했다. 머지않아 엄마와 영원히 이별해야 하는 우리 슬픔이 함께하면 조금이라도 덜할 수 있을까.
둘째 언니가 운전하는 한 차를 타고 언니 다섯이 울진으로 왔다, 엄마가 내게 가져다주라는 분홍 제라늄꽃 화분을 싣고서. 새 학기에 옮겨 온 바닷가 교원사택 좁다란 한 방에서 여섯 자매가 이틀 밤을 함께 자며 울고 웃었다. 아침에는 앞바다에 나가 파도에 밀려온 미역을 주우며 해변을 걸었다. 망양정, 성류굴, 덕구온천 가는 길에는 작년 이맘때처럼 벚꽃이 환하게 피어있었다. 차를 세우고 언니들과 꽃구경을 하자니 엄마 생각에 눈앞이 자꾸 흐려졌다. 다섯째 언니가 말했다 “가장 슬픈 화양연화구나.”
며칠 뒤 남편이 차를 대고 기다리는 영덕 가는 버스에 앉아 창밖을 보니 바람에 흩날리며 꽃잎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조수미의 동심초 구절이 마음에서 자꾸 맴돌았다. 엄마는 그 하루를 더 기다려주시지 않았다. 공휴일이었던 다음 날 아침 일찍 투표 마치고 엄마께 가려 했는데……. “저세상 가면 만날 수 있을까.”하며 그토록 보고파 하시더니, 아버지와 외할머니 곁으로 밤새 떠나가 버리셨다.
참 이상하다. 멀리 간 사람은 더 가까이 내게로 온다. 숲길을 걸어가면 엄마께 드릴 쑥국을 끓여간 첫 쑥이 돋던 언덕 위에서 나폴 대는 흰 나비가, 어느 날은 국도변 물 댄 논배미에 앉은 한 마리 두루미가 엄마가 되었다. 눈물샘은 한 개 더 생겨난 걸까. 깜빡이는 등대를 보며 바닷길을 매일 걷던 밤엔 서쪽 하늘 반짝이는 별들이 꼭 엄마가 웃으시는 것 같다. 백사장 앞 계단에 앉아 우는 울음소리를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며 지워버렸다.
영남알프스의 한 산자락 조그만 절에서 엄마의 49재 초재가 열렸다. 복사꽃과 조팝나무꽃이 신록으로 부풀어 오른 산 곳곳을 하얗게 수놓고 있었다. 극락전 안의 사진 속 엄마는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셨다. 엄마 부처님으로 우리에게 오셨다가 이제 이 세상 할 일 다 마치고 천상으로 올라갈 채비를 하고 계시는 걸까, 고단했던 육신을 벗고, 이제 훨훨 자유롭고 평안하게 가시기를 빌고 또 빌었다.
오월의 마지막 날, 엄마의 49재 막재를 마치고 돌아오며 본 울진 바다는 거울처럼 잔잔했다.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채운彩雲을 오래 바라보았다.
코로나 상황은 날로 심각해졌지만, 5월 하순 드디어 고3부터 차례로 학생들이 등교하니 그나마 학교에 활기가 돌았다. 위대한 잠언은 자연 속에 있다고 했던가, 가장 큰 위로가 되어주는 것도 자연이었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산길 바닷길을 걸었다. 학교 안 텃밭에 심은 모종이 자라 고추와 가지가 조랑조랑 열리고,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옥수수를 보면 신기하고 어쩐지 힘이 났다. 하늘을 나는 새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 그리고 그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 바다 풍경이 주는 작은 기쁨들이 마음속에서 물결처럼 퍼져 나갈 때도 있었다.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김종삼, 「어부」)
7월 초에 드디어 신청했던 명예퇴직자 확정 명단이 내려왔다. 곧 작별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울진을 떠나야 할 때도, 오랜 교직 생활을 마무리할 때도 두 달이 채 남지 않았다. 울진에서 만난 다정했던 사람들과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차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지금 내 일상의 배경이거나 내 발길이 닿았던 곳들을 다시 찾아서 오래 걷고 천천히 바라보았다. 미래의 그리움이 현재에 미리 와 기다리고 있는 듯 보고 있어도 그리운 풍경들을.
종업식 며칠 전, 퇴직 기념 송별회가 열렸다. 3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르치며 계속 배울 수 있었던 삶, 여기 울진 이 학교에서 마지막을 처음의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었음이 다행이고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동료들과 가족들의 진심 어린 축하와 격려 덕분인지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학교 문을 나설 때는 허전함보다 오랜 약속, 큰 숙제를 다 마친 듯 홀가분하고도 뿌듯한 마음이 가슴을 채워왔다.
울진을 떠나는 날 새벽, 사택 앞바다로 걸어 나갔다. 푸르스름한 어둠이 점차 붉은 빛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막 새 아침을 열며 떠오는 해를 바라보며, 삶이 이제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지만, 세상의 학교에서도 언제나 처음의 마음으로, 단순하게 감사하며 살리라 다짐하고 소망했다.
남편과 아들이 짐 정리를 다 마친 텅 빈 방을 둘러보았다. 가장 슬퍼했던 봄, 작은 기쁨들을 찾아냈던 여름, 이곳에서의 순정純情한 시간들을 잊지 않으리라. 사택 뜰앞 책읽는 소녀 동상 옆에서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다.
엄마가 남겨준 한 송이 꽃대가 올라온 제라늄 화분을 안고 집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출근할 때마다 큰 한 폭 수채화 같던 바닷길을 달려 푸른 잎이 무성한 학교 느티나무, 연호정, 첫 번째 나만의 방에 닿아 마지막 눈인사를 보내고 7번 국도로 진입했다. 곧 동해 저편 햇살에 반짝이는 은어 다리가 보이며 점점 내게서 멀어져 간다.
울울창창한 보석, 그 이름으로 내게 영원히 간직될 울진. 그곳에 작별 인사를 보냈다. 나만의 방들이여, 가장 많이 웃고, 울던 순간들이여, 머무르고 싶은 순간들, 울진이여 안녕,